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리그너스 대륙전기 173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혔으면 좋겠군.”
전리품은 없어도 상관없으니 호는 아군의 마장기사들이 최대한 엘프들의 마장기를 완파해 주기를 바랐다. 특히나 지금과 같이 상대 마장기사의 능력이 떨어지는 지금 어떻게든 마장기 전력에 큰 타격을 줘야 했다.
분명 엘프 왕국의 장로인 엘 로즐린의 친위대는 저것보다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날 터. 더군다나 이번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벌어졌던 전쟁에서 엘 로즐린은 두 대의 A등급 마장기인 아보르 비테를 운용했다고도 했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이 전투는 자신들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한 간보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마장기가 등장한 이상 그냥 보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띵동.
-<침착하라!> D 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지휘관이 독려> B+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아크 스피릿> A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전장의 노래> S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스킬의 발동과 함께 허공에서 생겨난 푸른색의 빛들이 잘게 나눠진 파편처럼 넓게 퍼져 아군을 감싸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전장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었다. 그래도 호가 사용한 스킬의 영향 범위 안에 있는 아벨리우스들은 마치 일당백의 전사처럼 상대의 엘븐 템플러들을 수수깡처럼 쓸어버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엘프가 엘프를 공격하는 잔인한 전장의 모습은 소환자라는 존재가 이 세계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기 때문이었다.
“동족상잔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정의 손길을 펼칠 수는 없지.”
먼저 자신에게 검을 겨눈 것은 엘 로즐린. 그녀에게 대가를 받아내기는 힘들겠지만 상처쯤은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상처는 바로 오늘 킬리드를 찾은 엘프 군단이었다.
철컥. 쿠우웅!
마력의 충전이 완료되었다는 불이 뜨자 재빠르게 어깨에 MLC를 걸친 호는 그대로 엘프 군단 후방의 에머넌츠 아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마력포를 발사했다.
꽤나 먼 거리였지만 호는 정확하게 에머넌츠 아쳐 부대의 중앙을 명중시켰고, 중앙이 뻥 뚫린 엘프 궁수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 전장에는 포병이 있어야 된다니까.”
포병이라기보다는 저격병에 가까웠지만 뭐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어차피 병사들에게 마장기의 마력포는 대포보다도 훨씬 위협적이었다.
적들의 공격 범위가 닿지 않는 곳에서 멀리서 쏜다. 강철의 비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포병은 미국의 공군과 함께 호가 가장 좋아하는 부대 중 하나였다.
* * *
엘프 군대와 호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킬리드 성의 들판은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전투 상황은 백중세. 아니 6 대 4 정도로 호가 밀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 차이가 크게 작용하긴 하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치우기 위해 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엑스칼리버의 화력을 이용해 위험 요소마다 어떻게든 적들에게 피해를 주고는 있었지만 십만에 가까운 엘프들은 개미떼처럼 아군진영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S랭크인 아벨리우스와 지휘관 클래스의 버프 능력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적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벨리우스를 보조해줄 수 있는 정예 실리스나 켄타우로스 전사와 같은 궁병과 기병들이 B, C랭크가 아닌 S랭크 이상의 병사들이었다면 그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벌써 몇 시간째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마장기의 동력원인 마정석 교체는 네 번이나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언제부터일까? 자신처럼 아군의 병사들을 향해 엘프 진영에서부터 날아오던 B등급 마장기 윈드라이더의 화살 공격은 잠잠해져 있었다.
“제76아벨리우스 부대 전멸! 크워어어! 좌측이 뚫리기 일보 직전입니다!”
“곧 엄호 사격하겠다. 자리를 피하도록.”
오우거 칼타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대답을 해준 호는 재빠르게 어깨에 MLC를 걸쳤다. 그러고는 조준경을 통해 엘프 병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을 꽉 다물었다.
투아앙!
잠시 후 밝은 빛과 함께 마력포가 떨어진 장소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한 호는 MLC를 내려놓고는 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 전 자신이 발사했던 MLC 의 파괴력은 아무것도 아닌 무시무시한 전투가 한참 전부터 펼쳐지고 있었다.
쿠웅! 쿠와앙!
전장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가 강철 거인들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전투의 생생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스무 기가 넘었던 마장기는 어느새 여섯 기로 줄어 있었다.
다급하게 들려오는 마력 통신을 통해 추측한 결과 아군 마장기는 반파된 케이든 크로스의 키마라이를 포함해 자넷 세 기가 박살이 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엘프들의 마장기는 전멸 일보 직전이었다.
“제법 피해는 크지만 이번 전투는 우리가 잡을 수 있겠어.”
마침 황금색의 마장기가 엘프 왕국의 B등급 마장기인 엘 스카우터의 목덜미를 물고 하늘 위로 던지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이어서 하늘로 몸을 날린 데스 사이더가 자신의 낫을 휘두르자 반으로 갈라진 엘 스카우터가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잔해만 남긴 채 사라졌다.
“나이스!”
환상적인 연계 플레이에 호는 환호와 함께 주먹에 불끈 힘을 주었다.
“좋았어!”
“이제 한 대!”
