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리그너스 대륙전기 167
잔상과 함께 데스 사이더가 물 흐르듯 하나의 움직임을 그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키마라이는 대검을 휘두른 움직임 그대로 상체와 하체가 나뉘어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한 것일까? 지면에 나 있는 복잡한 움직임을 보며 시진은 자신의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이 마장기 정말로 마음에 드는데? 오빠가 아주 좋은 선물을 줬어.”
마족의 A등급 마장기인 데스 사이더. 수인 영웅인 브로리의 말에 따르면 이 마장기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윤호의 목숨을 노렸던 거대한 뿔 소의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한시진은 지금 자신이 탑승하고 있는 데스 사이더가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 데스 사이더로 호의 목숨을 노렸던 볼 붸르니체스라는 이름의 마족을 꼭 발로 짓이길 생각이었다. 듣자하니 볼 붸르니체스라는 마족의 힘이 꽤 강력하다고 했는데, 엄청난 크기를 지닌 데스 사이더의 중압을 얼마나 버틸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상대는 보통이 아니다! 모두들 조심해!”
또 한 명의 목숨을 빼앗고 가볍게 사신의 낫을 휘두르는 데스 사이더를 경계하며 볼 붸르니체스의 휘하의 마장기사 우스가 외치듯 말했다.
오크 영웅이자 키마라이의 오너인 그는 많은 전쟁에 참여한 베테랑으로 현재 이 마장기 편대를 책임지고 있는 영웅이기도 했다.
그를 돕던 키마라이의 오너 말기스탄은 유령과도 같은 데스 사이더의 움직임에 순식간에 당해버렸다. 나름 어떻게든 데스 사이더의 공격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대장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email protected]#!”
“으악! 저 녀석이 나를 노린다!”
시끄럽게 들려오는 마법 통신을 뒤로 한 채 우스는 빠르게 지금의 상황을 파악했다. 순식간에 두 대의 마장기가 파괴되었다. 눈앞의 데스 사이더 때문이었다. 그 실력과 위압감에 우스는 자신의 볼에 난 상처부위가 지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래 전 전장에서 인간들의 왕 이레네 아르티아를 만나 가까스로 살아남으면서 얻은 이 상처가 욱신거릴 때면 언제나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곤 했었다.
“대장님!”
“우리의 상대가 아니야. 퇴각해야 되지 않겠어?!”
“제길! 제길! 우린 여기서 다 죽을 거야!”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데스 사이더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대로라면 원래의 작전 목표였던 엘프 군대의 기습은커녕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처음 예상과는 달리 엘프 왕국과 손을 잡은 소환자들의 마장기 조종술이 생각 외로 제법 매섭다는 이야기는 흘러가는 식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응?’
키마라이의 대검으로 데스 사이더를 경계하던 우스는 갑작스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찌릿한 살기가 자신의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젖고 있었다.
“잠깐! 분명 림드 산맥에서 참여했다는 마장기사는 한명이…….”
콰자자작!
요란한 소리가 등 뒤로부터 들려오자 우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주포의 파괴력만큼은 일품인 전차형 마장기 기즈린이 황금색 마장기의 공격에 종이처럼 구겨지고 있었다. 마치 맹금류가 먹이를 낚아채듯 웨어 타이거가 하늘에 떨어진 것이다.
“어, 어떻게?!”
수인의 웨어 타이거급 마장기가 이동 속도가 빠르고 고공 점프가 가능한 마장기라는 건 우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장기는 무거운 강철로 만들어진 병기. 하늘 위에서 높이 떨어진다는 것은 웬만한 마장기 조종술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본인이 큰 충격을 입거나 파괴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높이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 황금색의 웨어 타이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기즈린을 박살내고는 자신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자신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우스의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한 명도 상대하기 버거운 데 범상치 않은 실력으로 보이는 마장기가 또 한 기 등장한 것이다.
“이제야 나타났네요?”
“시끄럽다. 감히 나를 떼놓고 먼저 출진하다니. 그 용기가 가소롭구나.”
