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리그너스 대륙전기 180
“전향 제의를 하고 싶은데. 진지하게 받아들일 생각은 없나?”
“무슨 개소리!”
“닥치지 못해?!”
꽤나 뜨거운 반응에 호는 역시나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저기 보이는 의자중 하나를 끌어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아아. 흥분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줬으면 좋겠군. 너희들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걸? 아시다시피 우리 군은 주력이 엘프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전장에서 본 아벨리우스들을 설마 너희편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니겠지?”
“큿!”
한 엘프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엘 릿츠라는 이름의 영웅이었다.
“난 소환자다. 마족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지. 그렇다고 수인, 인간도 아니다. 내가 사는 도시를 이 대륙의 종족들이 뭐라고 부르는 지 알아?”
“이상향.”
“딩동댕.”
호는 곧이어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전향 제의는 그냥 상대에게 자신의 말을 들어주십사하는 의도로 한 이야기였다.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오너 시스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마음을 꺾어야해. 하지만 이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야. 차라리 설득이 가능하면 설득을 하는 게 나아.’
다행히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바로 이들의 출신이었다.
“호표기, 빗치 위치등 다양한 종족 병사들이 이상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아벨리우스, 세계수를 호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용맹하고 긍지 높은 엘프의 병사 역시 마찬가지지. 이번 전쟁에서도 많은 수의 엘프들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 여러 부족의 엘프들이지.”
“흥! 엘프의 자긍심도 없는 배신자들 따위!”
코웃음을 치는 엘 라스엘을 흘깃 바라보던 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제법 많은 부족들이 나를 따르고 있는데? 크리솔라이트, 엠레이지, 시스테인…….”
“시스테인?!”
철컹!
쇠사슬 소리가 막사 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를 악문 엘 라스엘이 눈을 붉게 물들인 채 모두들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놈들. 모두 한통속이었구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군단장님!”
“거짓말 하지마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서 마장기의 동력이 그렇게 빨리 끊어졌지?! 전부 너희들이 손을 쓴 게 아니더냐!”
엘 라스엘의 흥분한 모습을 보며 호는 가까스로 큭큭 거리는 웃음을 참았다.
시스테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는 했지만, 림드 산맥에 거주하고 있는 시스테인 부족은 채 백 명이 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저렇게까지 연관을 짓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패배에 대한 충격이 큰 것 같았다.
“큭! 저런 부족도 엘프의 부족이라고! 시스테인 녀석들 따위! 진즉에 왕국에서 추방시켜야 했다!”
“이잇!”
엘 라스엘의 도발에 엘 릿츠가 이를 악 물었다.
‘쉬워도 너무 쉬운걸?’
그 모습을 보며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서로를 이간질시키기까지는 솔직히 몇 번이나 말을 꼬아야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두 부족 사이의 골은 호의 예상보다도 더 깊었던 모양이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나 쉽게 엘 라스엘이 흥분해 두 엘프를 몰아붙이고, 두 엘프의 얼굴에도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이 떠오를 무렵이었다.
‘타오르는 집에 휘발유를 잠깐 부어볼까?’
그리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세 여인의 모습을 구경하던 호의 입술이 이죽거렸다. 머릿속으로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곧 호의 손이 강하게 엘 트라인의 손목을 잡았다. 이 셋 중 가장 성격이 순해 보이는 엘프였다.
“너는 시스테인 부족인 거 같은데? 시스테인 부족은 이번 전쟁에서 아주 큰 공을 세웠는데……. 흐음. 그래. 넌 풀어주도록 하지.”
“무, 무슨 의도냐?! 잠깐! 나는 풀려나지 않겠다!”
호는 엘 트라인을 풀어준 후, 그를 데리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갑작스럽게 자유롭게 풀려난 자신의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엘 트라인의 불안정한 표정과 그런 트라인의 뒤통수를 매섭게 노려보는 시텔라의 생명 부족 엘프 영웅인 엘 라스엘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호가 트라인을 데리고 막사 밖으로 나온 지 얼마 안 있어 막사 안에서 두 엘프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엘 라스엘이 시스테인 부족인 엘 릿츠에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했고, 한 성격하는 릿츠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받아친 모양이었다.
