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리그너스 대륙전기 174
“파괴된 자넷의 수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카틀라스의 스퀴드 수운다경은 뭐라고 하셨나?”
“곧 기술자들을 보내주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파된 키마라이를 수리하기에는 그 실력이 부족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드워프들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타임리스 상단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보고가 들어온 게 있나?”
전투는 대승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마장기 편대가 섞인 엘프 군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 기쁨도 잠시 호를 비롯해 킬리드에 주둔하는 영웅들은 눈 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호가 가장 먼저 신경을 쓴 것은 파괴된 마장기의 수리였다. 먼저 손을 잡은 카틀라스 군항의 영주 스퀴드 수운다가 마장기 수리 인력을 보내주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하지만 그 실력이 대단치는 않은 모양인지 B등급 이상의 마장기는 수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래서 기술의 차이란…….’
완파된 자넷 두 기는 도저히 살릴 수가 없었다. 잔해로 남은 저 마장기들은 타임리스 상단에 판매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호는 이미 타임리스 상단에게 마장기에 대한 수리 의뢰를 넣었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타임리스 상단의 드워프들이 현재 드워르기니를 타고 킬리드를 향해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디르시나에서의 병력 수송은?”
“이틀 뒤 아벨리우스 네 부대가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베코바와 해머스에서도 정예 실리스를 네 부대씩 보냈다고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다음으로 신경 써야 할 것은 이번 전투에서 죽어나간 병력들의 보충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아벨리우스들은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적들의 공격을 가장 선두에서 받아내야 했던 게 그 이유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투에서 사용된 물자들을 보충하는 등 신경을 써야 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도 엘 코숏이라는 녀석이 이끄는 엘프 군단을 상대로 큰 피해를 줬으니 근시일 내 다시 쳐들어오지는 않을 터였다.
특히나 엘프의 마장기는 전멸했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설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괴멸된 상황이었다. B등급 마장기를 포함해 무려 열다섯 기가 저번 전투에서 고철로 변한 상황이었다.
마장기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엘프 왕국의 윈드라이더는 한시진과 브로리의 공격에 양 팔이 잘렸고, 오너는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윈드라이더의 오너였던 엘프 영웅은 현재 무장을 해제당한 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엘 도그피그라고 했던가?”
감옥에 갇힌 마장기의 오너는 B등급의 남성 엘프 영웅이었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개돼지. 정말로 특이한 이름이었다. 미남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남성 엘프의 이름이 개돼지라니.
대한민국의 많은 엘프빠들이 눈물을 흘릴 만한 이름이었다.
“하긴 브로리도 있는데. 도그피그라는 이름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 누가 그 이름이 영어라고 생각하겠어?”
홀로 그렇게 결론을 내린 호는 고개를 주억였다. 경악에 가까운 KOREA사의 네이밍 센스를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어느 정도 세부 능력치에 반영이 된 것일까?
엘 도그피그의 능력은 B등급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전쯤 C등급으로 전직한 엘 아르윈보다도 능력이 떨어졌다. 엘프의 모든 마장기들이 박살이 날 때까지 홀로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윈드라이더라는 마장기의 특성이 영향을 미쳤겠지.’
세비트리나 엘 스카우터는 상대 마장기와 육박전을 벌이는 근접 전투에 특화된 마장기였다. 그에 반해 윈드라이더를 활을 주무기로 사용해 견제와 빈틈을 노린 강력한 한방으로 적들을 제압하는 마장기였다.
어찌되었든 호는 동력원과 그 외형이 충분히 남아 있는 윈드라이더를 현재 킬리드를 향하 달려오고 있는 타임리스 상단의 드워프들의 손에 맡겨 복구할 생각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블루 스케일한테 지원받은 자넷 두 기를 잃은 것은 안타깝지만 윈드라이더를 얻을 수 있다고 가정을 하면 그리 큰 손해는 아니었다.
게다가 열다섯 기가 넘는 마장기의 잔해 더미는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올 터였다.
