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리그너스 대륙전기 160
“이번 사건의 원흉인 수인족을 자네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게.”
볼 붸르니체스의 말이 끝났지만 호는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욕설을 퍼부으며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브로리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작 이런 사건으로 인해 SS등급의 영웅을 잃을 수는 없었다. 설령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 브로리를 처형하게 된다 하더라도 깔끔하게 문제가 해결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젠장.’
그렇다고 브로리를 두고 무리해서 돈으로 해결을 본다 하더라도 좋은 꼴을 볼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족 대신 수인을 감싸 안는다며 마족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이미지를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빌어먹을!’
만남을 마치고 볼 붸르니체스의 방에서 나온 호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힘과 무력을 숭상하는 마족이 이렇게 더러울 술수를 사용하다니! 지금 당장이라도 마족의 긍지를 모르는 녀석이라고 외치며 그의 얼굴을 후려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호의 어깨에는 본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젠장! 젠장!’
힘이 있었다면. 볼 붸르니체스를 찍어 눌러버릴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마족과 수인? 웃기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부하인 브로리가 마족이 아니라 처벌해야 한다는 것은 림드 산맥의 패자이자 수인 왕국의 공격에서 마족의 영토를 지켜냈던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볼 붸르니체스가 머무는 방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에 호는 더욱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생각 따위는 하고 있지도 않겠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기는.”
으득하고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복도로 퍼져 나갔다. 브로리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열두 명의 영주를 포함해 볼 붸르니체스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이번 일은 아무것도 아닌 해프닝에 불과했을 터였다.
더욱이 호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속에 품고 있는 볼 붸르니체스에 대한 욕지거리마저도 그의 귀에 들어갈까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야기는 잘 됐어요?”
호가 볼 붸르니체스와의 대면을 마치고 돌아오자 의자에 앉아 있던 벨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아니.”
그리고 힘이 실려 있지 않은 대답에 방에서 호를 기다리고 있던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그러건 말건 호는 아까 전에 있었던 볼 붸르니체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 그는 호에게 두 가지 선택을 주었었다.
‘십이억과 브로리의 목숨.’
십이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리스를 이번 사건의 배상금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한 지역의 패자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디르시나의 특성화 개발이 들어간 이상 어마어마한 양의 리스가 계속해서 투입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꼴이 될 뿐이었다. 그뿐인가? 라홀로프 상단과의 거래도 있었다.
게다가 애당초 이번 사태의 원흉은 브로리가 아니었다. 엑스트라라는 쓰레기 같은 녀석이 먼저 벌인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배상금을 내놓는다? 마족들에게는 영락없이 우스꽝스러운 영주가 될 판이었다. 또한 마족과 적대하는 수인을 감싸 안았다는 이유로 더욱 안 좋은 이미지가 박힐 뿐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브로리에게 벌을 주는 것은 더욱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브로리가 누군가? 무려 SS등급의 영웅이었다.
설령 브로리를 처벌한다 쳐도 그녀는 마족도 아닌 수인에 불과했다. 그들은 브로리의 처벌을 아주 당연한 게 받아들일 터였다.
브로리의 뛰어난 능력을 생각하면 결국 호만 엄청난 손해를 보는 일이었다.
“그 자식은 애당초 이 사건을 해결할 생각이 없었어.”
호에게는 둘 다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아마 볼 붸르니체스도 그 사실을 알고 이런 조건을 내민 게 분명했다. 아마 지금쯤 고민과 불안에 빠진 자신을 상상하며 즐거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이 상황을 넘긴다 하더라도 볼 붸르니체스는 더욱더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을 압박해 올 게 틀림없었다.
“볼 붸르니체스가 뭐라고 했는데요?”
“십이억 리스를 내놓거나, 브로리를 죽이라고 했어.”
“……에?!”
호의 대답에 아스트리드 벨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잠시 후 이성을 되찾은 아스트리드 벨이 소리치듯 말했다.
“말도 안돼요! 어떻게 그런 조건을!”
“어떻게든 날 잡아 먹으려고 하는 것 같아.”
“마족 주제에 비겁한 수를 쓰는군. 윤호! 그 소 새끼에게 가자! 내가 가서 직접! 투쟁의 길을 열겠다!”
브로리가 흥분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그 모습에 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니, 그건 참아줘. 그 녀석은 니가 투쟁의 길을 연다고 해서 받아들일 놈이 아니야. 하물며 넌 수인이야. 더 이상 사고를 치면 이곳을 벗어나는 것조차 힘들어 질 거라고.”
“큭!”
호의 말에 브로리는 천천히 그리고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씁쓸함과 지금의 이 상황에 대한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볼 붸르니체스는 왜 우리를 차별하는 거죠?”
아스트리드 벨이 확신을 담아 물었다. 볼 붸르니체스의 이 결정은 차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서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고, 호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소환자니까. 똑같은 마족의 깃발을 달고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우리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거지.”