“휘유. 무기 하나 던져주면 서로 죽을 때까지 대결을 펼칠 기세로군. 안 그런가?”
호가 능글스러운 말투로 트라인을 향해 말했다. 이곳이 적진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일까? 자유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은 크게 주눅이 들어 있어 보였다.
“우리들의 분열을 의도한 것이냐?”
“뭐, 조금은? 하지만 내가 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알르드에는 분명 많은 수의 시스테인 부족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부족이…….”
호의 대답에 엘 트라인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트라인을 뒤로 한 채 호는 다크엘프들로 하여금 그를 감시시킨 후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대로 가만히만 두어도 저들은 알아서 자멸할 것으로 보였다.
“후우. 엘프들이 저렇게 성격이 나쁜 애들인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매일 세계수의 축복을 받고, 세계수를 수호하고, 하여튼 그 커다란 나무만 찬양하는 줄 알았는데.”
“큭큭큭.”
엘 트라인의 막사에서 나온 호를 향해 다크 엘프 영웅 케이든 크로스가 다가 왔다. 혀를 내두르는 그녀는 방금 전까지 엘 라스엘과 엘 릿츠가 묶여 있는 감옥을 감시하고 있었다.
“모두들 자신들의 상황이라는 게 있는 법이거든.”
“자신들의 상황이요? 시텔라의 생명과 그렇지 않은 부족들이 처한 상황이 다르다는 건가요?”
“맞아. 정보에 따르면 장로인 엘 로즐린 뿐 아니라 엘 라스엘과 같은 군단장급 인물들은 전부 시텔라의 생명 출신이라고 해. 그렇기 때문에 시스테인이나 크리솔라이트같은 약소 부족은 그들의 명령에 따라야하는 상황이지.”
시텔라의 생명 부족은 토갈론의 요새에서 북쪽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세력을 떨치는 부족이었다. 시스테인이나 크리솔라이트와 비교하면 그 세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이번 마족과의 전쟁만 봐도 엘프의 주력은 전부 시텔라의 생명 부족의 엘프들이었다.
그에 반해 시스테인 부족은 C등급 마장기 몇 기와 3, 4 만 가량의 병사를, 크리솔라이트 부족은 보유한 마장기가 단 한기에 불과했다. 그래서일까? 시텔라의 생명 부족 내부에서는 그 두 부족을 아니꼽게 보는 이들이 제법 있던 모양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두 부족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력이 형편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조금은 어이가 없네요. 그래도 같은 엘프들이잖요.”
“평소 때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시텔라의 생명 애들이 불만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어.”
“왜요?”
“현재 시텔라의 생명 부족의 근거지가 공격당하고 있거든.”
호는 며칠 전에 받았던 보고를 떠올렸다. 블루 스케일과 골든 크로우가 엘프 왕국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였다는 정보였다.
덕분에 킬리드로 쳐들어오는 엘프들의 군대는 상황이 제법 복잡했다.
엘 로즐린은 림드 산맥 점령을 천명했지만, 휘하의 군단장과 병사들은 골든 크로우와 블루 스케일의 대규모 군사가 자신들의 가족 및 친우가 있는 근거지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이 자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다른 부족에게 안 좋은 감정으로 표출되고 있었고, 서로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아니 지금은 꽤나 커진 상황이었다.
‘거기에 선봉대까지 전멸했으니. 쉽게 군사를 움직이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그런 호의 예상은 엘 로즐린의 본대가 도착하는 순간 순식간에 틀어졌다.
와아아아아!
“제9아벨리우스 부대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곧 엑스칼리버의 지원사격이 이어질 테니 제 자리를 사수한다.”
“제6, 7아벨리우스 부대 전멸!”
“큭! 근처에 있는 33, 34 부대가 전진. 빈 공간을 메꾼다. 근처에 있는 호표기 부대는?!”
“10, 11부대가 있습니다! 당장 지원 가겠습니다!”
엘 라스엘이 이끄는 선봉 부대가 전멸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엘 로즐린은 전장을 형성하자마자 그대로 물밀 듯이 몰려왔다.
덕분에 호와 일행들은 오전 나절부터 필사적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창날로 림드 산맥의 방어를 뚫으려는 엘 로즐린과 일찌감치 단단하게 구축한 방어선으로 로즐린의 공격을 막아내는 호의 군대는 용호상박의 대결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전부 마장기 전력의 분투 때문이었다.
