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리그너스 대륙전기 169
“림드 산맥의 패자이자 디르시나의 영주 윤호다.”
어찌되었든 똘레오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 그런 탓에 호는 킬리드로 떠나기 전에 응접실에서 똘레오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오늘 내가 별로 시간이 없군.”
호가 이어서 말했다. 이제 곧 있으면 엘 로즐린과 림드 산맥의 명운을 걸린 전쟁을 치르기 위해 킬리드로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말을 하는 호의 표정은 약간의 다급함도 담겨 있는 듯 보였다.
“아하, 엘프들의 장로 엘 로즐린의 탐욕 때문이로군요. 하마터면 제가 늦을 뻔했네요. 이거 운이 좋은 걸요?”
“무슨 소리지?”
똘레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미묘한 뉘앙스에 호와 아스트리드 벨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족의 영토였던 커티삭이 엘프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엘프들이 림드 산맥을 차지하기 위해 병사들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소식도 말이죠.”
호는 똘레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카틀라스 군항의 영주 스퀴드 수운다를 떠올렸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경계를 맞대고 있는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영주라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역시 림드 산맥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영지의 영주라 그런지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 일을 통해 림드 산맥의 패자이자 마족의 소환자이신 윤호 님께서는 마족의 품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작 하셨습니다. 그것을 축하드리며 이건 제가 모시는 카틀라스 군항의 영주 스퀴드 수운다님께서 림드 산맥의 패자 호 님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편지?”
아스트리드 벨을 통해 편지를 건네받은 호는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고는 반사적으로 똘레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편지에는 블루 스케일의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블루 스케일의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는 엘프의 탐욕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림드 산맥의 패자, 즉 자신을 돕겠다고 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뒷배가 되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왜?’
그리고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스퀴드 수운다님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세이라 클리퍼드 여왕님께서는 소환자인 윤호 님이 이 세계에서 보여주신 능력을 예전부터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으음.”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이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른 소환자들에 비한다면 호가 이뤄낸 성과는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는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엘프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블루 스케일이 그들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자신을 지원하기에는 그 명분과 실익이 없어보였다.
“또한 이는 골든 크로우의 지배자이시자 팔 왕국의 수장이신 이레네 아르티아님이 세이라 클리퍼드 폐하께 제안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골든 크로우가?”
“네, 그렇습니다. 만약 호 님께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블루 스케일 뿐 아니라 골든 크로우의 육상 병력이 엘프들을 견제할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엘 로즐린을 말이죠.”
호는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생각이 골든 크로우의 재상 그나이 칼츠만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븐 템플러 때문에 도와주려는 건가? 아니면?’
현재 골든 크로우는 호에게 마장기 제작과 수리에 관련된 기술을 넘겨주는 대가로 마정석을 비롯해 인간들의 보병보다 훨씬 유용한 A랭크 엘프 보병인 엘븐 템플러를 매주 인도받고 있었다. 만약 엘 로즐린이 림드 산맥을 차지하게 되면 그 거래는 당연히 무산될 터였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엘프들의 장로인 엘 로즐린과 척을 지다니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프 왕국의 장로인 엘 로즐린은 블루 스케일 전체가 총력을 동원한다 해도 상대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족과의 전쟁에 승리한 엘프 군대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대단했다.
“어?”
하지만 갑작스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날이 추운 것도 아닌데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분명 골든 크로우는…….”
그런 호의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똘레오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엘프 영토의 동쪽의 끝 부분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요. 그리고 그곳은…….”
“엘 로즐린의 영토지.”
“그렇습니다.”
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현재 엘 로즐린의 주 병력은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족과의 전쟁으로 인해 그녀는 최소 수십 기 이상의 마장기를 잃었다.
그렇다면 붉은 핏빛의 대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엘 로즐린의 영토는 현재 무주공산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 골든 크로우의 이레네 아르티아와 그나이 칼츠만도 그 점을 노리고 자신을 돕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일 터였다. 물론, 이 전쟁은 점점 스케일이 커질 터였다. 종국적으로는 인간과 엘프의 맞대결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게다가 다른 다섯 종족이 있는 만큼 종족의 명운을 걸고 전쟁을 벌이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골든 크로우와 블루 스케일이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뭔지 말해주겠나?”
호는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며 똘레오를 쳐다보았다.
골든 크로우와 블루 스케일이 자신에게 원하는 조건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인간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지만.’
호는 1회 차 소환자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여차저차 목숨만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림드 산맥이라는 한 지역의 패자로 어느 정도의 전쟁 경험은 물론이고 원인들을 상대로 몇 번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경험도 있었다.
‘블루 스케일이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건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리고 블루 스케일과 원인은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현재 호가 차지하고 있는 림드 산맥 때문이었다. 마정석을 발단으로 시작된 셰발 전쟁에서 멸문했던 발란스 가문 역시 블루 스케일의 후작가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로우덴과 브로리가 연관이 된 전쟁이기도 했다.
거기에 호는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라는 레어 클래스도 보유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어중이떠중이 영웅들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그뿐일까? 휘하의 부하들 중 몇몇은 대륙 통일의 꿈을 꾸게 만들 정도의 엘리트들이었다.
육상전력이 허접하다는 평가를 받는 블루 스케일이 군침을 흘리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리고 똘레오의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빛을 내뿜었다.
