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리그너스 대륙전기 162
“큭, 큭큭! 크하하하! 이거 커티삭에 온 보람이 있는데?!”
다른 마장기도 아니고 무려 A등급 마장기를 손에 넣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쁨에 호의 얼굴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일그러졌다.
A등급 마장기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엄청난 빅 엿을 먹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호는 이걸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마, 마장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췩! 도망! 도망치자!”
“건물이 무너진다!”
마장기라 불리는 강철 거인의 마력포가 커티삭의 건물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응축된 마나로 이루어진 날을 지니고 있는 마장기의 무기들이 휘둘러 질 때마다 돌 혹은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종이처럼 잘려 나갔다.
커티삭에 주둔하고 있는 고 랭크의 병사들이 그런 마장기를 막기 위해 나섰지만, 감당이 불가능했다. 난동을 부리는 마장기가 한 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거침없는 파괴를 일삼으며 난동을 부리는 마장기들이 등급이 떨어지는 마장기도 아니었다.
마족의 심장이라는 별명과 함께 타 종족들에게는 공포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데스 사이더가 그 중심에 있었다.
“데, 데스 사이더?! 저건 내 마장기가 아닌가!”
다급한 부하의 보고에 잠을 자다가 발코니로 뛰어 나온 볼 붸르니체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큰 눈을 끔벅였다. 좀 전까지 밀려왔던 잠은 싹 달아나고 없었다.
고개를 숙여 커다란 입술이 떨릴 정도로 머리를 몇 번 세차게 흔든 볼 붸르니체스는 다시 한 번 정면을 바라보았다.
쿠르르릉!
마족의 A등급 마장기. 그리고 자신의 애기로 추정되는 데스 사이더가 휘두른 낫에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아!!”
볼 붸르니체스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 부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장기 보관고가 점령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른 채 볼 붸르니체스는 부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보관고를 탈취한 인물이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라고 합니다.”
“뭣이?!”
거친 김이 볼 붸르니체스의 커다란 콧구멍에서 흘러 나왔다. 김이 날 정도로 붉어진 얼굴은 그가 얼마나 크게 분노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소환자 녀석이! 역시 배신을 할 생각이었어! 나자르 T 스테르! 당장 병사와 마장기를 동원해서 저 녀석들을 막아라! 절대 커티삭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주군.”
빠르게 명령을 내린 볼 붸르니체스가 크게 발을 한 번 굴렀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돌로 만들어진 발코니에 자잘한 실금이 생겨났다.
“쿠드릭 너는 비행 병단을 모조리 동원해 나자르가 준비될 때 까지 마장기의 발을 붙잡아라! 희생은 얼마가 나도 상관없다! 그리고 너! 내 갑옷을 준비해!”
그렇게 쉬지 않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볼 붸르니체스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세 기의 마장기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 * *
“너희들의 세계에는 마장기가 없다고 들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데스 사이더를 능숙하게 다루는구나, 호. 마치 그대가 데스 사이더의 원래 주인이라고 생각될 정도야.”
“데스 사이더의 조종법은 키마라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거든.”
“그렇다고 해도 데스 사이더는 마족의 A등급 마장기. 평범한 마장기사가 다룰 수 있는 마장기가 아니다. 흐음. 내가 생각하기에 그대는 마장기 조종술에 대한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하다.”
브로리의 감탄에 호는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그래도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몇 번 조종해 본 적이 있는 마장기였기에 움직일 수 있었다.
그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A등급 마장기를 조종하는 데 필요한 조건 중 하나인 싱크로율도 통과 할 수 있었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브로리의 칭찬에 기분이 좋기는 했다. 하지만 호는 곧 디르시나에 있는 자신의 애인을 떠올렸다. 브로리의 말대로 자신이 재능이 있다면 시진은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A등급 마장기에 탑승한 한시진의 모습은 적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일 터였다. 실제로도 그녀는 대한제국의 화랑기사단장으로 적들에게 검은 악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다녔다고 했다.
“나중에 시진이도 뉴타입이 되는 게 아닌지 몰라.”
그런 헛생각을 하며 전장의 긴장감을 잠시나마 푼 호는 공중에서 데스 사이더를 향해 달려드는 칠흑의 용기사를 배구 선수가 스파이크를 하듯 손으로 훅 내리치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처음과는 달리 커티삭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도 지금의 심각한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몇 겹으로 퇴로를 막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더이상 시간이 끌리면 곤란해. 빨리 퇴각해야겠어.’
무려 삼십 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는데다가 보관고에는 호와 브로리가 부시지 못한 마장기들도 더러 남아 있었다. 지금이야 병사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까닭에 이렇게나 난동을 부릴 수 있는 거지 이들이 제대로 진형을 갖춘다면 아무리 마장기가 강력한 병기라고 해도 버텨낼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적들도 그런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모양인지 마장기에게 별다른 피해를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자신들을 상대할 마장기 편대가 도착할 때까지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브로리! 북쪽으로 퇴각로를 만들자!”
“알았다!”
호의 말에 황금색 웨어 타이거가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커어엉!
우렁찬 포효와 함께 하늘 위로 뛰어오른 웨어 타이거가 양 발을 이용해 공중을 나는 칠흑의 용기사를 낚아채 그대로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뒤로 붉은색의 키마라이가 어설픈 움직임으로 커티삭의 병사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B등급 마족 영웅 케이든 크로스가 탑승한 키마라이였다.