“한시진! 거기는 어때?!”
“아, 아직은 괜찮아요!”
말과는 달리 상황이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았다. 양 측 마장기의 숫자가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S등급의 마장기사는 물론이고 A등급의 마장기사들도 다소 끼어 있었다. 애당초 호각세를 벌이는 게 용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양성한 스파크 마장병이 있었지만 그들은 별 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장병이라고는 해도 고작 E 랭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C등급 마장기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정도의 활약은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본거지가 공격당하는 와중에 후퇴 없이 우리를 공격하는 거냐! 저 미친 엘프가!”
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직까지는 팽팽한 전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어떻게든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렇게 호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의외의 빈틈은 최전선인 엘프 보병들끼리의 싸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버텨! 버텨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전선을 뒤로 물리지 마!”
“여기서 죽는 거다! 우리의 알르드를 위하여!”
“알라드를 위하여!”
“호 님을 위해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아벨리우스들의 목소리에 그들에게 무기를 겨누던 엘프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상향인 알르드를 외치며 동족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동족의 목숨을 빼앗는 이는 바로 자신들이었다. 하물며…….
“죽어! 더러운 배신자의 부족 놈아!”
한 엘븐 템플러가 아벨리우스의 목에 자신의 검을 찔러 넣었다. 그렇게 아벨리우스의 목숨을 빼앗은 엘븐 템플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가슴에는 시텔라의 생명 부족을 알리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와 달리 목숨을 잃는 아벨리우스는 크리솔라이트 부족 출신이었다. 림드 산맥의 엘프들이 대부분 크리솔라이트 출신이었으니 당연해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엘 로즐린의 병사들 역시 어느 정도가 시스테인과 크리솔라이트 부족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묘한 낌새를 눈치 챈 인물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치열한 전장의 분위기에 휩쓸려 있을 뿐이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전투는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결국 아보르 비테의 버프 효과를 받은 엘프 병사들이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로 정면의 아벨리우스 부대를 돌파하며 호의 눈앞까지 자신들의 병력을 들이밀었다.
잘 버티던 1선이 허물어지자 전열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호의 정확한 MLC 사격과 호표기의 돌파가 빛을 발했다. 새까만 그림자처럼 밀려오면 엘프 보병들은 호의 MLC 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받았고, 이어지는 호표기의 영혼을 건 돌파에 이은 난전에 커다란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리아 캬베데와 브로리는 저게 바로 수인족의 자랑이라며 떠들어대었다.
그리고 결국 호표기의 치열한 방어를 뚫지 못한 엘프군은 호의 병력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고는 많은 인명 피해를 내며 후퇴했다.
루 내내 이어진 전투에서 엘프군은 무려 4만에 가까운 피해를 냈고, 호 역시 총 4만의 병력 중 24000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빌어먹을.”
피해 상황을 보고 받은 호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병사들의 피해가 너무나도 컸다. 특히나 아벨리우스의 피해가 심각했다. 군대의 중추이자 일선 역할을 맡아줘야 할 보병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이다.
“킬리드에서의 원군은?”
“당장이라도 보병 병력을 편성해서 보내겠다고 했는데 그 수가…….”
말끝을 흐리는 한시진의 모습에 호는 표정을 굳혔다. 많을 리 없었다. 림드 산맥의 모든 도시에서 양성되고 있는 병사들은 지금 이 장소에 모조리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마장기의 피해는?”
“세 기가 파괴되었다.”
브로리가 대답했다. 이번 전투로 인해 블루 스케일에서 지원받은 자넷은 모조리 박살이 났다. 그와 함께 컹컹이의 키마라이 또한 완파되었다. 덕분에 중상을 입은 컹컹이는 킬리드로 후송된 상황이었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엘 로즐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아군은 세 기의 마장기를 잃었지만, 그들은 여덟 기의 마장기가 고철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마장기 전력이 아군의 전력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려 다섯 배가 넘는 병사 수의 차이는 도저히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다행인 점은 다음 날 바로 이어질 것만 같았던 엘 로즐린의 공세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쪽도 꽤나 피해가 컸는지 군대를 재정비하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