“이상하다. 전 분명히 엘프들에게 마족의 마장기 부대가 이곳으로 접근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서 출진했는데요? 당연히 브로리 님도 저와 동시에 보고를 받은 줄 알았는데?”
한시진의 빈정거림에 브로리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보아하니 여덟 기로 이루어진 마장기 부대를 상대해 먼저 두 기를 박살 낸 모양이었다.
“흐응.”
브로리의 시선이 땅에 남겨진 전투의 흔적으로 향했다. 지면에 나 있는 쓸린 자국만 보여도 그녀는 마장기들이 어떻게 움직였고, 공방을 나누었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소환자 주제에 제법이란 말이지.’
한시진이 마족의 마장기사들을 어떻게 제압했는지 그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그린 브로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원래 그녀의 성격이었다면 가소롭게 입을 놀리는 한시진을 반 쯤 패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비록 A등급 마장기 데스 사이더에 탑승했다지만 그녀의 실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발전하고 있었다. 그 발전은 타고난 천재였던 브로리마저 놀랄 정도였다.
지금은 몰라도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자신과도 좋은 상대가 될 수 있을 정도의 발전 속도였다.
“옆 조심해요.”
담담하다 못해 무심할 정도인 한시진의 경고성과 함께 브로리의 웨어 타이거가 살짝 몸을 틀었다. 날카로운 강철 창이 한 끗 차이로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허엇?!”
브로리의 마장기 골든 스테이트의 뒤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던 쿠즐뱅 한 기가 예상치 못한 회피 기동에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어설프구나.”
그리고 그대로 몸을 튼 골든 스테이트가 자신의 커다란 입을 벌려 그대로 쿠즐뱅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쿠쟌!”
“모두들 구해!”
그것을 시작으로 마족의 마장기들이 한꺼번에 골든 스테이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고, 한시진의 데스 사이더도 그 전투에 끼어들며 전투는 난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시진 혼자도 제대로 당해내지 못했던 마족의 마장기사들이었다.
그리고 브로리는 그런 한시진보다도 더욱 뛰어난 실력을 지닌 영웅이었다.
* * *
커티삭의 난동이라 불리는 사건을 시작으로 벌어진 마족과 엘프의 전쟁은 벌써 4개월이 넘은 지금에도 현재 진행형에 있었다. 양 측이 잃은 마장기만 해도 도합 백 여기가 넘어가고 있었고, 호가 디르시나에서 양성해 전장으로 보낸 병사들의 수만 해도 벌서 삼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시작된 마족과 엘프의 전쟁이 점점 격화되자 안전에 위협을 느낀 많은 상단들이 대륙의 북서부와 남동부를 지나기 위해 붉은 핏빛의 대지를 피해 림드 산맥을 통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상단과 그들이 보유한 진귀한 특산품들이 디르시나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상업 및 경제 도시로 발전시켜나가고 있던 디르시나의 특성화 개발과 큰 시너지가 발생하며 림드 산맥 정확히 말하면 디르시나와 그 주변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현재 호의 눈앞으로 떠올라 있었다.
<영지 정보(Status)>
디르시나(메트로폴리탄[S등급])-‘림드 산맥’
인구-712331
보유 리스-5825137622
보유 식량-83543423
병사–엘븐 템플러 18200(A), 정예 실리스 5500(D+), 켄타우로스 전사 5000(B), 스파크 마장병 10000(E)
내정 건물-대형 식량 저장고 258, 대형 주점 4, 대 시장 172, 초대형 시장 62, 세무서 5, 화폐공장 26, 대형 어장 270, 해양석 어장 80, 경매소 3, 특산품 거래소 21…….
군사 건물–병영 16, 대장간 27, 마법 연구소 1, 강력한 마나 보호막이 걸린 튼튼한 성벽 3, 굉장히 견고한 망루 50.
리스 수입-9126263 / 월
식량 수입-5272133 / 월
특산품–해양석
“이제 거의 끝났네.”
디르시나의 영지 정보는 전과는 많이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아직 반 이상의 공사가 남아 있었지만 특성화 개발은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엘프와 마족, 두 종족의 벌이는 전쟁의 여파로 급격하게 늘어난 피난민들이 림드산맥으로 유입되었고, 덩달아 상단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디르시나의 리스 수입량이 껑충 뛰었다.
