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리그너스 대륙전기 166
“칠제가 마장기라는 병기로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유지한다면 인피니티 나인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병사를 양성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합니다.”
“칠제와 인피니티 나인이라.”
칠제는 각 종족의 수장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공략본이나 게임 내에서는 본적도 그리고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였지만 이 세계의 존재들은 마왕 쉐르난비체나 골든 크로우의 지배자 이레네 아르티아, 엘프 왕국의 여왕 유스타시아등 일곱 종족의 지배자들을 가리켜 칠제라고 부르곤 했다.
하지만 인피니티 나인은 처음 듣는 존재들이었다.
“어쨌든 그들만의 병사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에어리스는 얼굴 가득 심각한 표정을 짓는 호를 향해 미소를 살짝 지었다. 이 대륙의 존재들에게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 일명 소환자라 불리는 이 남자는 루베릭 대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썬더 퓨리, 익스큐션 스워드, 헬리오스 아쳐등 적들에게 무시무시한 공포를 선사하는 존재들이죠. 그들의 힘을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가를 정도로 대단하답니다.”
“으으음.”
호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침음성이 절로 나왔다. 에어리스의 말을 들어보면 인피니티 나인이라는 존재의 전략병기는 마장기와 비슷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신경을 써야 할까?’
느낌 탓일 수도 있겠지만 호는 인피니티 나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들에 대해 안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에어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벨리우스 아니, 최종적으로 진화된 엘프 보병인 실버 문은 그런 인피니티 나인의 전략 병기 중 하나 천둥의 분노, 썬더 퓨리를 소환하는 데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아벨리우스가 그 발판이 되는 셈이겠네요.”
“아니,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잠시 후, 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 영지는 풍전등화에 처해 있습니다. 마족과는 이미 틀어진 상황이고 수인 왕국도 호시탐탐 림드 산맥을 노리고 있지요. 게다가 엘프도 확실하게 아군으로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
“그렇기 때문에 영지의 방어를 위해서는 고위 랭크 병과의 양성이 필요했고, 가장 빠르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고위 랭크 병사가 아벨리우스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영주님께서는 실버 문을 생각하신 게 아니셨군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호는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실버문은 쉽게 양성할 수 있는 병사들이 아닙니다.”
실버문. 오랜만에 듣는 추억 속의 병사들을 떠올리며 호는 에어리스를 바라보았다.
SSS랭크의 엘프 보병을 가리키는 그들은 리그너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보병 병과의 정점이자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전장의 지배자들이었다.
열 배의 전력 차가 아니면 무너지지 않으며, 마장기 편대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그들은 진정한 전장의 방패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엄청난 양성비용과 특산품 그리고 양성하기까지에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에 불과했지만, 일단 보유를 하고 하면 그만큼 든든한 병사들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SSS랭크의 병사들보다는 마장기의 개발과 제작에 신경을 쏟곤 했다. 그게 시간적으로도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호 제국의 황제로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정복했을 때는…….’
인력과 자원이 남아돌아 심심해서 양성한 드워프의 SSS랭크의 공성병. 누누를 몇 부대 양성했던 게 전부였다.
“그렇군요. 뭐, 영주님의 의도가 그렇던 그렇지 않던. 전 영주님과 함께하는 존재.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해드리겠어요.”
이 말과 함께 에어리스는 호에게 가까이 다가와 호를 올려다보았다.
“썬더 퓨리. 3 파신 크탈나스의 분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죠. 그리고 이 썬더 퓨리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실버문과 원소와 마나의 모든 이치를 알고 있다는 마족의 마법사 브뤼헤아 비쉬가 필요하다고 해요.”
“휘유.”
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 둘 다 SSS랭크의 병과들이었다. 정말로 썬더 퓨리라는 존재를 소환할 생각이라면 진짜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할 것 같았다. 차라리 마장기를 생산하는 데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대수롭지 않게 호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띵동.
-루베릭 대륙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제 3 파신 크탈나스가 당신의 존재에 대해 인식했습니다.
-썬더 퓨리의 양성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썬더 퓨리의 양성 조건을 만족하게 되면 이와 관련된 연구 목록이 개방됩니다.
⋮
“어……어어?!”
눈앞이 번쩍이며 연속적으로 메시지들이 나타나자 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런 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괜찮으세요. 영주님?”
“아, 네. 괜찮습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어리스를 향해 호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웠다.
“머리 아프네.”
에어리스가 나가고 혼자가 된 집무실에서 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볼 붸르니체스, 엘프 왕국의 장로중 하나인 엘 로즐린 그리고 호시탐탐 에스트라다를 노리는 수인까지. 신경을 쓸 게 너무나 많았다. 그 와중에 루베릭 대륙, 썬더 퓨리와 같이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정보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게다가…….
“제 3 파신 크탈나스? 이건 대체 뭐야?”
호는 자신에게 나타난 메시지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누군가가 나를 인식하다니? 이상한 느낌이었다.
“여신 라헬과 비슷한 존재인가?”
파신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을 보니 아마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새로운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읽어보던 호는 문득 정보 창이 반짝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정보 창을 열었다.
“어라?”
정보 창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썬더 퓨리의 정보가 갱신되어 있었다.
