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리그너스 대륙전기 165
‘최대한 휘하 영웅들의 능력을 끌어 올린다.’
영웅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을 구하는 일에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 물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영토 내에 위치한 던전 혹은 특산품으로 영웅들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을 획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륙 전체를 영토로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 아이템을 구하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림드 산맥은 대륙 전체로 따지자면 발톱의 때조차도 되지 않는 크기를 지닌 영토에 불과했다.
‘이건 미래를 위한 투자야.’
승급 아이템은 영웅들의 등급이 낮을 경우 껌 값이나 다름없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영웅들의 등급이 점점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가격이 올라갔다. 아이템을 구하는 난이도와 희귀성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단을 통해 모든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이지만 여유자금도 있었고, 디아린 상단도 조금씩 세력과 점유율을 넓혀 나가고 있는 상황인터라 승급 아이템을 얻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래도 갑작스럽게 240만 리스라는 거금이 빠져나가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정예 실리스 양성과 영지 북쪽의 화폐 공장 건설은 중단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큰 일이 벌어졌을 경우 영지의 재정에 구멍 날 수 있어요.”
“……어쩔 수 없지.”
자신을 바라보는 에메랄드 색의 눈동자에 호는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세부 능력의 한계가 고작 100 밖에 되지 않은 C등급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지만 소환자라는 이유 때문인지 아스트리드 벨은 이 세계의 C등급 영웅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번뜩이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아마 이 세계가 아닌 그녀가 있던 세계에서의 생각과 능력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호가 대도시나 다름없는 디르시나의 재정을 그녀에게 맡기는 이유였다.
“그래도 당신이 말한 대로 물품을 구매해 영웅들을 승급 시킬 수 있다면 영지에 도움은 되겠네요.”
호가 디아린을 통해 구매를 요청한 아이템은 현재 디르시나에 주둔하고 있는 인간 영웅 페이샬 티슈와 센스 그리고 드워프 영웅 레온 바티스타를 승급시키는 데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이 세 영웅의 등급은 각각 C, D, C등급에 불과했다.
“……읔.”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스트리드 벨이 탄성과 함께 얼굴을 찡그렸다. 현재 그녀는 프로핏 이라는 C등급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호와 한시진은 A등급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 * *
‘주사위는 던져 졌다.’
이는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면서 했던 말이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되면 로마의 국법을 어기는 것이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내전으로 치닫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의미할 때 이 어구를 인용했다. 그리고 호의 상황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다. 커티삭을 파괴하고 데스 사이더를 탈취했을 때부터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황이었다. 볼 붸르니체스와의 관계는 안 봐도 최악. 천족과 마족의 경우처럼 만나는 순간 대화가 아닌 마력포가 날아갈 터였다.
그로 인해 호는 자연스럽게 마족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실제로도 딱히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정말로 혈혈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군사력을 높여야 한다.”
마장기의 생산은 불가능했다.
디르시나의 특성화 개발이 끝나더라도 마장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설령 마장기 생산 기술을 보유한다 하더라도 생산을 하는데 필요한 돈과 자원을 마련하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호는 마장기가 아닌 일반 병사들의 질과 양을 높이는 게 당장의 전력을 끌어 올리는 데 있어 훨씬 유용하다고 여겼다. 물론, 한시진과 브로리 같은 뛰어난 마장기사와 적은 수이긴 해도 A, B등급의 마장기가 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아벨리우스의 연구요? 냥?”
“그래. 그와 함께 마족의 B랭크 마법 계열 병과인 빗치 윗치의 연구도 진행해야겠어.”
“허, 허허…….”
호의 말에 연구실에서 갑작스럽게 불려온 리아 캬베데와 존스 홉킨스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골든 크로우와 협약중인 마장기 기술 개발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현재 180 여 개의 관련 기술 중 70 여개의 개발을 끝내기는 했는데. 그리고 수인 기병대도 있는데…….”
“수인 기병대와 관련된 연구들은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하지만 골든 크로우가 보내주는 연구 관련 서류는 필히 보관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영주님. 아, 아벨리우스라면 S랭크의 엘프 보병이 아닌가요?”
마침 집무실에 볼일이 있어 방문했던 하이 엘프 에어리스가 세 남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듬뿍 담겨 있었다.
“맞습니다. 결의의 수호 방패라 불리는 커다란 카이트 실드 든 철벽의 전사들이지요.”
“아벨리우스는 엘프 왕국의 영웅들 중에서도 장로급은 되어야 양성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디르시나에서는 이미 엘븐 템플러가 양성되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호의 말대로 디르시나에서는 엘븐 템플러들이 매 달 양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벨리우스는 다르다는 게 에어리스의 생각이었다. S랭크와 A랭크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었다. 특히나 아벨리우스를 양성하는 데는 뷰트의 성목이라는 특산품이 무조건 필요했다.
“캬아앙. 훗사르도 있는데 내가 왜 엘프 보병 관련 연구를…….”
“용맹만큼은 둘째라면 서러워 할 드워프 보병, 정예 드워프 쿠스타스도 있건만.”
