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리그너스 대륙전기 161
커티삭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볼 붸르니체스의 명령에 따라 열리는 파티가 영지민들에게는 축제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수인 하나가 수십 명에 다다르는 마족을 개 패듯 때려버리는 사건이 터졌지만 관계자들 사이에서나 화젯거리였지 커티삭에 거주하는 영지민들은 별달리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오크 굴디안 역시 축제를 제외한 다른 것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는 커티삭의 영지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장기 보관고의 교대 임무로 인해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취익! 교대다!”
“췩! 늦었다고!”
근무를 서고 있던 한 오크가 굴디안을 향해 인상을 썼다.
“췩췩췩.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어.”
“취익? 너 얼굴이…….”
굴디안의 얼굴을 확인한 오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미소가 가득하기는 했지만 굴디안의 얼굴은 흑마법에 당한 것 마냥 생기가 쪽 빨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굴디안이 미모의 다크엘프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취익. 췩. 너 그러다가 상처만 받을 수도 있어. 우리 오크들에게 다크엘프는…….”
“췩췩. 인생 짧고 굵게! 그리고 실리는 외모만 따지는 다른 다크 엘프와는 달라.”
“그래도 취익. 우리에게 다크엘프는 쳐다 볼 수 없는 나무야. 너와 실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췩췩! 그녀들도 우리와 똑같은 존재야! 사랑을 하고 나눌 수 있는 존재라고! 나와 실리는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사이야!”
그런 굴디안의 대답에 마장기 보관고를 지키던 오크들은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용히! 해라앗! 오크! 시끄럽다!”
그 순간 포효와 같은 우렁찬 목소리가 오크들을 짓눌렀다. 굴디안을 비롯해 마장기 보관고 경비 업무를 맡은 커티삭의 정예 오크 전사들을 지휘하는 외눈박이 싸이클롭스였다. 종 자체의 강함이 다른 외눈박이 싸이클롭스의 등장에 오크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겁을 먹은 정예 오크전사들의 모습에 만족한 표정을 짓던 외눈박이 싸이클롭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때였다. 멀리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마장기 보관고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스 스파토이와 정예 실리스로 구성된 백여 명 정도의 병사들이었다.
“여기! 접근! 금지다!”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다. 본인의 키마라이급 마장기를 확인하고 싶다.”
“안 된다! 파티가 끝날 때까지! 마장기 보관고! 열 수 없다! 볼 붸르니체스 각하의 명령이다!”
외눈박이 싸이클롭스의 말에 호는 난감한 눈빛을 보이며 뒤통수를 살짝 긁었다. 그러면서 빠르게 마장기 보관고 근처에 있는 방어 병력들을 살펴보았다.
삼십만이 넘는 병사들과 마족들이 다수 모여 있는 커티삭을 공격할 만한 간 큰 녀석들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마장기 보관고라는 중요성을 생각하면 형편없는 수준의 경비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정예 오크전사와 함께 외눈박이 싸이클로스가 열 마리 정도가 배치되어 있는 게 고작이었다.
E+랭크에 해당하는 정예 오크전사들은 별다른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문제는 호의 지휘 하에 있는 아이스 스파토이와 정예 실리스를 훌쩍 뛰어넘는 능력치를 보유한 외눈박이 싸이클로스였다.
‘그래봤자 B랭크 녀석에 불과하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어. 브로리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 걸?’
아이스 스파토이와 정예 실리스. 호가 이끌고 온 두 병종의 랭크는 C, D+랭크로 외눈박이 싸이클롭스와 비교하면 랭크 1단계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호는 그 차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메꿀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실전에서 써먹는 건 처음이긴 하지만.”
호가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외눈박이 싸이클롭스가 호의 행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장의 노래.”
차분한 호의 목소리가 주위로 울려 퍼졌고,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를 대표하는 S랭크의 스킬 전장의 노래가 발동되기 시작했다.
파아앗!
허공에서 생겨난 푸른색의 빛이 잘게 나눠진 파편처럼 넓게 퍼져 호의 병사들을 삼켜 들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띵동.
