# 181
리그너스 대륙전기 181
“그대에게 세계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한 엘프가 공손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눈앞의 엘프를 바라보는 엘 샤난의 얼굴은 주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떨리고 있었다.
코르다 출신의 크리솔라이트 부족이지만 엘프들의 적인 림드 산맥의 호를 섬기는 엘프 영웅이 샤난의 눈앞에 있었다.
“놀라셨겠네요.”
“……네.”
엘 아르윈의 말에 샤난이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다른 엘프도 아닌 킬리드의 영주가 자신의 막사에 있었다. 바로 엘 로즐린이 이끌고 있는 군단의 심장부에 말이다. 어느새 그녀의 눈과 귀는 밖으로 향해 있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왔답니다.”
“…….”
“먼저 엘 라스엘과의 전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알아보니 샤난 님께서 마장기의 마정석을 건드리셨더군요.”
엘 아르윈이 미소와 함께 말했다.
“호 님은 괜찮으신가요?”
“네. 다만 엘프들끼리 서로 피를 흘리는 것에 대해 굉장히 슬퍼하고 계세요. 샤난도 알다시피 우리들은 소중한 친구였잖아요?”
“아아…….”
탄성과 함께 엘 샤난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이 엘프들끼리의 무의미한 피가 흐르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호 님과 엘프는 분명 친구가 될 수 있는 사이야.’
엘 샤난은 그렇게 믿었다. 이제까지 그래오기도 했고 말이다.
림드 산맥과 크리솔라이트 부족은 동맹관계라고 부를 정도로 친했다. 하지만 엘프 왕국의 장로 엘 로즐린이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마족을 몰아낸 이후 림드산맥을 점령하겠다고 선언, 공격을 감행하고 나서부터 서로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졌다.
엘프라는 한 울타리뿐만 아니라 크리솔라이트라는 부족 내의 관계도 무너져 버렸다.
“그저께 샤난 님의 전투는 지켜봤어요.”
“안 좋은 꼴을 보였네요.”
그저께면 엘 로즐린이 지휘하는 군대와 호의 군대가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날이었다. 많은 수의 엘프들의 아까운 목숨을 잃은 끔찍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때 샤난은 이도저도 못한 채 부대를 엉망으로 지휘하는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덕분에 지금은 그 책임을 물어 근신 중에 있었다.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런 징계로 인해 지금 밖이 난리도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엘 아르윈은 샤난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뜩이나 시텔라의 생명 부족의 엘프들이 시스테인이나 크리솔라이트와 같은 약소 부족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여 사이가 좋지 않은 와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코르다의 영주이자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대표하는 영웅 엘 샤난이 근신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 전쟁의 미미한 활약으로 로즈린 장로에게 근신 명령을 받은 영웅은 그녀가 유일했다.
“엘 샤난 님이 근신을? 어째서?”
“말도 안 돼! 이는 분명 시텔라의 생명 부족이 우리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맞아. 여기는 우리들의 땅인데 왜 시텔라의 생명 부족이 우리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는 거지?”
“림드 산맥을 공격한 것도 그래.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 부족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은 알고나 있는 거야?”
덕분에 크리솔라이트 부족 엘프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물론 시텔라의 생명 부족 엘프들도 할 말은 있었다. 현재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가 인간들의 손에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마족들을 물리쳤고, 이제는 림드 산맥이라는 커다란 영토를 엘프 왕국으로 흡수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는 크리솔라이트나 시스테인 부족이 발전하는 데 림드 산맥의 자원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는 엘프들은 거의 없었다.
“엘 샤난. 호 님께서는 그대와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샤난을 향해 아르윈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시텔라의 생명 부족과 크리솔라이트 부족 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저도 크리솔라이트 부족인 그런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런 갈등은 알르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에요.”
“……전설속의 이상향 말인가요.”
“전설이 아니랍니다, 엘 샤난. 킬리드만 해도 각 종족의 엘프들은 물론이고, 수인, 인간, 마족 등 서로가 함께하고 있어요. 참고로 엘프인 제 휘하의 부하 중에는 오우거도 있답니다. 건물을 건설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오우거죠.”
“킥!”
거대한 덩치의 몬스터가 오밀조밀 건물을 건설하는 상상을 한 샤난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 알르드. 림드 산맥의 엘프들은 그 이상향을 지키기 위해 동족을 버리면서까지 전쟁에 나섰다고 했다.
‘알르드.’
한때는 샤난도 그런 이상향을 꿈꾸곤 했다. 하지만 코르다의 영주로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수인과 마족들은 엘프를 친구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노예로 여겼다. 하지만 킬리드 아니 윤호가 지배하는 림드산맥은 달랐다.
마치 다른 세계 속의 세상처럼 생각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엘 아르윈이 샤난의 얼굴에 바짝 붙어서 속삭이듯 말했다.
“저희들은 호 님을 그리고 우리의 알르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이미 많은 수의 엘프들이 저희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어요.”
“……많은 수의 엘프들이라면?”
“이 곳에 잠입한 림드 산맥의 엘프들이에요.”
“어느새?!”
샤난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화이트 섀도우 작전은 림드 산맥의 엘프들을 엘 로즐린이 이끄는 군대로 몰래 잠입시킨다는 계획으로 이는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수를 짜내던 도중 한시진이 생각한 계획이었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엘 로즐린의 군대에 잠입한 엘프들은 약속한 신호가 떨어지면 군대의 중요 시설 및 마장기 보관고를 타격, 파괴시키는 게 그 임무였다.
