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리그너스 대륙전기 176
“저는 그대가 킬리드에 거주하는 친구들을 설득해 줬으면 합니다.”
“그, 그건!”
엘 샤난은 곧 자신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림드 산맥은 엘프들을 비롯해 다양한 종족들에게 알르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모든 종족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이상향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향에서 살고 있는 엘프들이 과연 알르드를 버리고 자신들과 뜻을 함께 할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오히려 알르드를 무너뜨리려는 자신들을 타박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엘 샤난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엘 샤난의 모습을 본 엘 로즐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림드 산맥과 관계를 맺고 있는 어린 엘프라 그런 것일까? 그녀의 눈에 비친 엘 샤난의 모습은 엘프들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모습이었다.
“알겠습니다. 장로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엘 샤난은 엘 로즐린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었다. 센티널인 자신과는 달리 엘 로즐린은 엘프 왕국의 장로. 제의라고는 하지만 명령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말을 거부한다는 것은 샤난으로써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
“엘 샤난. 림드 산맥에 있는 동족들이 마음에 걸릴 겁니다.”
“……네.”
아주 느릿하게 엘 샤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대륙 모두에게 세계수의 축복을 내려줘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를 정화시켜 줘야만 해요. 새롭고 영광스러운 나날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말이죠.”
혼란스러웠다. 엘 샤난은 그런 엘 로즐린의 말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궤변일 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아아.”
그리고 엘 로즐린이 나간 후 샤난은 짙은 안개가 낀 인시네라 호수를 보며 괴로워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부터 전장에 나서 동족을 상대로 활을 겨눠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엘 샤난이 무언가를 집어삼킬 것 같은 눈으로 정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냐. 이래서는 안 돼. 이러다가는 크리솔라이트 부족 전체가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거야. 로즐린 장로는 잘 못 됐어. 이건 엘프들의 영광을 위한 일이 아니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 그렇고말고.”
엘 샤난은 몸을 일으켰다. 거침없이 무언가를 행동하려던 그녀는 잠시 몸을 멈칫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아.”
지금 자신이 행동하려는 게 옳은 일인가에 대해 머리가 아파오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자신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었던 호의 얼굴이 떠오르자 샤난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엘 로즐린이 움직였다!”
“지금 당장 킬리드에 연락을 해!”
잠잠했던 코르다의 엘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A, B랭크로 이루어진 엘프 병사들이 먼저 킬리드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으며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마장기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엘프 왕국이 자랑하는 A등급 마장기 아보르 비테도 포함되어 있었다.
“림드 산맥의 마족을 정화시키고, 우리들의 후손이 살 수 있는 생명의 땅으로 만드는 겁니다!”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이번 원정에는 엘 로즐린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휘하에 있는 로열 센티널들 대부분이 원정에 나섰다. 그리고 그중에는 코르다의 영주였던 엘 샤난도 끼어 있었다.
그녀는 엘프의 B랭크 궁병인 에머너츠 아쳐 부대의 부장을 맡아 전장에 나섰다.
* * *
엘 로즐린의 움직임은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활동하는 엘프들을 통해 곧바로 호에게 전달되었다.
“요격을 하는 거다!”
그리고 사태를 파악한 브로리가 호에게 외치듯 말했다. 엘프들의 병력이 킬리드를 노리고 쳐들어오고 있었다.
그 수는 대략 이십만. 마장기만 해도 네 개 편대, 도합 열여섯 기나 되었다. 그런 병력을 상대로 농성전은 무의미하는 게 브로리의 생각이었다.
“숫자의 차이가 너무 극심해요. 아군보다 무려 대여섯 배는 많은 병력이라고요. 게다가 한 번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어요.”
그런 브로리의 의견을 엘 아르윈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 그녀의 반대에 브로리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 역시 아군과 적과의 전력 차이가 크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회의실에 모인 영웅들은 각자 하나둘씩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입으로 꺼냈다. 하지만 대부분 브로리나 엘 아르윈이 했던 말과 비슷한 내용에 불과했다.
‘으음…….’
A등급 영웅인 리아 캬베데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요격을 하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며 호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멍멍이를 떠올렸다. 로우덴이 있었으면 조금 다른 의견을 내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현재 해머스의 특성화 발전을 위한 시찰 중이었다.
코르다의 엘프들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차에 시찰을 보낸 게 이렇게 안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호의 시선이 시진에게로 향했다. 현대 전술을 배운 그녀에게는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게릴라전과 정예군을 이용한 거점 타격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요. 전략 폭격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힘들겠죠.”
“아, 그건……. 아니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말하려던 호는 곧 말을 바꿨다.
“지금 당장은 공중에서 지원 포격을 해줄 만한 게 없지.”
전략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이상 크게 도움이 되는 병종은 아니었지만 이 세계에는 비행병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게다가 하늘을 나는 마장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에서는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KOREA사 애들이 어떤 놈들인데.’
희귀한데다가 구하기가 까다로워서 그렇지. 그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기는 존재했다.