하지만 윈드라이더는 엘프의 마장기. 마장기의 탑승 조건이 최소 B등급의 영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자신의 휘하에 있는 영웅 중에서는 윈드라이더에 탑승할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었다.
아, 생각해 보니 한 명이 있긴 했다.
“에어리스는 탑승할 수 있으려나?”
하이 엘프이긴 해도 그녀 또한 엘프. 잘하면 탑승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윈드라이더에 탑승한 에어리스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조종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마장기는 제 말을 듣지 않네요.”
결국 윈드라이더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엘 도그피그라는 남성 엘프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거나 엘 아르윈 혹은 다른 엘프 영웅들을 B등급으로 승급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쉬울 것 같은 방법은 바로 엘 도그피그를 오너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의 영웅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엘 아르윈이나 엘 카닐슨을 승급시키기 위해서는 디아린 상단을 통해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을 구매해야 했는데 적어도 한 달 이상이 걸렸다.
하지만 오너 시스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마음을 꺾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설득부터 해야겠어.”
능력치는 낮지만 그래도 마장기를 탑승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쟁에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내가 감히 개, 돼지나 다름없는 너희들을 도울지 아느냐?! 곧 엘 로즐린님의 군대가 너희들을 모조리 짐승들의 밥으로 만들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이겼다고 너희들이 뭐라도 될 줄 아느냐?! 착각하지 마라! 짖는 것은 적당히 해야지, 소환자! 나는 너희들과는 신분이 다른 시텔라의 생명 부족의 엘프다!”
“…….”
하지만 저주에 가까운 남성 엘프의 말에 지하 감옥을 찾은 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호와 함께 지하 감옥을 찾은 리아 캬베데가 안절부절못하며 호의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
“리아.”
“꺄앙?! 네?”
화들짝 놀라는 리아 캬뱌데를 뒤로 한 채 호가 눈을 부릅떴다.
행여나 엘 도그피그가 SS등급 이상의 능력치를 보유한 브로리나 로우덴처럼 죽이기에는 아까운 뛰어난 인물이었다면 호는 어떻게든 오너 시스템을 이용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B등급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C등급 영웅보다 능력치가 낮은 입이 험한 저 엘프는 살려둘 가치가 딱히 없어 보였다.
오히려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정신적으로 좋을 것 같았다.
“오크들과 거친 수인들을 모으도록. 그리고저놈하고 한 방에 집어넣는다.저놈이 죽을 때까지 평생 괴롭힘을 당하도록 만들겠어.”
“오, 오크들과 엘프를 한 방에요?”
“어. 한 백 마리 정도 집어넣어. 남색에 관심 있는 녀석도 괜찮겠군. 그냥 모조리 집어넣어.”
리아 캬베데의 말에 호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크 몇몇이 엘 도그피그가 있는 방으로 흐느적흐느적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끔찍한 비명소리가 킬리드의 지하 감옥에서 울려 퍼졌다.
“설득이 잘 안 됐나 봐요?”
“응. 욕만 잔뜩 먹고 온 것 같아. 아, 웬만하면 지하 감옥에는 접근하지 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서 끔찍한 명령을 내려뒀거든.”
감옥을 찾은 후 집무실로 돌아온 호는 거칠게 자리에 앉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소환자들을 개, 돼지로 생각하는 쓰레기 같은 녀석은 죽어 마땅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볼 붸르니체스가 다를 바 없는 녀석이었다.
“알았어요. 일단 표정 펴요. 얼굴에 주름 생긴다고요.”
자신의 찡그린 이마를 손가락으로 피려고 하는 한시진의 행동에 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사랑이 담긴 애교 섞인 행동이 잠시나마 더러웠던 기분을 정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부여잡았다.
“아이 참. 여기 집무실인데…….”
“내 집무실인데 뭐 어때?”
얼굴을 붉히고 있지만 자신의 손을 잡는 호의 적극적인 행동이 싫지는 않았는지 한시진의 손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던 순간이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행동은 문을 닫고 하면 좋겠는데? 호, 손님이 찾아왔다.”