“어째서요?! 그렇다면 일찍이 우리를 그냥 내보냈으면 되는 일 아니었어요? 왜 선택의 신전에서 우리를 선택했는데요?”
“글쎄다.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선택의 신전에서 우리를 선택했던 것이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던 행동이었다는 것은 알 것 같아.”
마족과 소환자를 차별하는 볼 붸르니체스의 이 결정이 쉐르난비체의 명령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그의 독단에 의한 결정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소환자인 내가 마족들에게 차별을 받는다고 쉐르난비체에게 말해서 어쩌려고?’
쉐르난비체가 머무르고 있는 블라디션은 커티삭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설령 지금의 상황이 쉐르난비체에 귀에 들어간다 해도 딱히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3년 전 선택의 신전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친 이후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소환자와 최상급 마족이자 대영주인 볼 붸르니체스의 대립. 쉐르난비체가 둘 중 누구의 손을 들어 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마음 같아서는 열두 명의 영주라는 녀석들과 영지전을 치르고 싶지만.’
볼 붸르니체스는 일찌감치 영지전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겉으로는 제 살 깎아먹기에 불과한 영지전을 대영주로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지크 로리의 수인들과 북부의 엘프 군단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그런 볼 붸르니체스의 이유는 언뜻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호는 어째서 볼 붸르니체스가 먼저 그런 말을 꺼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소 주제에 제법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행여나 내가 이길 가능성을 염두 해 둔 것이겠지.’
자신은 마장기가 포함된 수인 왕국의 공격을 세 번이나 막아냈었다. 그에 반해 브로리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는 열두 명의 영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커티삭을 찾아온 영주 중에는 C등급 마장기 하나 없는 영주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B랭크 수준의 병종조차 보유하지 못한 녀석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볼 붸르니체스의 말을 무시하고 영지전을 진행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볼 붸르니체스가 직접 움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쉬는 호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만큼은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볼 붸르니체스는 이제부터 나의 적이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 뿐만 아니라 연희 삼국지, 대항해시대등과 같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공략에는 어떤 게임이든 빠지지 않고 ‘유저를 적대시하는 녀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먼저 처리해라’ 게이머들의 주옥같은 명언이 있었다.
하물며 이 세계는 게임도 아니었다. 분명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호는 멍하니 그 칼에 찔려 이 무대에서 퇴장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 나가야겠어.”
호가 말했다. 곧 있으면 열릴 파티 따위에 참석할 생각은 없었다. 파티에 참여해봤자 볼썽사나운 꼴만 당할 게 분명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당장 디르시나로 돌아가 볼 붸르니체스를 상대할 수 있는 해결책을 고민하는 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빠져나가는 것도 문제였다. 커티삭에는 세 개 군단의 병사들이 주둔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파티에 참여하는 마계의 영주들이 이끌고 온 병사들도 있었다.
“엘프들의 영지로 가야겠죠?”
“응. 그래야겠지.”
만약 자신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면 볼 붸르니체스는 분명 추격대를 보내올 터였다. 엘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호는 그들을 추격대를 막아주는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호. 자네가 여기를 빠져나가겠다면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주겠다.”
브로리가 각오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각오가 마치 커티삭에서 옥쇄를 할 기세였기에 호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그녀를 잃을 수는 없었다.
“도망은 함께 할 거야. 대신 부탁을 하나 할게.”
“무엇이든지 말해라. 호.”
“여기 오기 전부터 이야기했던 대로 병사들은 버리고 마장기를 이용해서 도망을 칠 생각이야. 그러니까 저 녀석을 부탁해.”
호가 가리킨 방향에는 붕대에 칭칭 감겨 있는 컹컹이가 있었다. 도망을 친다면 A등급 영웅인 컹컹이도 데리고 가야했다. 그리고 컹컹이를 바라보던 브로리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빚진 것도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녀석만큼은 내가 꼭 챙기도록 하겠다.”
곧 세부 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행여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서일까? 호의 마장기인 키마라이는 현재 삼엄한 감시 하에 보관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브로리의 마장기는 그녀가 지니고 있는 특수한 아이템인 우버다인 덕분에 아무도 그녀가 마장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디르시나에서부터 함께했던 병사들은 버리고 갈 생각이야. 하지만 그냥 버릴 생각은 없어.”
“시간을 끄는 데 사용할 생각이군. 하지만 아이스 스파토이와 정예 실리스의 전투 능력은…….”
“대단한 편이 아니지. 하지만…….”
아이스 스파토이와 정예 실리스. C 와 D+랭크의 병종이었다.
커티삭에 주둔하고 있는 외눈박이 싸이클롭스나 데스나이트, 마족의 A랭크 비행병인 칠흑의 용기사와 비교하면 별 볼 일 없는 전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각 병종의 공격력, 방어력 수치에 따른 일대일의 대결에서만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 커맨더 계통의 클래스를 지닌 영웅이 전장에서 얼마나 까다로운지 직접 보여줄 생각이야.”
호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