“흐음. 게릴라전과 정예군을 이용한 거점 타격이라…….”
“제가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지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닐 것 같아요.”
“그래?”
“네. 이미 크게 한 번 당한 전적이 있으니까요. 저번처럼 이번에도 기습에 대한 대비는 철저하게 준비할 것 같아요.”
한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호는 잠시 생각을 곱씹었다. 전력의 차이는 약 여섯 배. 게다가 상대측에는 A등급 마장기 아보르 비테도 출진한 상황이었다. 실제적인 전투력은 B등급 마장기에 불과하지만 주위 아군들의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아보르 비테의 광역 버프는 제법 까다롭게 작용할 터였다.
‘숫자의 차이를 지휘관 버프를 통한 병사들의 질로 버텨낼 생각이었는데.’
아보르 비테가 있다면 그런 계획도 힘들어질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전투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엘프들은 킬리드를 향해 진군해오고 있었다.
“농성은 불가. 출진한다.”
그리고 고민을 하던 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엘프들이 모든 준비를 갖추고 킬리드의 앞까지 도달할 때까지 몸을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킬리드의 성벽이 단단하다 하더라도 마장기와 이십 만에 가까운 군사를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엘 로즐린은 과감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라고 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한 나쁘게 말하면 겁쟁이. 한시진과 브로리의 말에 따르면 아보르 비테의 오너인 그녀는 마족과의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전투에 직접 나선 적이 없다고 했다.
아보르 비테라는 광역 버프에 특화된 마장기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전술적인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엘 로즐린 본인이 마장기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만큼 전초전부터 전력으로 부딪쳐 오지는 않을 거다.’
이번 공격은 엘 코숏의 경우와는 다르게 회전이 아니라 요격이었다. 이십 만이라는 병사의 숫자는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많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쳐들어온다고 해서 한 번에 그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넓은 전장이 마련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많아봤자 선봉으로 생각되는 삼, 사만 정도. 거기에 마장기 몇 대에 불과할 터였다.
그렇다면 일단은 해볼 만 하다는 게 호의 생각이었다. 그와 더불어 그들에게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고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심어줘야만 했다. 그래야만 길어질 것 같은 이 전쟁에 조금이라도 승산이 생겨날 터였다.
“아, 시진아.”
호는 자신의 명령에 따라 출진하려는 영웅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던 한시진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이야기했던 화이트 섀도우 작전. 이번에 한 번 써먹어 보자.”
“어? 네!”
호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한시진이 손뼉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트 섀도우 작전. 이런 상황을 대비해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던 계획이었다.
* * *
“킬리드에서 적들이 출진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로열 센티널 중 하나이자 이번 킬리드 공략의 선봉대를 맡은 엘 라스엘은 부하의 말에 피식 코웃음을 터뜨렸다. 엘 코숏을 패배시켰다는 것에 대해 자신감이 붙은 것일까? 림드 산맥의 소환자들이 병사와 마장기를 이끌고 킬리드의 성문을 나섰다는 보고였다.
“하! 그 용기가 가상하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 엘 샤난. 그대에게 세계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를 확인한 엘 라스엘은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엘프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코르다의 영주인 그녀는 선봉대에 소속된 궁수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건넨 엘 샤난은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소환자들이 출진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실입니다. 하지만 걱정할 바는 아닙니다.”
엘 라스엘이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세만 높은 소환자들의 병사들은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역시 동족의 피가 흐를 수 있다는 것은 마음에 걸리는군요.”
“그렇군요…….”
어떤 생각에 잠겼는지 샤난이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런 샤난의 행동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엘 라스엘은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알르드라는 환상에 빠진 동족들을 피해 림드 산맥의 소환자들만 먼저 제압할 수만 있다면 동족들의 피해 없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림드 산맥은 마정석이 생산되는 장소지 않습니까? 림드 산맥을 손에 넣게 되면 우리 엘프들에게 아, 샤난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군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엘 라스엘의 말에 샤난은 지그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엘 라스엘. 이미 엘 코숏 님이 그들에게 패하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장기를 선두에 세워 적들의 공격을 막아낼 생각입니다.”
엘 라스엘의 휘하에는 2개 편대. 여덟 기의 마장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윈드라이더와 엘 스카우터가 두 기에 세비트리가 네 기였다.
세계수를 닮은 거대한 나무 앤트와 비슷한 생김새를 지닌 마장기 세비트리는 단단한 장갑으로 방어전에 특화되어 있는 만큼 배치만 잘한다면 적들의 기습쯤은 가볍게 무마시킬 수 있었다.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답과 함께 엘 샤난은 라스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저도 대비를 해야겠군요. 적들의 돌진을 꺾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숲의 화살이 필요할 테니까요.”
“후후. 엘 샤난 님의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엘 라스엘의 대답을 들은 샤난은 곧바로 그녀의 막사를 벗어났다. 하지만 막사에서 나온 그녀가 향한 곳은 에머넌스 아쳐들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가 아닌 마장기의 마정석이 보관되고 있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