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리그너스 대륙전기 175
“매력적인 조건이로군. 받아들이겠다.”
마장기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거래였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엘 아르윈을 B등급 영웅으로 승급시켜 윈드라이너의 오너로 임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엘 로즐린이 킬리드를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라홀로프 상단이 킬리드를 찾은 또 다른 이유는 특산품 흑색 전투마의 판매였다. 대륙 시세보다 10 퍼센트 정도 비싼 가격으로 한 필에 550리스의 값을 지불해야했지만 호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흑색 전투마는 켄타우로스 전사를 랭크 업을 시키는 데 필요한 특산품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디아린 상단을 통해 흑색 전투마를 구매, 몇 부대의 호표기를 양성하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그들을 양성하려면 많은 수의 특산품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거래가 계속해서 이어지면 호는 어렵지 않게 호표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이번에 저희가 판매하는 흑색 전투마는 호 님께서도 잘 아는 수인 영웅이 판매하는 특산품입니다. 그녀는 엘프와 호 님의 전쟁에서 자신의 특산품이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답니다.’
그리고 리그너스 대륙에서 호가 아는 수인 영웅은 몇 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원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특산품을 판매했을 리는 만무했다.
“게다가 원인족의 영토에는 흑색 전투마가 특산품으로 생산되는 도시가 없지.”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살피다 보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그리고 직접 서로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수인 영웅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바리안스의 대지의 패자이자 사막의 꾀주머니라는 별명을 지닌 묘인 영웅 리셴르나였다.
그리고 리셴르나의 영토 중 한 곳에는 흑색 전투마가 생산되는 도시가 있었다.
“어째서 리셴르나가?”
만약 지금의 이 상황이 게임이었다면 띵동.거리는 소리와 함께 윤호가 혼란에 빠졌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왔을 것 같았다. 그만큼 호는 리셴르나와 접점이 없었다.
굳이 찾자면 엘 카닐슨의 도움을 받아 안테 로리라는 도시 자체를 박살내면서까지 그녀의 병사들과 마장기를 전멸시켜 버린 것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가 엘프들과의 전쟁에서 도움이 되라는 의도로 흑색 전투마를 판매한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서마 내가 엘프들과 치고 박는 동안 어부지리를 취하겠다는 의도인가?”
그런 의도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현재 그녀는 엘프의 영토인 코르다와 커티삭 두 곳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만약 양쪽에서 엘프들이 병사를 일으킨다면 그녀로써도 난감한 상황에 빠질 터였다.
더군다나 엘 로즐린의 주력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리셴르나와 관계된 이 거래는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리셴르나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간에 지금 당장은 켄타우로스 전사를 호표기로 진급시켜 전력의 상승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리셴르나가 군사를 일으켜 엘 로즐린의 뒤통수를 서늘하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앗다.
* * *
“아아아아!”
호가 내민 아이템을 받아든 엘 아르윈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몸이 밝은 빛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축복이라니. 부럽도다.”
어둠의 축복, 짐승의 축복 그리고 이제는 세계수의 축복까지. 엘 아르윈의 격이 상승하는 모습을 보며 브로리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런 브로리의 눈동자에는 질투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영웅들의 등급이 높아지는 것을 가리켜 세계수의 축복이라고 부르나 보죠?”
“각 종족들 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른 것 같기는 한데, 엘프들을 대상으로는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야.”
한시진의 질문에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승급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호의 시야 한쪽에는 엘 아르윈이 B등급 영웅으로 승급했다는 내용이 담긴 메시지창이 반복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어떻게 엘 아르윈을 B등급으로 승급시키긴 했네.’
승전의 대가로 윈드라이더를 얻은 이후 호는 디아린 상단을 통해 엘 아르윈을 승급 시키는 데 필요한 아이템을 구해달라는 의뢰를 넣었었다.
하지만 아이템을 구하는 일이 제법 시일이 걸리는 일이었기에 당장이라도 마장기 전력을 보강시켜야 했던 호는 결국 라홀로프 상단의 의뢰를 받아들였고, 현재 킬리드에는 윈드라이더가 아닌 수인족의 B등급 마장기 릴라릴라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릴라릴라는 리아 캬베데가 사용할 수 있게끔 수리와 개조까지 모두 마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릴라릴라가 킬리드에 배치되고,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엘 아르윈이 B등급 클래스인 상급 바람 정령사로 승급할 때까지 코르다에 주둔하고 있는 엘프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엘 로즐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골든 크로우나 블루 스케일 때문은 아니었다. 마장기나 엘프의 주력이 북쪽으로 이동하려는 낌새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엘 로즐린의 주력 부대는 코르다와 커티삭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호 역시 킬리드에 자신의 전력을 배치해야 했다. C등급 마장기 카니앗산과 만 명 가량에 해당하는 병사들이 에스트라다에 주둔하고 있을 뿐 모든 전력이 전부 킬리드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장기의 운용에 사용되는 특산품인 마정석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짐승신의 축복을 받고 싶다!”
브로리의 짜증이 호의 상념을 깨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빛이 사라진 엘 아르윈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확실히 B등급으로 승급을 해서 그런 것일까? 느껴지는 분위기가 전보다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무게감이 있다고 해야 할까.
“호! 짐승신의 축복! 짐슝신의 축복!”