[썬더 퓨리(EX)-제3파신, 크탈나스의 분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입니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대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이 마검사는 폭풍처럼 전장을 휩쓰는 존재로 그 위력은 A등급의 마장기를 뛰어넘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뭐야 이게……?”
말을 하다 말고 호는 심호흡을 했다. 상태 창을 바라보는 호의 눈동자는 EX 라는 등급에 멈춰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리그너스 대륙에 EX 라는 등급이 있었어? 아니, 마장기는 A등급이 그리고 병사들은 SSS 가 최고 랭크일텐데?”
혼잣말을 꺼내면서 호는 목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썬더 퓨리. EX 라는 무시무시한 랭크를 지닌 병사들의 위력이 얼마나 강할지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물며 루베릭 대륙의 인피니티 나인들은 저런 병사들을 양성할 수 있다고 했다.
A등급의 마장기를 뛰어넘는다는 설명이 나온 병사를 말이다.
하지만 EX 라는 랭크 때문일까? 썬더 퓨리의 양성 방법은 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SSS랭크의 엘프 보병인 실버 문과 SSS랭크의 마족 마법사인 브뤼헤아 비쉬 만 명을 파신 크탈나스의 제물로 바쳐야만 한다고 적혀 있었다.
“하아?”
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보는 분명 이용할 수 있는 정보였다.
이미 썬더 퓨리의 양성이 가능해졌다는 메시지도 있었다. 하지만 파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제물이라니? 정보창에 따르면 썬더 퓨리를 한 부대를 얻기 위해서는 이만이나 되는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나와 있었다.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호는 새롭게 갱신된 상태창과 메시지를 하나하나씩 닫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에서 썬더 퓨리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멍청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A등급의 마장기와 관련된 이벤트를 진행하는 게 좀 더 현실적일 것 같았다.
* * *
번쩍임과 함께 그그극 거리는, 강철이 잘려 미끄러지는 소리가 주위를 찌르기 시작했다.
“쿨럭?!”
“르살리카!”
코 옆의 점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서큐버스의 입에서 핏덩이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고통과 함께 멀리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그녀의 귀로 메아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족의 C등급 마장기 쿠즐뱅이 반으로 잘려 파괴되는 것과 동시에 르살리카라는 이름의 서큐버스도 실 끊어진 인형처럼 철푸덕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몸이 나눠진 채 피범벅이 되어 있는 서큐버스의 모습은 살아 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괴, 괴물!”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온 거야?! 게다가!”
한 마족 영웅의 공포에 찬 외침을 시작으로 마족 마장기사들 사이로 혼란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르살리카는 이름의 서큐버스가 오너로 있던 쿠즐뱅을 단숨에 잘라 버린 전장의 사신.
마족의 A등급 마장기인 데스 사이더가 자신들을 향해 사신의 낫을 들이밀고 있었다.
슈가각! 카각!
응축된 마나로 이루어진 사신의 낫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족 마장기들의 관절과 약점 부위를 노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사정없이 사신의 낫을 휘둘러 마장기사들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다.
카카캉!
등급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마장기 한 기의 공격을 무려 네 기의 마장기가 모여 막아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키마라이의 오너이자 미노타우르스인 말기스탄은 다른 마장기사와 함께 힘겹게 데스 사이더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욕설을 내뱉었다. 마족의 심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A등급 마장기 데스 사이더가 소환자의 손에 탈취 당했다는 사실은 볼 붸르니체스 휘하의 마장기사들에겐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었다.
분명 A등급 마장기의 탈취는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볼 붸르니체스 휘하의 마장기사들은 다들 데스 사이더가 탈취 당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데스 사이더를 탈취한 인물이 바로 소환자였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3년 전에야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약한 존재들이었고, 자신들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마장기와 함께했고 전장에 나섰던 존재였다. 그만큼 자신들과 소환자의 마장기 조종술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을 거라고 여겼었다.
오히려 소환자가 A등급 마장기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조롱 섞인 감탄과 함께 박수를 보내는 마장기사들도 있었다.
‘그런데……!’
데스 사이더를 상대하는 미노타우르스, 말기스탄의 커다란 눈동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붉어지고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위기감에 실핏줄이 계속해서 터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공격하는 데스 사이더의 주인은 분명 소환자였다.
하지만 지금 말기스탄이 느끼는 압박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데스 사이더의 오너가 보여주는 실력은 탈취당한 데스 사이더의 원래 주인이었던 상급 마족 볼 붸르니체스의 실력 이상이었다.
“분명 상대는 소환자일 텐데?! 어째서 이렇게 데스 사이더를 잘 다룰 수 있는 것이냐?!”
유령처럼 눈앞에서 흔들리듯 움직이는 데스 사이더를 향해 말기스탄이 자신의 대검을 크게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데스 사이더에 충격을 주기 위해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에 치중한 휘두름이었다.
어느 정도 믿는 구석도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신이 조종하고 있는 키마라이를 포함해 B등급과 C등급 마장기를 합쳐 도합 일곱 기의 마장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무리 눈앞의 데스 사이더가 사신 같다 하더라도 쉽사리 상대할 수 없는 수였다. 만마의 존경과 우러름을 받는 마왕 쉐르난비체가 나타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부우웅!
“멍청하네.”
그리고 매서운 풍압과 함께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대검을 보며 한시진은 비웃음과 함께 데스 사이더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