어느새 리아 캬베데와 존스 홉킨스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집무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호의 말은 명령과도 같았다.
“S랭크인 아벨리우스를 양성할 수 있는 엘프 왕국의 영주는 적어도 장로급이거나 그에 준하는 세력을 보유한 센티널 뿐이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영주님께서는 어떻게 엘프 왕국의 병사를 양성하시려는 거죠? 엘프들이 허락하지 않을텐데요?”
“센티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엘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게다가 전 소환자입니다. 그리고 엘프들이 허락하지 않는다니요? 디르시나에는 수많은 엘프 영지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어리스는 이런 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이 세계의 영웅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떠올렸다. 서로의 종족은 융화될 수 없으며 오직 자신들이 속한 종족의 병사들로만 군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대륙의 일곱 종족이 타 종족의 영토를 점령하게 되면 그 지역에 원래 살고 있던 종족들을 전부 추방하거나 노예로 삼다시피 하는 만큼 서로가 서로를 도와줄 리가 없었다.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시스템이 그러하긴 했지만…….’
하지만 소환자는 이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애당초 대륙을 지배하는 일곱 종족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호가 아벨리우스와 빗치 윗치의 개발 명령을 내린 것은 전장에서 보여주는 이 둘의 시너지가 상당히 좋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마족의 마법 병과는 대륙에서도 가장 뛰어나지.’
그러나 마법병과를 개발하고 양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했다. 유지비용도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디르시나의 특성화 개발이 끝나고 리스 수입이 크게 상승하면 그 단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마장기 제작 기술 확보에 전력을 쏟고 있던 호가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 주변 상황이 꽤나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엘 로즐린과 볼 붸르니체스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호 또한 엘프 쪽에 서서 한 몫 거들고 있었다.
하지만 볼 붸르니체스가 승리를 거두던 아니면 엘 로즐린이 승리를 거두던 림드 산맥이 안전해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덕분에 엘프 왕국을 방패로 삼아 빠르게 마장기 제작 기술을 손에 넣고 전력을 키우려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변해버릴 줄은 몰랐지…….”
“네? 뭐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어요.”
갑작스럽게 에어리스가 자신을 쳐다보자 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한시진이나 아스트리드 벨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호가 아벨리우스를 양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꽤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을 거듭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에어리스를 뒤로 한 채 호는 자신의 업무에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집무실에서 노예처럼 일을 하던 벨이 오늘은 영지 특성화 공사에 나간 터라 벌써부터 서류가 굉장히 많이 쌓여 있었다.
그렇게 호가 조금씩 일꾼 모드로 변해 영지의 업무에 집중을 하려던 찰나였다.
“영주님.”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에어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벨리우스와 빗치 윗치. 혹시 영주님께서는 천둥의 분노를 소환하실 생각이신가요?”
“……천둥의 분노?”
책상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호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집중이 깨진 탓에 짜증이 조금 나기는 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친절해야 한다는 남자의 본능 탓이었다.
게다가 뚱딴지같은 에어리스의 말이 살짝이나마 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도 있었다. 폭풍의 분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아이템 중 하나의 이름 같았다. 왠지 검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네. 인피니티 나인들의 전략 병기인 썬더 퓨리요. 영주님께서는 아벨리우스를 양성하려는 이유가 이 썬더 퓨리를 소환하실 생각이신가 싶어서요.”
“……인피니티 나인이요?”
호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어리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호의 목소리에 담긴 의아함을 눈치 챈 에어리스가 탄성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 영주님께서도 인피니티 나인에 대해서는 모르시겠군요. 인피니티 나인. 이 대륙에 칠제라 불리는 일곱 종족의 수장이 있다면 제가 살았던 루베릭 대륙에는 인피니티 나인이라는 신의 힘을 받은 아홉 명의 지배자가 있습니다. 이 대륙의 존재들에게는 ‘파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죠.”
그리고 에어리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호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호는 에어리스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 세계는 KOREA사의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흡사한 아니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 이상한 세계였다. 대륙을 지배하는 일곱 종족이 존재했고, 마장기가 있었으며 각 종족의 특성에 어울리는 병과 그리고 게임 속에서 많은 유저들을 팬으로 거느렸던 영웅들도 존재했다.
‘게다가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도 먹히잖아?’
그렇기 때문에 호는 이 세계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세계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방금 전 에어리스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루베릭 대륙.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종족인 하이엘프 에어리스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는 리그너스 대륙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루베릭이라 불리는 대륙에서 왔다고 했다. 그 크기는 리그너스 대륙과 엇비슷한 정도이며 문명 수준도 큰 차이가 없다고 말을 이었다.
에어리스가 루베릭 대륙에 대해 말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루베릭 대륙에 대해 들었을 때 호는 무의식적으로 루베릭 대륙의 정보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지금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리그너스 대륙 내에서의 생존이었고, 그 후에는 여신 라헬의 꿍꿍이를 막아내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 설정집에도 루베릭 대륙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호는 그 대륙과 지금 이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거라고 여겼었다. 자신의 예상 범주 안에 없는 이레귤러와 같은 정보로 인해 이 세계에서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안일한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