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리그너스 대륙전기 164
리그너스 대륙은 인간을 시작으로 천족, 마족, 정령, 드워프, 엘프 그리고 수인까지, 이 일곱 종족이 각자의 영토를 가지고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종족들은 자연스럽게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거나 종족의 이익을 위해 혹은 개인의 영달 때문에 서로 간에 트러블을 일으키곤 했다.
이 탓에 종족끼리 혹은 각 종족에 소속된 인물들끼리 서로 은원을 맺고 공격하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서는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과거의 악연이 인연으로 인연이 악연으로 변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다.
이렇게 많은 은원관계를 맺고 있는 리그너스 대륙의 종족들이지만 이 중에서도 유독 사이가 좋지 않은 종족이 몇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종족들이 바로 천족과 마족이었다. 서로의 존재의의가 상대 종족의 멸절이라고 떠들어대는 만큼 천족과 마족은 만났다 하면 대화가 아닌 마장기부터 들이대곤 했다.
그리고 이보다는 아니지만 서로간의 관계가 나쁜 다른 종족을 말하자면 드워프와 수인, 인간과 천족 그리고 현재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엘프와 마족이 있었다.
“그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지.”
호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그러고는 집무실의 원형 탁자 위에 놓인 림드 산맥 및 주위 영토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원흉이 되었던 마족의 아멘드마 공격으로 인해 시작된 엘프 장로 엘 로즐린과 상급 마족 볼 붸르니체스, 엘프 왕국과 마족을 대표하는 이 두 영웅의 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본격화되어 가고 있었다.
전쟁 초기 전면전은 피하려는 것처럼 한 발짝 물러나는 움직임을 보이던 볼 붸르니체스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갑자기 마족의 군대가 북진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불씨를 활활 태워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그리고 이는 림드 산맥에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단 엘 로즐린이 볼 붸르니체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엘프 왕국이라는 방패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림드 산맥으로 향할 수 있는 관문인 킬리드가 볼 붸르니체스에게 노출될 터였다.
“분명 공격해 들어오겠지.”
늘어진 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자신에게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볼 붸르니체스가 자신의 영토인 림드 산맥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림드 산맥을 점령하려 들 터였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런 볼 붸르니체스의 분노를 막아낼 전력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어떻게든 엘프 왕국의 군대가 볼 붸르니체스를 막아줘야 했다. 그로 인해 호 역시 한시진과 브로리 발란스까지 출진시켰고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엘프들이 잘 버텨주고 있지 않나요?”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호를 향해 아스트리드 벨이 물었다. 디르시나의 행정을 책임지는데다가 호와 가장 가까이에 있기에 그녀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벨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대로 현재 아메드마를 중심으로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엘프와 마족의 전쟁 상황은 백중세였다. 물론 이대로 계속해서 전쟁이 유지되다가 마무리가 되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결과이긴 했다.
“문제는 내 예상보다 전쟁이 커진다는 거지.”
지도를 바라보던 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족의 도발에 단단히 열이 받았는지 엘 로즐린은 자신들의 영토를 공격하는 마족을 격퇴하는 것과 동시에 대륙의 남서부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인 커티삭을 얻겠다고 선언했다.
그와 함께 엘프 왕국이 자랑하는 광역 버퍼형 A등급 마장기 아보르 비테가 전쟁터에 투입되었다. 자체적인 능력은 B등급 마장기와 엇비슷한 수준이지만 넓은 범위의 아군과 아군 마장기의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아보르 비테는 엘프 왕국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줄 수 있는 특별한 마장기였다.
당연히 상급 마족인 볼 붸르니체스 또한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족의 움직임을 보면 그들은 림드 산맥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토갈론의 요새까지 진격, 대륙의 북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서로의 자존심 싸움인지 혹은 정말로 실리를 위해서 벌이는 싸움인지를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워낙 판이 커져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커지면 오히려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양 측 다 엄청난 피해를 입는 거잖아요.”
“그게 그렇지가 않아.”
벨의 말대로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 쪽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물러날 게 분명했다. 그런 후퇴의 마지노선이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는 이번 전쟁으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만약 마족이 승리를 거두게 되면 분명 붉은 핏빛의 대지는 마족이 차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볼 붸르니체스와의 정면 대결을 펼쳐야만 했다.
“마족이 승리를 거두게 되면 사실상 끝이야. 그들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거나 우리들이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야 될 거야. 양쪽 다 끔찍한 결과가 되겠지.”
어떻게든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경험을 살리고 한시진과 브로리, 로우덴등 유능 동료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볼 붸르니체스의 공격에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막아내는 건 현재의 전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 엘프 왕국이 이겨야겠네요.”
“그것도 그리 좋은 결과는 아니야. 아니, 아닌 것 같아.”
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에 아스트리드 벨이 의아한 듯 물었다.
“어째서요? 엘프들과는 굉장히 사이가 좋은 게 아니었어요?”
“뭐, 물론 사이가 좋기는 해. 완전히 나쁘지는 않지.”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코르다의 영주 엘 샤난과는 충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엘 샤난을 제외한 다른 엘프들과의 관계가 불확실하다는 점이었다.
“현재 엘프 왕국의 총사령관은 엘 샤난도 군단장인 엘 아스린도 아니야. 엘 로즐린이라는 인물로 엘프 왕국의 여섯 장로중 하나지. 하지만 그녀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직 확실히 짐작 가는 게 없어.”
