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너스 대륙전기-170화 (170/522)

# 170

리그너스 대륙전기 170

호가 블루 스케일의 영웅 똘레오와 만나는 동안에도 킬리드는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코르다에 모인 엘프 군이 이십만에 가까워졌고, 국경에서는 엘프 왕국의 마장기인 세비트리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킬리드의 경계 지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엘프 정찰병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킬리드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게 변해가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건가?”

“왜 엘프들이 우리를 공격하려는 거지? 함께 마족을 상대한 동맹관계가 아니었나?”

함께 손을 잡고 마족을 물리쳤던 엘프들이 이번에는 킬리드로 진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킬리드의 영지민들은 다들 두려움에 떨었다.

이는 킬리드에 거주하고 있는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들은 코르다에 주둔한 엘프들을 향해 거센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자신들과 같은 동족, 친우들인 만큼 그 배신감이 더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코르다로 찾아가야 하오!”

“코르다의 동족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특히나 킬리드의 엘프 영지민 중 대다수을 차지하고 있는 엘프 부족인 크리솔라이트 부족 엘프들의 실망감과 분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인가?”

“우리가 먼저 그리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어요.”

답답함이 가득한 브로리의 말에 한시진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현재 킬리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지민들의 상황과 국경 지대에서 일어나는 엘프들의 도발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킬리드가 먼저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경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엘 로즐린은 곧바로 병사를 일으킬 거예요.”

그리고 킬리드의 전력으로는 결코 엘프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 거 같은데. 차라리 선제공격을 감행해 조금이라도 엘프들에게 피해를 주는 게 나을 것 같다.”

“마장기가 아닌 일반 병사들은 섬멸해봤자 그 효과가 굉장히 미비하다는 건 브로리 님도 아실 텐데요?”

엘프와 마족의 전쟁에 참여하면서 한시진은 이 세계의 전쟁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또한 어떻게 전쟁을 치르는지를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엘프의 장로 중 한 명이자 엘프군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엘 로즐린이 어떤 식으로 병사를 운용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엘 로즐린의 전쟁 방식은 꽤나 호전적이에요. 아군의 피해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적을 효율적으로 분쇄시킬 지에 초점을 두고 있죠.”

한시진이 주변의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책상 위에 촤악 펼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마 모든 병력을 동원해 단숨에 킬리드를 점령하려 들 거예요. 마장기 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들도 총동원을 하겠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 어째서 그년이 마족이 아니라 엘프의 탈을 쓰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아마 그년은 전생이 서큐버스였을 거다.”

엘 로즐린을 향한 저주에 가까운 브로리의 말에 한시진은 피식 하고 웃음을 지었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고는 하지만 엘프들이 이렇게나 빠르게 뒤통수를 치리라고는 한시진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제가 생각하는 이 세계의 전쟁방식은 굉장히 단순해요.”

“마장기 때문이지.”

“맞아요. 강력한 전쟁 병기인 마장기의 수가 전장의 승패를 거의 좌우하다시피 하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엘프들의 마장기를 무력화시켜야만 해요.”

“좋은 방법이 있는가?”

브로리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금빛 눈을 들어 한시진을 쳐다보았다.

“기습입니다.”

“……이십만이 넘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코르다를 기습한다고? 어떻게 하면 그런 멍청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를 수 있는 거지? 게다가 선제공격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브로리의 빈정거림에도 한시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함께 말했다.

“코르다를 기습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코르다로 수송되는 마정석을 탈취하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마장기들은 마정석이라는 게 있어야지만 운용이 가능하잖아요?”

말을 마친 한시진은 혀로 입술을 살짝 쓸었다. 브로리는 한시진의 붉은색 입술이 오늘 따라 더욱 붉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한시진의 말대로만 된다면 킬리드는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마정석이 없는 마장기는 고철이나 다름없었다.

“큿!”

브로리가 자신의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일반 병사가 많다고 해도 마장기 없이 공성전을 치르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은 엘프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좋은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시진의 계획을 인정하자니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에잇!”

“커어엉?!”

브로리의 분노에 찬 주먹질에 난데없이 한 대 얻어맞은 황금 놀의 비명소리가 회의실에 크게 울려 퍼졌다.

한시진의 명령에 따라 곧 군대가 편성되었다. 많은 수는 아니었다. 한시진은 엘프처럼 숲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정예 실리스와 켄타우로스 전사로 부대를 구성했다.

“병사들의 질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은데. 차라리 아벨리우스를 운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군대의 편성을 마치자 브로리의 투덜거림이 한시진의 귀에 들려왔다. S랭크가 아닌 B랭크 심지어 C랭크에 불과한 병사들로 기습부대를 구성한 게 여간 맘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마장기도 운용하지 않으니…….’

마정석을 활성화시키면서 필연적으로 요란한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마장기는 기습 부대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오우거 칼타스의 말에 따르면 픽시라는 이름의 정령 마장기들은 굉장히 조용하며 기습에 적합하다고 했지만 현재 상황에서 구할 방도가 없었다.

“기습에는 은밀함과 신속함이 생명입니다. 아벨리우스는 너무 눈에 띄어요.”

그런 브로리의 말에 한시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커다란 타워 쉴드와 황금색으로 빛나는 투구를 장비한 아벨리우스로 기습을 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으읔!”

그리고 한심스럽다는 한시진의 말투에 브로리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치 심각한 타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컹컹거리는 컹컹이의 명치를 가볍게 한 대 쳐준 브로리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엘프들의 마정석 호위부대에 마장기가 있으면 어떻게 할 테냐?!”