그로 인해 호는 좀 더 영지 기술 개발에 힘을 쏟을 수 있었고, 이제 곧 있으면 엘프 보병의 S랭크 병과 아벨리우스의 양성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미 아벨리우스 양성에 필요한 뷰트의 성목과 세계수의 잎은 많은 수량을 구매해 놓은 상황이었다.
돈이 꽤나 들어가기는 했지만 전력 보강을 위해서라면 무조건적으로 구매해야 하는 물품이었다. 다행히 디아린 상단의 세력이 점점 넓어져 영향력이 커졌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아벨리우스 양성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특산품인 세계수의 잎은 구매조차 하지 못할 뻔했다.
그리고 호의 눈동자가 림드 산맥 주변의 지리가 그려진 지도에 고정되었다.
S랭크 병과인 아벨리우스 양성에는 뷰트의 성목과 세계수의 잎이라는 특산품이 꼭 필요했다.
그리고 뷰트의 성목이 특산품으로 생산되는 도시는 자신의 영지인 킬리드의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아멘드마와 코르다였다.
세계수의 잎이 생산되는 도시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현재 엘프 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 도시 토갈론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게임이고, 충분한 전력만 보유하고 있다면 마족과 엘프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틈을 노려 코르다와 아멘드마 그리고 토갈론의 요새까지 손에 넣는 건데…….”
그렇다면 굳이 엘프 상단에게 아쉬운 소리와 많은 리스를 지불하지 않아도 아벨리우스 양성에 필요한 특산품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옆 동네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림드 산맥은 그 덕분에 어부지리로 여러 것을 얻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마족과 엘프 중 그 승자가 정해질 테고 승자가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영토인 림드 산맥 또한 치열한 전쟁터로 변할지 몰랐다.
* * *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림드 산맥에 초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살인적이다라는 표현까지는 아니지만 뜨거운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인해 도시 전체는 굉장히 더운 상황이었다.
그 탓에 호 또한 집무실 문을 열어놓고 영지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미 두 다리는 시원한 얼음물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 같은 게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아이템들이 있긴 있었다. 다만, 기술 개발을 하지 못해 생산을 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일명 냉방 기계. 그 기술의 연구를 완료하게 되면 무더운 여름 영지민들의 불쾌지수를 낮추고 행복감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연구 기술 개발에 들어가고 싶지만 무리겠지.”
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개발해야 할 기술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헥헥거리는 동물의 거친 숨소리가 호의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로우덴.”
저런 소리를 낼 만 한 영웅은 견인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드나인은 해머스에 있었고, 부상에서 회복된 컹컹이는 한 달 전쯤 붉은 핏빛의 대지로 향하는 추가 파병 때 B등급 마장기인 키마라이의 오너로 디르시나를 떠났다.
“헥헥. 멍멍. 정말 더운 날씨로군요, 영주님.”
땀에 흠뻑 젖은 털과 함께 꿀떡처럼 늘어지는 로우덴의 모습에 호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식당에 가면 아마 시현이가 시원한 것을 준비해 놨을 거야.”
“오오!”
호의 말에 로우덴이 함성을 질렀다.
식당의 시원한 것. 그 정체는 바로 팥빙수였다. 요리가 가능한 동료가 있다는 것이 이럴 때는 정말로 큰 도움이 되곤 했다. 시현이가 살던 곳에도 팥빙수는 존재했는지 이 무더운 여름 과일과 얼음 그리고 삶은 팥을 떡하니 얹은 팥빙수는 현재 디르시나 영주성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멍멍. 그나저나 호 님. 디아린 양이 도착했습니다. 마력의 양피지를 구입하시는 데 성공하신 모양입니다.”
“아, 다행이군.”
마력의 양피지는 마족의 B랭크 마법 병과인 빗치 위치를 양성하는 데 필요한 특산품이었다.
당연히 림드 산맥에서는 구할 수 없는 특산품인지라 호는 디아린 상단을 통해 특산품들을 구매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