“블루 스케일의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님은 호 님을 블루 스케일의 품에 안고 싶다고 말하셨습니다. 다만, 림드 산맥의 패자가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 단순한 동맹으로도 만족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둘의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먼저 단순한 군사 동맹이라면 카틀라스 군항을 다스리시는 스퀴드 수운다님께서 림드 산맥의 패자께서 허락하신다는 전제조건 아래에 커티삭으로 병사를 동원해 림드 산맥으로 향하는 엘프들을 막아낼 계획입니다.”
듣기에는 전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똘레오의 말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블루 스케일의 육상 병력은 그 수준이 처참할 정도였다. 거기에 블루 스케일 전부가 움직인다는 말도 없었다. 똘레오는 카틀라스 군항을 다스리는 스퀴드 수운다만을 입에 올렸을 뿐이었다.
게다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병기인 마장기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었다. 물론, 해상병력에 집중된 블루 스케일의 전력을 생각해 보면 육상에서 활동하는 마장기는 대다수가 C등급 마장기로 이루어졌을 터였다.
그러나 수성전에서는 그런 C등급 마장기도 큰 도움이 되게 마련이었다. 하물며 마장기의 전력 자체가 부족한 자신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결국 블루 스케일의 세이라 클리퍼드는 자신이 그리고 림드 산맥이 블루 스케일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게 분명했다.
“…….”
호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아스트리드 벨에게 향했다. 그녀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심하는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솔직히 말하도록 하지. 카틀라스 군항의 육상병력은 이번 전쟁에서 별달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
“비슷한 생각입니다.”
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똘레오의 모습이 조금은 얄밉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블루 스케일을 믿기에도 무리가 있다.”
“커티삭에서 호 님이 위험한 탈출을 벌였던 게 불과 몇 달 전인 거 같은데…….”
호의 말이 끝나자 아스트리드 벨이 흘러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충분히 똘레오의 귀에 들어갈 정도였다.
호와 그 일행들은 이 세계에 처음 소환되어 마족의 이름 아래에 차츰 성장, 수인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까지 거두며 림드 산맥이라는 작지 않은 영토에 마족의 깃발을 꽂아 넣었다.
하지만 대영주 볼 붸르니체스의 눈 밖에 나 커티삭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 결국 엘프들과 손을 잡고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볼 붸르니체스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뒀지만 이제는 엘프들의 창칼을 몸으로 받아내야 되는 상황이었다.
“이 세계에서 소환자들이 겪은 시련을 생각하면 림드 산맥의 패자이신 윤호 님과 그 옆에 계신 분의 걱정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셰이라 클리퍼드 여왕님께서도 그 점을 우려하고 계십니다.”
“흐음.”
같은 인간이라 그런 것일까? 똘레오의 반응도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세이라 클러퍼드의 이야기도 제법 호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이라 클리퍼드 여왕님께서는 먼저 림드 산맥의 패자께 신뢰를 얻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호의 머릿속에 어떻게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똘레오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호 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가 왕성에 전해지면 지체 없이 블루 스케일의 서부 군대가 움직일 예정입니다. 골든 크로우 또한 군사 행동을 개시할 것입니다. 게다가…….”
똘레오의 목소리에 미묘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멀찍이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호는 무슨 소리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영지민들의 놀란 아우성 속에는 기계음이 함께했다. 그리고 잠시 후, 페이샬 티슈가 황급히 집무실로 달려왔다.
“영주님! 블루 스케일의 마, 마장기입니다! 그 기종은……!”
“마장기?”
페이샬 티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와 아스트리드 벨의 시선이 똘레오에게 향했다. 지금의 이 상황을 설명해보라는 내용이 담긴 시선이었다.
“윤호 님의 신뢰를 얻기 위한 블루 스케일의 선물입니다.”
똘레오는 평온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 담대함에는 절로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블루 스케일이 보낸 마장기는 한 대가 아니었다. 무려 여덟 기로 이루어진 두 개 편대였다. 인간들의 B등급 마장기인 엑스칼리버 두 기와 C등급 마장기로 장검과 마력 화살을 빠른 속도로 날릴 수 있는 장비를 무기로 사용하는 자넷 네 기, 마지막으로 활이 주 무기인 골드 이글 두 기였다.
“이건…….”
발코니를 통해 인간들의 마장기를 쳐다보던 호의 뒤로 똘레오의 말이 이어졌다.
“카틀라스 군항을 지키고 있는 스퀴드 수운다님이 보유한 모든 마장기 병력입니다. 만약 윤호 님께서 블루 스케일과 함께 하신다면 셰이라 클리퍼드 여왕님께서는 스퀴다 수운다님의 마장기 전력을 전부 킬리드로 전진 배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
“마장기의 오너들의 실력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부 블루 스케일의 에이스들입니다.”
여덟 기의 마장기를 보며 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마장기 전력이 추가된다면 킬리드를 노리는 엘프들을 상대로도 어느 정도는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똘레오의 말대로라면 엘 로즐린은 킬리드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커티삭은 안정화되지 않았고 대패를 하기는 했지만 볼 붸르니체스의 전력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도 아니었다.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겠군.”
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내려온 이 동아줄을 무시하기엔 조건이 너무나도 좋았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림드 산맥의 패자께서 함께하신다면 세이라 클리퍼드 여왕님과 스퀴드 수운다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실 겁니다. 예전부터 두 분 다 림드 산맥의 패자를 뵙고 싶어 하셨거든요.”
그 뒤로 호의가 가득 담긴 똘레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째서 스퀴드 수운다와 블루 스케일이 이렇게나 자신에게 큰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