“…….”

한시진의 눈동자가 다시금 브로리에게 향했다.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브로리의 무게감 있는 말투 때문에 한시진은 그녀가 꽤나 생각이 깊은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많은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분명 브로리는 이 세계에서 만났던 존재들 중 전투능력만 보면 가장 강했다. 선택의 신전이라는 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던 만마의 제왕이라는 쉐르난비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신은 공평했다. 브로리의 전투 능력은 감탄스러울 정도였지만 한시진이 느낀 그녀의 전술 감각은 영 꽝이었다.

‘하기야 그러니 본대를 버리고 나랑 오빠를 쫓아왔겠지.’

그리고 한시진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럴 땐 당연히 브로리 님의 골든 스테이트가 출동해야지요. 아마 마정석을 호위하는 엘프들의 마장기는 많아 봤자 두, 세기에 불과할 겁니다. 그 정도라면 브로리 님의 실력이라면 식은 죽 먹기 아니겠어요? 저는 힘들지 모르겠지만…….”

“물론이다! 그 정도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지. 하긴 은밀함이 생명인데 다른 마장기는 필요하지 않겠어.”

고개를 주억거리는 브로리를 보며 한시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 *

기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밀함과 신속함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정확한 정보였다. 하지만 한시진이 영주로 있는 킬리드에는 그 누구보다도 엘프들의 정보를 정확하게 가져올 수 있는 뛰어난 정보원들이 있었다.

“나흘 뒤 리넨의 가도에 마정석 수송대가 지나갈 거예요!”

“일주일 전 쯤 커티삭에서 코르다로 마정석 수송대가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긴 귀를 지닌 미남, 미녀들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한시진과 브로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바로 내일 모레 녹풍의 숨결에 코르다로 향하는 마정석 수송대가 지나갈 것 같다는 이야기예요. 또한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세비트리도 한 대도 목격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중에는 킬리드의 전 영주 엘 아르윈도 있었다.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꺼내는 그녀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한시진과 브로리를 향해 보내는 비웃음은 아니었다. 동족의 피를 흘리려는 엘프들의 장로 엘 로즐린의 그릇된 탐욕에게 보내는 미소였다.

‘어째서 엘 샤난은 가만히 있는 거지? 수인들의 침입 때 호 님에게 도움을 받았으면서?!’

그런 엘 로즐린에 대한 엘 아르윈의 실망감은 엘프라는 동족을 넘어서 코르다에 있는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일원들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시진은 킬리드에 거주하는 그런 엘프들의 실망감을 잘 느끼고 또한 이용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엘프와 서로 창칼을 겨누며 피를 흘리는 일은 전적으로 원하지 않아요. 서로 손을 잡고 마족이라는 공통의 적을 맞아 싸우기 까지 했잖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까지 왔어요.”

“맞아. 목숨을 걸고 함께 마족과 싸웠잖아?”

“나도 그 전쟁에 참여했다고. 그런데 왜 우리를 공격하려는 거지?”

한시진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고, 몇몇 엘프들이 크게 맞장구를 쳤다. 점점 그 목소리가 커져가기 시작하자 엘 아르윈이 나서서 엘프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그만큼 킬리드에 거주하고 있는 엘프 영지민들은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들에 대해 큰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나 자신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준 게 없었다. 오히려 마족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때는 마장기와 병사들을 동원해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그게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동족이 킬리드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그 정황이 확실해지면서 킬리드의 엘프들은 자신들에게 칼끝을 겨눈 동족들로 인해 다른 종족의 영지민들에게 눈칫밥을 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들은 킬리드 뿐만 아니라 림드 산맥을 모두 점령할 거예요.”

“그리고 우리들이 만들어낸 이상향 알르드를 무너뜨리겠지. 우리들의 영주인 호도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엘프가 아닌 소환자라는 이유로 목을 베어버리겠지. 혹은 이마에 화살을 박아 넣거나.”

“아아…….”

“그건 안 돼. 우리의 알르드를 무너뜨리게 둘 수는 없어.”

한시진과 브로리의 말에 엘프들은 다들 충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들에게 있어 유토피아를 가리키는 알르드. 엘프 뿐 아니라 모든 종족이 한데 모여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도시. 그곳이 바로 킬리드였고, 림드 산맥이었으며 소환자 윤호의 지배 아래에 있는 도시였다.

“코르다의 엘프는 탐욕스러운 마족이나 다를 바 없어.”

동족을 깎아내리는 브로리의 과감한 말에 이 자리에 모인 몇몇 엘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다수의 엘프들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들의 도움이 더욱 많이 필요해요.”

이어서 한시진이 말했다. 그녀는 엘프들이 자신에게 더 많은 정확한 정보들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그리고…….

“엘 아르윈. 여기서 녹풍의 숨결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자신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꺼내는 한시진의 질문에 엘 아르윈은 머릿속에서 다양한 감정이 회오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엘프들을 그리고 자신의 동족들을 정말로 공격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대답여하에 따라 동족의 피가 숲을 물들게 분명했다. 한시진을 바라보는 엘 아르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예 실리스의 움직임이라면 하루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잠시 후 엘 아르윈이 가볍게 대꾸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날 한시진과 브로리 그리고 컹컹이가 포함된 정예 실리스, 켄타우로스 전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킬리드를 떠나 코르다의 숲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