“당연히 좋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 큰 뿔 소 녀석이 당신을 싫어했던 이유를 반대로 되짚어보면…….”
림드 산맥의 주력 부대는 엘프의 A랭크 보병인 엘븐 템플러였다. 거기에다가 수인의 공격으로 인해 위험에 빠진 코르다를 도와주기 위해 지원군을 파병한 전력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 아르윈을 비롯해 엘 카닐슨, 엘 라디아, 엘 스밸리와 같이 여러 엘프 영웅들이 호와 함께하고 있었고, 하이 엘프인 에어리스까지 디르시나에 몸을 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림드 산맥은 친 엘프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하지만 호는 불과 한 달 전쯤, 드워프의 족장 쿠퍼쏘우와 엘 로즐린에게 볼 붸르니체스의 야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었다.
하지만 쿠퍼쏘우라는 드워프 족장이 자신에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을 동안 엘 로즐린에게서는 아무런 답신도 받지 못했었다.
“……느낌이 좋지 않네요.”
“그렇지?”
그리고 호에게는 이런 사정을 들은 아스트리드 벨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빨에 손톱의 끝자락을 몇 번 긁더니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디르시나의 엘프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있어요.”
“하지만 디르시나에 거주하고 있는 엘프들이 엘프 왕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야. 볼 붸르니체스의 선택이 모든 마족을 대표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 오히려 엘프 왕국의 엘프들은 디르시나의 엘프들을 남남처럼 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말을 하던 호의 시선이 지도로 향했다. 조그마한 말판들이 빼곡하게 올라가 있는 붉은 핏빛의 대지에와는 달리 그보다도 두 배는 더 큰 림드 산맥의 영토에는 고작 대 여섯 기의 말판만이 올려져 있었다.
“삼 년 전, 당신과 나 그리고 시진이와 시현이가 이 세계로 떨어졌죠. 그리고 마족의 소환자로 선택되었어요.”
“선택되었기 보다는.”
“잘못 말했네요. 정정해야겠어요. 선택이 아니라 살아남았죠.”
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들은 선택의 신전에서 마왕 쉐르난비체의 손에 살아남았다. 만약 자신이 쉐르난비체의 성격과 그녀의 행동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분명 그때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사실 그때 살아남긴 했어도 난 우리가 곧 비참하게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도마뱀들에게 잡혀 먹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수백 번도 넘게 떠올렸죠.”
“리자드맨 말이로군.”
자신들을 실은 수레를 커티삭까지 이끌었던 몬스터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살아가고 있어요. 게다가 언제 죽을지 몰랐던 삼 년 전보다도 훨씬 상황이 좋아졌죠.”
“그런데 지금의 이 상황이 좋은 상황일까?”
호는 벨을 바라보았다. 몇 개의 영토를 휘하에 두고 있는 대영주가 림드 산맥을 노리고 있는 판국이었다. 거기에 엘 로즐린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벨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당신의 명령에 따라 시진이와 브로리가 엘프를 돕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예요. 예전 같았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죠.”
“…….”
“그거 알아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트리드 벨의 눈동자가 호와 마주쳤다. 매일 보는 익숙한 눈동자가 오늘따라 다르게 보였다.
“당신은 이제까지 잘해왔고,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었어요. 어떤 일이 일어나던 지금부터 준비를 하면 돼요.”
“음.”
호는 어금니를 살짝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의 위기 또한 시간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었다. 시간만 있으면 말이다. 그리고 벨이 망설임 끝에 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 세계에서 제가 아니 우리들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한시진처럼 나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돕겠어요.”
아스트리드 벨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호를 보며 말했다.
* * *
“……꽤 멀리 돌아야 되겠는데요?”
디르시나에 본점을 두고 있는 상단, 디아린 상단의 주인인 디아린이 지도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해양석과 마정석을 가지고 대륙의 북동부로 쭉 상단행을 다녔던 그녀는 바로 어제 디르시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릴 거 같지?”
“아마 한 달은 걸릴……. 후우. 적어도 25 일은 필요해요.”
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디아린이 자신의 양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이하로 시간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해요. 딱히 이동수단이 없는 지금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그 정도는 걸릴 거라고요.”
“가격은요?”
곧바로 이어진 질문의 주인공은 호가 아닌 여성의 목소리였다. 디르시나의 재정을 맡고 있는 벨이었다. 퀭한 눈동자와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그녀가 최근 영지일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를 톡톡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디아린이 잠시 계산을 하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적어도 240만 리스는 지불해야 될 것 같은데요?”
“240만 리스…….”
아스트리드 벨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최대한 깎는다고 해도 235 만 리스는 필요할 거예요. 호 님께서 부탁하신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디아린의 진지한 표정에 벨은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갑작스럽게 나갈 커다란 지출에 대한 충격을 어떻게 메꿔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해졌다. 그러다가 일의 원흉이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흘겼다.
“하아. 갑자기 왜 그런 이상한 물건들을 주문하는 거예요?”
“우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물건들이야.”
아스트리드 벨의 투덜거림에 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디아린 상단을 통해 어떤 물품을 구매 했던 일은 별로 없었다. 특히나 몇 백만 리스의 고가품은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까지는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이런 구매가 조금씩 잦아질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