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리그너스 대륙전기 172
“일단은 버프를 받은 아벨리우스를 믿는 수밖에.”
호는 머릿속으로 지휘관 클래스의 버프를 받은 일반 병사들의 전투력을 떠올렸다. S등급 이상의 클래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클래스인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는 A등급의 레어 클래스였다.
뿌우우! 뿌우우!
잠시 후, 미노타우르스의 뿔피리가 킬리드를 깨웠다. 적들의 출연을 알리는 소리였다. 곧 출진 준비를 마친 호가 성벽 위에서 적들을 내려 보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 전투는 힘과 힘의 싸움, 전면전이 될 게 분명했다. 계략을 사용하기에는 엘프들이 당한 게 제법 많았다. 경계심이 한창 높아져 있는 그들에게 계략을 걸기에는 오히려 심력의 소모가 클 뿐이었다.
“싸우기 참 좋은 날씨로군.”
브로리가 말했다. 그 옆으로 무표정한 표정의 한시진이 병사들에게 빠르게 무언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마장기 편대는?”
“현재 마정석 교체 중이에요. 곧 준비가 끝날 거예요. 그런데, 오빠.”
한시진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호는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데스 사이더. 정말 제가 사용해야 하나요?”
“물론이지.”
한시진의 말에 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좋은 아이템을 얻으면 그것을 더욱 잘 활용할 수 있는 영웅에게 주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호는 자신보다 한시진의 마장기 운용 능력이 더욱 뛰어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엑스칼리버에 탑승할 예정이거든.”
“엑스칼리버요? 인간들의 마장기요?”
“응.”
엑스칼리버. 조그마한 단검과 빠르게 마나 화살을 연발로 사용할 수 있는 기관총 그리고 마력을 집중시켜 스나이퍼처럼 먼 거리까지 마력탄을 발사할 수 있는 일명 MLC(Mana Launcher)를 사용하는 B등급 마장기였다.
“생긴 게 멋있잖아.”
호의 대답에 한시진이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마정석 교체가 한창인 엑스칼리버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가 보기에도 데스 사이더나 키마라이 보다는 훨씬 멋들어진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망토도 걸치고 있는데다가 흰색과 금색으로 도색된 인간모습의 마장기는 마치 백색의 기사처럼 보였다.
뭐,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시진은 호가 괜한 이유로 저 마장기를 선택한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MLC 의 장거리 공격이 가능한 엑스칼리버는 지휘관 클래스의 장점을 살리는 데도 안성맞춤이지. 그리고…….’
엑스칼리버. 이 세계가 아닌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호 제국의 황제였던 호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마장기 중 하나였다. 당연히 조종에 대해서는 그 어느 마장기보다도 익숙했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꽈아앙!
고막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상대방의 진지에서 이런 공격을 가할 수 병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마장기의 마력포였다.
“크으읏! 마력포 공격이다! 모두들 조심해!”
어깨에 나뭇잎 모양의 견장을 찬 엘프 왕국의 분대장 리츠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어진 마장기의 마력포 공격에 그녀의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는 곧 묻혀버리고야 말았다. 곧 번쩍임과 함께 눈앞이 명멸되더니 꺼졌던 시야가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리츠는 파란 하늘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력포의 충격파에 휩쓸려 쓰러진 모양이었다. 다행히 정신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운 좋게도 마력포를 직격으로 맞은 건 아닌 듯했다. 만약 직격으로 맞았다면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끄으응.”
온몸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절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척! 척! 척!
그 때 리츠의 귀로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타 종족보다 조금은 가볍게 들리는 발소리. 엘프의 발걸음이었다.
‘다행히 아군이 있는 쪽으로 떨어졌나 보네. 그래도 이대로 있으면 위험해.’
리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게다가 잠시 후면 상대 진영의 마장기들이 다시 공격을 가할 터였다.
그 생각에 리츠는 몸을 옆으로 살짝 굴러 땅바닥에 손을 짚었다.
손아귀를 비롯한 몸 전체에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이를 악 물어 몸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상체를 세워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리츠는 거대한 카이트 실드를 든 엘프가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차가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리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같은 동족이지만 상대 엘프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적대감과 살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벨……리우스?”
하물며 상대는 세계수를 수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엘프의 엘리트 전사였다. 엘븐 템플러인 리츠 역시 세계수를 수호할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아벨리우스를 목표로 훈련을 거듭하고 전쟁 경험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리츠는 곧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엘프 왕국의 아벨리우스는 이번 붉은 핏빛의 대지 및 림드 산맥 공략에 참가하지 않았었다.
“어째서 아벨리우스가? 언제 아군이…….”
그러나 리츠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S랭크의 엘프 보병 아벨리우스의 검이 한 치의 망설임도 그리고 오차도 없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콰아앙! 쾅!
“컹컹. 골드 이글과 엑스칼리버가 합류한 것뿐인데 엄청나네요.”
번쩍임과 함께 연이은 폭발음에 엘프들의 병사들이 우수수 하고 쓰러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컹컹이가 말했다. 마족의 B등급 마장기 키마라이에 탑승하고 있는 황금 놀은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앞으로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인간들의 마장기는 근접전이 약한 편이지. 거리만 좁히면 상대하기가 쉬운 녀석들이야. 나라면 단숨에 접근해서 이빨로 물어뜯어버리겠어.”