-<침착하라!> D 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지휘관이 독려> B+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아크 스피릿> A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전장의 노래> S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전부 휘하 병사들의 공격력, 방어력 수치를 높여주는 스킬들이었다. 그리고 스킬이 사용되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호는 앞으로 쫙 하고 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마장기 보관고를 점령한다. 모두 쓸어버려!”
“뭐어?!”
갑작스럽게 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공격 명령에 외눈박이 싸이클롭스가 큰 눈을 부릅떴다. 마족이 마족의 마장기 보관고를 공격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볼 붸르니체스 각하의! 명령을 어기다니! 적! 죽여 버리겠어! 고작 스켈레톤과! 다크 엘프로! 나 비홀……?”
화가 난 외눈박이 싸이클롭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호를 향해 자신의 몽둥이를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나 피육하는 살이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정예 실리스가 발사한 수십 발의 화살들이 외눈박이 싸이클롭스의 피부를 관통했다.
“어, 어어?”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외눈박이 싸이클롭스가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들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웬만한 화살들은 단번에 튕겨낼 수 있는 게 싸이클롭스의 피부였다. 심지어 B랭크 궁병들의 화살에도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을 정도였다. 하물며 정예 실리스는 D +랭크의 녀석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외눈박이 싸이클롭스의 의문은 거기까지였다. 차가운 냉기가 섞인 검들이 여기저기서 휘둘러졌고, 단숨에 큰 눈의 괴물을 고기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버프 빨을 무시하면 안 되지.”
이제까지 커맨더 계통으로만 클래스를 승급한 까닭에 호가 보유한 스킬들은 전부가 병종 강화 스킬이었다. 거기에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는 레어 클래스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네 개의 스킬 효과가 걸린 병사들의 능력은 A랭크와 맞먹고도 남았다. 그렇게 아이스 스파토이에 의해 다져진 고기 조각을 발로 밟으며 호가 앞으로 나섰다.
“세 개 분대는 좌측 사거리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상대해라!”
“두 개 분대는 케이든 크로스가 이끄는 아군과 합류 북쪽의 성문으로 향하는 길을 뚫는다!”
순식간에 마장기 보관고를 지키는 병사들을 처리한 호는 지체 없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호랑이의 등에는 올라탄 상황. 잠시라도 머뭇거리다간 삼십만이 넘는 병사에 포위될 뿐이었다.
“브로리!”
“알았다!”
호의 목소리에 마장기 보관고로 이동하는 도중 행여나 마족들의 눈에 들킬 가능성을 염려해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던 브로리가 자신의 마장기 골든 스테이트가 보관된 우버다인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휘유…….”
곧 이어 회오리치는 바람과 함께 소환된 거대한 마장기의 모습에 호의 입에서 절로 휘파람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브로리가 탑승한 직경 10m 에 이르는 웨어 타이거급 마장기는 그대로 마장기 보관고의 강철 문을 박살 냈다.
“수가 꽤 많은데?”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강철 거인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모습에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마장기 보관고에는 물경 서른 기가 넘는 마장기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하기야 세 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도시였다. 원래대로라면 도시 곳곳에 마장기 보관고를 건설한 후 소속 부대가 주둔한 위치에 따라 마장기를 보관하겠지만 커티삭이라는 도시가 워낙 작은 도시여서 일까? 볼 붸르니체스는 대형 마장기 보관고 하나를 지어놓고 휘하의 마장기들을 모조리 모아놓은 것 같았다.
“호! 빨리 움직여야 한다!”
“알았다.”
자신을 재촉하는 목소리에 호는 마장기들의 위용을 자세히 살펴 볼 틈도 없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B등급 마장기라 그런지 키마라이는 보관고의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브로리! 마장기의 하체, 아니 가능하면 최대한 동력로를 박살내 버려!”
자신의 마장기를 향해 빠르게 달리던 호가 브로리를 향해 소리쳤다. 디르시나까지 마장기를 가져갈 수는 없지만 상대의 마장기 전력을 깎아낼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물며 볼 붸르니체스는 사이좋게 자신의 마장기를 한 곳에 모아두기까지 않았던가?