‘실력이 떨어지네.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케이든 크로스가 탑승한 키마라이는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움직임이 어설펐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마장기를 움직여 본 적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숙련도도 50 밑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마장기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쳐줘야 했다.
강력한 전쟁 병기인 마장기는 어떻게든 모든 인원을 동원해 가져가야 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볼 붸르니체스와는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호는 마장기 한 기, 한 기가 전쟁터에서 얼마나 소중한 전력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컹컹이도…….’
키마라이나 그와 동급의 마장기인 타나스트에 탑승시켜 추가적으로 한 기를 더 탈취한다면 정말 최고의 수확일 것 같았다.
하지만 브로리와 함께였던 주점에서의 싸움으로 인해 컹컹이는 온몸이 붕대로 칭칭 감긴 중상을 입고 있었다. 마장기의 운용은커녕 걷는 것조차 혼자서는 힘겨웠다.
* * *
군단장 엘 아스린 휘하에 소속되어 아멘드마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에바스 나이트들은 하루에 여섯 번씩 아멘드마 주위를 순찰 했다. 원래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씩 순찰했지만 최근 커티삭에 주둔하는 마족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그와 더불어 엘프 왕국의 C등급 마장기 세비트리도 두 기가 함께 움직이며 에바스 나이트를 호위하곤 했다.
“어……?”
그리고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던 순찰이었다. 그러나 심술쟁이처럼 이리저리 바람의 방향이 바뀌던 도중 비릿한 냄새가 순찰을 나온 한 에바스 나이트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이상한 냄새……. 나는 것 같지 않아?”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동료의 모습에 에바스 나이트들은 모두들 자리에 멈춰 냄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질색할 정도로 비린 냄새는 아니었다. 하지만 에바스 나이트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동료의 말대로 이상한 냄새가 그들의 코를 자극했다. 뭔가 이상했다. 이 근처에는 코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냄새를 풍길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속? 그래. 금속 냄새도 섞인 거 같은데?”
“피 냄새다.”
한 에바스 나이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무기를 빼들고는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에바스 나이트들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창한 삼림의 나무를 타고 얼마나 숲을 이동했을까? 숲의 끝자락에 도착한 에바스 나이트가 움직임을 멈췄다.
“저, 적이다!”
“세비트리에게 빨리 연락해! 적! 마족이다!”
바짝 그 뒤를 따라온 한 에바스 나이트가 숨도 돌리기 전에 외쳤다. 멀리서 녹색의 액체로 온몸을 적신 마장기 세 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당장 이 소식을 알려야 해! 마족이 공격해 들어오고 있어!”
두 명의 에바스 나이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뒤로 돌렸다. 갑작스런 마족 마장기의 등장에 아멘드마는 그야말로 비상에 걸렸다. 곧바로 병사들이 소집되었고, 마장기사가 탑승한 C등급 마장기 세비트리들이 병사들의 호위와 함께 출진하기 시작했다.
아멘드마 뿐이 아니었다. 코르다에 머무르고 있던 엘 아스린도 마족이 공격해 들어왔다는 정보에 바삐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그녀의 마장기인 윈드 라이더가 코르다 성을 떠났다.
또한 아멘드마 북쪽에 위치한 엘프들의 요충지 토갈론 요새도 갑작스러운 마족의 공격 소식에 덩달아 바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호와 브로리 그리고 케이든 크로스의 마장기는 빠른 속도로 아멘드마의 숲을 지나 코르다로 향하고 있었다.
“일단 도망치기는 했는데 저희들 괜찮을까요?”
B등급 마족 영웅이자 다크 엘프인 케이든 크로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호가 마족의 서부를 다스리는 대영주 볼 붸르니체스를 공격하고 마장기를 탈취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흥! 마족의 긍지도 모르는 소 따위!”
“브로리 양은 수인이잖아요. 이건 마족의 일이라고요.”
“내가 수인이라고? 그렇지 않다! 비록 외모는 이럴지라도 나는 마족의 소환자인 윤호에게 충성을 바치는 존재다. 그런 내가 어떻게 마족이 아닐 수 있지?”
케이든 크로스의 말에 브로리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런 브로리의 말에 케이든 크로스는 끙 하고 신음성을 내었다. 브로리의 말을 반박하는 것은 곧 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브로리의 말대로 볼 붸르니체스의 결정은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그렇다면 호 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디르시나로 돌아간다. 그리고 볼 붸르니체스와 전면전을 펼칠 준비를 하겠어.”
“히익!”
호의 대답에 케이든 크로스의 얼굴에 새하얗게 변했다. 상대는 여타 평범한 영주가 아니었다. 무려 마계의 서부를 지배하는 대영주였다. 그가 보유한 전력은 림드 산맥을 수십 번이나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았다.
“과연 우리가 볼 붸르니체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요……?”
“상대할 수 있게끔 상황을 만들어야지.”
아멘드마 영지에 도착한 이후 끈질기게 쫓아오던 칠흑의 용기사나 데스 나이트와 같은 추격자들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아멘드마에 주둔하고 있던 엘프 군단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호와 일행들도 그들에게 공격을 당하긴 했었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이 없는 그들은 엘프 병사의 공격을 무시한 채 빠른 속도로 아멘드마 영지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족 마장기에 탑승한 인원들이 누구인지 알아챈 엘프 병사들 역시 공격을 중단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