“히끅?!”
“허업!”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시진과 호의 신영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브로리였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집무실 문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녀는 자신을 향해 인상을 쓰는 한시진을 향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손님이라니? 타임리스 상단이 도착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았을 텐데?”
“타임리스 상단이 아니라 다른 상단이다.”
“다른 상단? 전쟁이 터진 킬리드를 찾아올 상단이 있다고? 디아린 아니야?”
“내가 우리 영지의 상단을 모를 정도로 바보인 줄 아느냐? 라홀로프 상단이다.”
브로리의 대답에 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라홀로프 상단은 디르시나의 특성화 발전을 위해 노예를 구입하면서 연을 맺게 된 상단이었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B등급의 인간 영웅 페이샬 티슈와 똑같은 페이샬이라는 이름의 묘인이 상단주로 있는 노예 상단이었다.
“라홀로프 상단주가 찾아왔다. 페이샬이라는 묘인족이라 하더군.”
“……곧 만나보도록 하지.”
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그녀가 킬리드를 찾아왔는지는 짐작이 가는 게 없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서 나쁠 일은 없었다. 라홀로프 상단의 상단주 페이샬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는 호 혼자 향했다. 한시진이나 브로리와 같이 갈까 했지만 그녀들은 영지의 일을 처리한다며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우덴은 라홀로프 상단의 등장에 바람처럼 그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 님.”
호의 등장에 파이프에 말린 무언가를 꾹꾹 담아서 피우고 있던 페이샬이 몸을 일으키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로군. 라홀로프 상단의 상단주가 그리 한가한 직책은 아닐 텐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킬리드를 찾아올 줄은 몰랐어.”
“호 님이 위험에 빠지셨다는 소문에 절로 엉덩이가 움직이더군요.”
페이샬이 웃으며 대답했다. 거기에는 윤호라는 소환자에 대한 페이샬의 개인적인 호기심도 한몫했다. 다른 소환자들은 노예상인 자신과는 눈만 마주쳐도 겁에 질렸지만 윤호라는 인물은 달랐기 때문이었다.
묘인족 특유의 동그란 눈동자가 호를 직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페이샬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먼저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 님에게 손해 보는 제안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랬으면 좋겠군.”
“라홀로프 상단은 이번 전쟁에서 윤호 님이 획득하신 전리품 중 하나를 원해요.”
“우리가 획득한 전리품?”
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리품이라고 해봤자 라홀로프 상단이 탐을 낼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그러면 좋은 대답을 기대하겠습니다.”
라홀로프 상단이 킬리드를 찾은 이유는 의외의 물건 때문이었다. 바로 마장기였다.
라홀로프 상단의 상단주인 페이샬은 수리 필요하지만 충분히 가동이 가능한 엘프의 B등급 마장기 윈드라이더를 원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인물이 윈드라이더의 구매를 원하고 있다는 대답할 들었을 뿐이었다.
“엘프와 관련된 인물은 아니랍니다.”
그리고 라홀로프 상단은 윈드라이더를 구매하는 대가로 리스가 아닌 현물을 제시했다. 바로 수인의 B등급 마장기 릴라릴라였다. 양 팔이 박살이 난 윈드라이더처럼 라홀로프 상단에 제시한 릴라릴라 역시 수리와 정비가 필요한 마장기였다.
결국 엘프의 마장기를 건네주고 동급의 수인 마장기를 받는 거래였다. 하지만 이 거래는 호에게 있어 불리할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큰 이득이기도 했다.
윈드라이더는 사용이 가능한 오너가 없는 탓에 장식품에 불과한 마장기였다.
하지만 릴라릴라는 경우가 달랐다. 리아 캬베데라는 수인 영웅이 존재했다.
만약 이 거래를 받아들여 릴라릴라를 얻게 되면 수리를 마친 후 리아를 이용해 전투에 참여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