그리고 호의 의도를 알아챈 황금색의 마장기가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콰드득! 우득! 퍼엉!
역시 SS등급의 영웅이 조종하는 마장기답게 웨어 타이거는 단숨에 마족의 C등급 마장기인 쿠슬뱅을 고철로 만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차형 마장기인 기즈린의 주포를 90 도로 휘어버리기도 했다.
아무리 골든 스테이트가 수인 왕국의 B등급 마장기인 웨어 타이거급이라고는 하지만 C등급 마장기를 단숨에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닌 마장기는 아니었다. 전부 브로리의 능력이었다.
“역시 능력치가 좋은 영웅이 있으면 걱정이 없다니까.”
그리고 브로리가 움직일 때마다 많은 수의 마장기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낙하하며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십이 억 리스를 달라고 했지? 백 억 리스 이상의 엿을 쳐 먹여주마. 소 새끼.”
이 모습을 보고 분노할 볼 붸르니체스의 모습이 떠오르자 호의 입가로 비웃음이 그려졌다. 분명 흥분한 투우소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들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때쯤이면 자신은 마장기에 탑승한 채로 엘프들의 영지로 신나게 도망치고 있을 터였다.
‘저기 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익숙한 외형의 마장기를 발견한 호는 마장기가 격납되어 있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쉐르난비체에게 하사한 이후 채 열 번도 탑승하지 않았던 자신의 키마라이급 마장기였다.
“어?”
하지만 전력을 다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던 호는 탄성과 함께 천천히 발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키마라이급 마장기의 뒤쪽에 보관되어 있는 마장기의 실루엣 때문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마장기였다.
“데스 사이더…….”
호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 나왔다. 최상급 마족이라는 볼 붸르니체스의 작위를 생각하면 커티삭에 마장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마음뿐이었지 실제로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마족의 A등급 마장기인 데스 사이더. 거대한 낫을 무기로 사용하며 대륙의 마장기 중 최강의 근접 전투 능력을 자랑하는 마족의 대표적인 마장기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키마라이로 향하던 호의 몸이 데스 사이더로 향했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모든 마장기의 조종법을 알고 있는 터라 데스 사이더에 탑승하는 호의 움직임은 마치 자신의 것인 마냥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띵동.
-마족의 A등급 마장기 데스 사이더에 탑승했습니다. 탑승 조건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호는 양 손을 꽉 쥐었다. 행여나 마족을 배신한 행위를 이유로 소속이 사라져 버려 마족의 마장기 탑승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다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것을 제외하면 최소한의 A등급의 마장기 탑승 조건은 만족하고 있었다.
바로 A등급의 클래스의 보유였다.
-3……2……1. 완료.
“푸하!”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에 절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B등급이나 C등급 마장기와는 달리 A등급 이상의 마장기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싱크로율을 만족해야 했다.
물론,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호가 탑승하지 못했던 마장기는 없었다.
그 사실은 이 세계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단번에 B등급 마장기인 키마라이의 탑승에 성공했고, 싱크로율 또한 높은 수치를 나타내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데스 사이더의 싱크로율을 확인합니다. 싱크로율에 따라 마장기의 숙련도가 결정됩니다.
-확인 완료. 사용자와 데스 사이더와의 싱크로율은 67%입니다.
-마장기의 숙련도가 67로 정해졌습니다. 이는 사용자의 능력과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메시지가 끝나기가 무섭게 어두웠던 데스 사이더의 조종석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키마라이에 탑승했을 때보다는 조금 낮은 수치이긴 했지만 흥분으로 인해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B등급도 아닌 무려 A등급의 마장기였다. 그런 탓일까? 호는 67이라는 싱크로율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A등급의 마장기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최소 50%이상의 싱크로율이 필요했다.
“그럼 어디 가보자고.”
호가 조종간을 당기자 그그긍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에 노란빛의 불이 들어온 데스 사이더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