마력 통신구를 통해 들려오는 브로리의 목소리에 컹컹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행동은 저 무식한 소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마장기에 탑승했다 하더라도 마력포의 사이를 뚫고 상대의 마장기로 접근하는 행동은 목숨이 여러 개가 있어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 동료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한시진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엘프들의 마장기를 바라보았다.
데스 사이더의 조종간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워져 있었다. 마족과의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엘프 왕국의 A등급 마장기 아보르 비테는 없었지만, 세비트리와 윈드라이더 그리고 표범과 비슷한 형태를 지닌 엘 스카우터까지 세 종류의 마장기가 열 기 정도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시진의 데스 사이더를 비롯해 브로리의 골든 스테이트 그리고 컹컹이와 케이든 크로스의 키마라이, 블루 스케일에서 지원 온 자넷 네기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채 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역할은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상대 마장기 편대를 상대해 피해를 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상황에서 아예 신경을 끈 것은 아니었다.
“제6아벨리우스 부대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16부대와 교체한다. 2번 골드 이글. 11시 방향의 엘븐 템플러들을 향해 자유사격.”
“제 1, 2아벨리우스 부대 전멸!”
“21, 22부대가 전진. 정예 실리스와 엑스칼리버가 엄호사격을 할 테니 최대한 버티도록. 곧 켄타우로스 전사들이 적들의 후방에서 악몽을 선사해줄 거다.”
“제6정예 실리스 부대가 엘븐 템플러 부대에게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곧바로 16아벨리우스 부대 쪽으로 퇴각한다. 이어서 제 11 켄타우로스 부대가 아군 진영으로 침입한 엘븐 템플러 부대의 퇴로를 막고, 제13, 14부대가 섬멸하도록.”
일 분 일 초가 멀다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통신구를 통해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기계처럼 이어지는 남자의 목소리. 바로 윤호의 목소리였다.
‘대단해…….’
혼란의 도가니라 다름없는 전장에서 호는 수만에 가까운 병사들을 거의 완벽하게 지휘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격총과 비슷한 능력을 보이는 무기를 보유한 엑스칼리버에 탑승한 채 적재적소에 강력한 엄호사격으로 아군을 위기에서 구해주거나 적들을 괴멸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학교를 졸업한 전적이 있는 한시진은 이런 호의 능력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이건 책상위에서 책으로 배워서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능력이었다.
“평범한 회사원……. 아니었어?”
분명 예전에 호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고 있는 호의 모습은 한, 두 번 이런 전쟁을 겪어본 게 아닌 듯했다. 어쨌든 이런 호의 능력으로 인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엘프들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오히려 어떤 전장에서는 엘프들을 섬멸하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후우.”
한시진은 눈을 감고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당장이라도 데스 사이더를 이끌고 엘프들을 휩쓸어 아군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전쟁은 단순히 병사들을 쓸어버린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단 한 기만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는 이 세계의 전쟁 병기 마장기를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한시진의 귀로 드디어 기다리던 호의 명령이 떨어졌다.
“적 마장기 편대가 움직이는군. 스코프로 확인해 본 결과 총 열두 기. 거기에 추가적으로 엘 스카우트 두 기가 더 합류할 것 같다.”
총 열네 기의 마장기. 그에 반해 아군은 여덟 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력 통신을 연 한시진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금방 처리하고 전장에 합류할 테니까 오빠.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군. 우드라바와 푸 한잔 마실 시간에 모든 걸 끝내주겠다.”
통신구를 통해 들려오는 한시진과 브로리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호는 웃음을 흘렸다. 뒤이어 컹컹이가 커엉거리며 무슨 말을 하는 게 들려오기는 했지만 마력 통신구를 닫느라 컹컹이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나중에 들으면 되겠지.”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별거 아닌 말일 게 분명했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아군의 마장기사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럴 만 했다. 한시진과 브로리의 실력은 평범한 마장기사들은 가볍게 찜 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컹컹이의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영웅 정보(Status)>
1. 이름 : 엘 코숏
2. 성별 : 남(241)
3. 종족 : 엘프
4. 소속 : 시텔라의 생명
5. 레벨 : 167
6. 직업 : 쉴드 센티널(B)
7. 세부능력
통솔 : 242 / 300(A)
무력 : 166 / 200(B)
지력 : 86 / 100(C)
정치 : 79 / 100(C)
매력 : 187 / 200(B)
호는 엘프의 마장기 편대를 지휘하는 대장기로 보이는 B등급 마장기, 윈드 라이더의 영웅 정보를 확인했다. B등급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는 엘프 영웅은 한시진이나 브로리 심지어 컹컹이에 비교해도 그 능력치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이네.”
혹시나 숨겨진 실력자들이 있을까 싶어 다른 마장기에 탑승한 엘프 영웅들을 전부 살펴보았지만, 모두들 한결같이 B등급 클래스를 지닌 영웅들에 불과했다. 결국 이번 마장기 전의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숫자의 차이가 난다고는 하지만 한시진과 브로리의 마장기 조종술을 생각해 보면 여섯 대의 차이는 차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아군 마장기사들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