“……전에도 말했다시피 너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SS등급의 영웅을 SSS등급으로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아이템을 구하는 것은 디아린에게도 능력 밖의 일이었다. 전에 넌지시 이야기를 한 번 꺼내봤지만 그녀는 브로리의 SSS등급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의 대부분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알고 있는 아이템 역시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고 말이다.
그렇게 옆에서 찡찡거리는 브로리를 잠시 뒤로 밀어버린 호는 킬리드에 주둔하고 있는 영웅들의 정보를 한 번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B등급 이상의 영웅이었지만 아직 그렇지 못한 영웅들도 있었다.
‘다음에는 칼타스 녀석을 승급 시켜야겠군.’
킬리드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건설에 재능을 보이는 오우거 녀석은 제법 높은 충성도를 보이고 있었다. 칼타스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은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으로 알아본 후 디아린에게 아이템 구매 의뢰를 넣으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칼타스는 C등급 영웅. 그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은 디아린의 능력이라면 시간은 걸릴지라도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축복이라. 이 세계의 존재들은 노력 없이도 금방 강해질 수 있네요.”
엘 아르윈의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 한시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영웅의 승급이라는 것을 처음 본 그녀는 갑자기 달라진 엘 아르윈의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우리처럼 노력을 한다고 해서 금방 강해지는 것은 아니잖아? 각자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해. 어차피 이 세계가 우리의 상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도 아니고. 이들은 그렇게 살아온 게 아닐까?”
“그렇겠네요.”
한시진이 호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엘프들의 움직임이 조용하네요.”
“음. 엘 코숏이라는 녀석이 이끄는 군대를 물리쳤으니 엘 로즐린 장로가 눈에 불을 켜고 쳐들어올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신중한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엘 로즐린과 함께 볼 붸르니체스를 상대로 전투를 치러본 경험이 있는 한시진도 조금은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이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킬리드의 방어는 더욱더 굳건해질 터였다.
게다가 림드 산맥의 중심도시라고 할 수 있는 디르시나는 상업 특성화의 영향을 받아 매달 엄청난 돈을 세금으로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재화를 바탕으로 특산품을 구매해 랭크가 높은 병사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번 전투에서 획득한 마장기의 잔해를 타임리스 상단과 라홀로프 상단에 판매해 다시 한 번 돈방석에 오른 호는 이번에는 마정석이 생산되는 도시 해머스의 특성화를 계획하고 있었고, 이미 로우덴이 시찰에 나선 상황이었다.
“계속 이렇게 대치 상황만 벌어져도 나쁘지는 않겠는데.”
호가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러다 보면 골든 크로우와 블루 스케일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엘 로즐린은 결국 병사들을 토갈론 요새 북쪽으로 물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코르다를 감싸고 있는, 예로부터 인시네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호수에 안개가 짙게 꼈다.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다섯 걸음만 떨어져도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랫동안 코르다의 영주로 있던 엘 샤난 역시 이렇게 인시네라에 안개가 짙게 낀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후우.”
짙은 안개를 바라보는 엘 샤난의 입에서 조그마한 한숨이 흘러 나왔다. 현재 그녀는 코르다의 업무를 처리하는 영주성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코르다의 실권은 아주 조그마한 것에 불과했다. 현재 코르다에는 그녀보다 훨씬 높은 권력을 지닌 엘프 왕국의 장로 엘 로즐린과 그녀 휘하의 로열 센티널들이 머무르고 있던 까닭이었다.
‘다들 미쳤어!’
엘 로즐린과 로열 센티널들의 명령을 받는 엘프 병사들과 코르다의 주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엘 샤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코르다에는 예전과는 다른 사악함이 감돌고 있었다. 동족의 희생을 치러서라도 땅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비뚤어진 욕망이었다.
‘차라리 호 님과 손을 잡고 마족이나 수인을 물리쳤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더군다나 윤호 휘하의 마장기사들은 그 실력이 정말로 대단했다고 했다. 하지만 엘 로즐린과 고위 엘프들은 그런 생각 따위는 한 톨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건드려도 크게 탈이 없어 보이는 림드 산맥을 차지하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미 엘 코숏의 군단이 된통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엘 샤난 님.”
밖에서 여성 엘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호위하는 엘븐 템플러였다.
“무슨 일이죠?”
“엘 로즐린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엘프 왕국의 여왕 엘 유스타시아 다음으로 고귀한 존재인 장로 로즐린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엘 샤난은 몸을 일으켰다. 곧 허리를 살짝 구부정하게 숙인 나이든 엘프가 집무실 안으로 모습을 보이자 엘 샤난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엘 로즐린님께 세계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그대에게도 세계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엘 로즐린의 목소리가 엘 샤난의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 듣기 좋은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엘 로즐린 장로님?”
“이제 곧 친구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친구들과…….”
엘 샤난은 말을 꺼낸 엘 로즐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그녀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욕망이 가득해보였다. 자신의 라이벌 중 하나였던 볼 붸르니체스를 물리쳤다는데서 나오는 감정인 것 같았다.
“엘 로즐린 장로님. 킬리드에는 많은 동족들이 살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샤난. 하지만 우리 엘프들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차라리 엘 샤난.”
엘 로즐린이 엘 샤난을 향해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번 전쟁에는 그대가 함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킬리드에 거주하는 엘프는 대부분이 크리솔라이트 부족이라고 들었습니다. 바로 그대와 같은 부족이지요.”
엘 로즐린의 시선을 받은 엘 샤난은 슬쩍 그녀의 눈을 피했다. 마치 자신을 그리고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깔보듯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