이런 화이트 섀도우 작전에 투입된 엘프들은 대다수가 크리솔라이트 부족이었는데, 그들은 현재 로즐린의 군대 내부에서 시텔라의 생명 부족과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이간질 시키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유일한 지휘관인 엘 샤난이 근신 명령을 받았다. 그 탓에 현재 양 부족의 분위기는 도저히 같은 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흉흉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 아아.”
엘 아르윈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샤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는 엘 샤난 역시 느끼고 있는 바였다.
“호 님은 엘 샤난 님을 믿고 있어요. 화이트 섀도우 작전의 책임자인 제가 이렇게 당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전부 그런 이유랍니다. 우리랑 함께해요. 엘 샤난.”
엘 아르윈의 눈동자가 샤난에게 향했다. 갈등과 딜레마가 얼굴에서 가득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엘 샤난이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불필요한 피는 흘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당연합니다. 호 님은 엘프들을 사랑하세요.”
그런 엘 샤난의 대답에 아르윈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우리의 이상향을 지키자!”
“밀어 붙여라! 배신자들에게 피를!”
엘프의 S랭크 보병 아벨리우스와 A랭크 보병인 엘븐 템플러가 맞닥뜨렸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함께 하는 전투는 개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검술을 뽐낼 실력도 없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무기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물론, 실력 면에서는 아벨리우스가 엘븐 템플러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엘 로즐린의 마장기 아보르 비테의 고유 능력으로 인해 신체 능력이 월등히 상승된 상황이지만,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인 윤호의 버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귀찮을 정도로 끈질기군.”
A등급 마장기 아보르 비테에서 전장의 상황을 살펴보던 엘 로즐린이 짜증을 가득 담아 말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벌써 림드 산맥을 점령했어야 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예상보다 필사적이었고, 끈질겼다.
‘소환자 녀석의 전력이 이렇게나 귀찮을 줄이야.’
엘 로즐린은 자신이 소환자를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장기, 병력 수, 사기 등 모든 면에서 자신의 군대가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림드 산맥의 도시 킬리드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엘 로즐린은 그 이유를 전부 배신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의 주력이 바로 아벨리우스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즐린님. 우측에서 데스 사이더와 황금색의 마장기가 나타났습니다.”
“로열 센티널을 보내도록 하세요!”
로즐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마장기의 피해도 크게 누적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연이은 전쟁에서 잃은 마장기만 해도 수십 기가 넘었다. 이는 왕국의 여섯 장로인 그녀로써도 엄청난 피해였다.
“로즐린님! 위험합니다!”
“뭣이?!”
콰아앙!
한 줄기의 빛이 로즐린의 마장기를 강타했다. 다행이 마나 보호막에 가로막히긴 했지만, 그녀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쳇!”
“와우! 그래도 그 거리에서 MLC를 맞췄네요? 정말 군사학교 안 나오신 거 맞아요?”
“사격은 대한민국 군인의 기본 소양이거든요?”
감탄과 함께 놀라는 한시진을 향해 가볍게 대꾸해준 호는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물론, 몸을 피하면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엘프군의 병사들을 발로 짓밟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벨리우스와 호표기들이 방어선을 펼치며 전선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좋지 않았다. 워낙 수의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이었다.
마장기가 합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군의 마장기들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전부 마장기 전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물론, 상대도 아보르 비테가 남아 있었다.
“슬슬 움직이면 좋겠는데.”
호는 이 전장 어딘가에 모습을 감추고 있을 엘 아르윈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엘 로즐린의 본대와 부딪친 지도 벌써 세 번째. 어떻게든 오늘을 버티고 난 후에는 더 이상의 여력도 없을 것 같았다.
며칠 전, 엘 아르윈은 편지로 엘 샤난이 자신들과 합류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었다. 그리고 완벽한 기회를 노려 아군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말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엘 아르윈이 기회를 만들어도 아군이 그에 호응하지 못할 정도로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전군. 2진으로 후퇴한다. 한시진. 너희들도 괜히 가만히 있다가 포위되지 말고 뒤로 빠져.”
“네!”
“캬아아앙! 좀 더 시간만 있었어도 한 녀석 더 박살낼 수 있었는데!”
계속해서 전황을 살피던 호는 일선의 아벨리우스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신속하게 명령을 내렸다. 전선이 무너지고 난전이 펼쳐지는 순간 병사들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병력 수가 열세인 마당에 호는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적들이 물러선다! 세계수의 분노로 적들을 불태워라!”
아벨리우스들이 빠지는 모습을 보며 엘 로즐린이 명령을 내렸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됐다.
수많은 전쟁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그녀는 지금의 이 상황이 호의 군대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엘븐 매지션! 공격하라!”
“친구들이여! 우리들의 진정한 친구를 돕고 탐욕을 물리칩시다!”
여태까지 얌전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던 후방의 엘프들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엘프의 C랭크 마법병인 엘븐 매지션과 문 나이트들이었다.
“뭐, 뭐야?!”
정신 마법에라도 걸린 양 갑작스레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동족의 모습에 엘 로즐린이 당황함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로 인해 로즐린은 아보르 비테의 동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게다가 갑작스레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이들이 그 두 부대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