마장기끼리 연결된 마력통신에서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로써 열네 기나 되었던 엘프 왕국의 마장기는 단 한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아군의 마장기는 데스 사이더와 브로리의 골든 스테이트를 포함해 네 기가 건재했다. 그리고 이 네 기의 마장기가 병사들끼리 벌이고 있는 전투에 투입되는 순간 불리했던 전황은 순식간에 뒤집을 수 있었다.
“컹컹이와 남은 자넷 한기는 뒤로 빠져서 전투에 참여하도록.”
“알겠습니다. 컹컹!”
“네.”
어차피 남은 한 기는 브로리와 한시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끝을 낼 수 있었다. 그보다는 빠르게 마장기를 전장에 투입시켜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게 중요했다. 이어서 한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곧 끝내고 도와드릴게요!”
“무리하지는 마. 아직까지 충분히 버틸 만하니까.”
그리고 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히 무리했다가 데스 사이더가 파괴라도 되면 그보다 더 안 좋은 일은 없었다.
“마장기다!”
“모두들 도망쳐!”
B등급과 C등급이기는 하지만 마장기의 존재는 엘프 병사들에게 공포의 사신과도 다름없었다.
거기에 엑스칼리버의 포격 또한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맹렬하게 공세를 취하던 엘프들의 움직임이 조금 소극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아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전장의 상황을 살펴보던 호가 엘프의 본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윈드 라이더의 화살 공격을 생각해 보면 아마 본진에 있던 마장기를 뒤로 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쪽도 패배를 직감했나 보군.”
그렇다면 이대로 엘프 병사들이 온전하게 돌아가게 만들어서는 안됐다. 마장기의 차이만큼이나 극심한 게 병사들의 수 차이였다.
“마장기의 뒤를 따라 진격한다. 후방의 엑스칼리버도 전투에 합류하도록. 킬리드를 공격한 엘프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지만 다음 전투를 위해서라도 호는 여기서 오늘 킬리드를 공격한 엘프 군대를 전멸시킬 생각이었다.
* * *
“아아…….”
코르다의 영주, 엘 샤난은 나무줄기를 엮은 침대 위에 몸을 옆으로 뉘이고 있었다. 항상 밝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얼굴은 오늘따라 수심이 가득했다.
“하아.”
가슴을 부여잡은 엘 샤난의 벌어진 입에서는 아까 전부터 헛숨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호 님.’
림드 산맥의 패자라 불리는 인간 남자를 떠올린 엘 샤난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현재 그는 자신의 동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겠지만 많은 생명이 지고 뜨거운 피들이 땅에 흐르고 있을 터였다.
사실 엘 샤난은 며칠 전 림드 산맥으로 출진한 엘 코숏이 이끄는 엘프 군단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코르다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호의를 가지고 있는 윤호와 전쟁터에서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흑…….”
엘 샤난의 눈동자에서 눈물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림드 산맥을 손에 넣기로 한 센티널 회의의 결정이 떨어지고, 엘 코숏의 군단이 출진했을 때부터 매일 밤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게 어느새 그녀의 일과가 되고 있었다.
자신은 쳐다볼 수도 없는 높은 위치에 있는 종족의 장로 엘 로즐린의 야망은 그녀에게 이런 끔찍한 슬픔을 안겨다주고 있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엘 샤난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자 엘 샤난은 흐르던 눈물을 닦고는 몸을 일으켰다.
엘프의 큰 귀는 그 소리의 정체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의 정체는 바로 마장기였다.
“엘 샤난 님! 엘 코숏 님의 군대가 도착했어요!”
“코숏 님의 군대가?”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부하의 목소리에 엘 샤난이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출진했던 군대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슬퍼하는 것도 그렇다고 기뻐하는 것도 아니었다.
“곧 나가겠다.”
말을 마친 엘 샤난은 눈물자국을 빠르게 지우고는 밖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엘 코숏의 군단은 패배했다. 그것도 대패였다.
‘이럴 수가!’
패잔병을 바라보는 엘 샤난이 표정이 멍해졌다. 의기양양하게 출발했던 마장기들은 윈드라이더 한 대를 제외하면 돌아온 게 없었다. 열다섯 기나 되는 마장기들이 전쟁터에서 고철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십만이 넘었던 엘프 중 살아온 것은 그 반의반이 채 될까 싶을 정도였다.
“엘 코숏 님은 어떻게 되셨지?!”
그는 한때 코르다를 지키던 엘 아스린과 같은 로열 센티널로 군단급의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엘프였다. 그런 그가 기껏 이, 삼만 밖에 되지 않는 림드 산맥을 상대로 대패한 것이다.
그리고 멀리서 엘 코숏이 굳은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는 것이 샤난의 눈에 들어왔다. 처참한 모습을 한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멀리서 보기에도 심상치 않을 정도로 험악했다. 그런 엘 코숏을 피해 장소를 옮긴 엘 샤난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자신의 동족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추모하는 의미의 행동이 아니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빼앗은 남자가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에 감사함을 보내는 기도였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엘 코숏의 군단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엘 로즐린 장로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