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리그너스 대륙전기 159
“죽여…….”
비트 엑스트라의 입에서 겨우 두 개의 단어가 내뱉어질 때였다. 퍼억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반으로 접혀 허공에 날기 시작했다. 어느새 놀을 던져 버린 수인족이 번개와 같은 움직임으로 그를 후려친 것이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돌로 만들어진 벽면이 그대로 부서졌다.
“크, 크헉! 쿨럭!”
온몸이 부서지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땅바닥에 널브러진 엑스트라는 계속해서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커다란 이빨은 산산조각이 났고, 팔과 다리가 괴상한 모양으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엄청난 고통에 엑스트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조차 할 수 없었다.
“컹컹이. 너 말리면 뒈젠다.”
“……컹컹. 저 녀석 이미 죽어 가는데요.”
“그건 상관없어. 나는 아직 시작도 안했거든.”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들이 킨 브로리가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브로리 발란스. SS등급의 영웅인 그녀는 본신의 무력만 따지자면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영웅이었다.
“와아아아!”
“죽여 버려! 살려두지 마! 마족의 긍지를 보여라!”
그리고 사소한 시비로 시작된 싸움은 마른 장작에 불을 지핀 것처럼 빠르게 번져 나갔다. 자신들의 동료라고 할 수 있는 마족이 한 수인에게 개처럼 얻어맞는 모습에 성깔 있는 몇몇 마족들이 참지 못하고 나선 게 그 시발점이었다.
“지금 맞고 있는 자식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그게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하냐고?”
“그래! 마족이 맞고 있다고! 우리가 남이가?!”
그들에게 싸움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수많은 마족들이 모인 이 커티삭의 대로에서 수인이 마족을 후려패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컹컹! 브로리 님! 어떻게 할 거예요?! 점점 더 싸움이 커지고 있다고요!”
브로리를 말리기 위해 본의 아니게 싸움판에 끼어든 컹컹이가 자신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마족을 보고는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메이스를 휘둘렀다.
곧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돌아간 마족이 빙그르르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떨어졌다. 그 모습에 컹컹이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주, 죽었어! 저! 저 녀석! 배신자다!”
“저 놀 자식도 똑같은 놈이다!”
“제법인데?”
“……씨발.”
브로리의 칭찬에 컹컹이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꾸욱 참았다. 자신의 메이스 한 방도 버티지 못하는 맷집을 지닌 녀석들이 왜 저 괴물에게 불나방처럼 덤벼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컹컹이를 향해 다양한 무기들을 들고 달려오는 마족들을 향해 브로리가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모조리 덤벼라. 이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아!”
* * *
“부상자만 41명에 죽은 녀석이 17명. 그리고 커티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병사들의 피해가 116명. 누가 보면 타 종족의 특수 부대가 공격해 들어온 줄 알겠어.”
보고서를 받은 호가 중얼거렸다. 커티삭의 대로에서 벌어진 패싸움은 도시 전체의 화젯거리였다. 그런 호의 앞에는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든 브로리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놀 한 마리가 있었다.
“하아. 제대로 사고를 쳤군.”
피해 상황만 보면 브로리와 컹컹이가 살아 있는 게 용했다. 두 명이 무려 육십 명에 가까운 녀석들과 맞붙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녀석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브로리는 그렇다 쳐도 컹컹이의 상태는 제법 중상이었다.
돌아다니는 것은커녕 며칠간 죽만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이빨도 여덟 개나 부러지는 바람에 새로 이가 나기 전까지는 육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나, 나는 끝까지 참으려고 했다.”
브로리의 말이 끝나는 순간 붕대에 온몸이 감겨 있던 컹컹이가 몸을 크게 흔들었다가 브로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는 잠잠해졌다.
“아아. 그래.”
호가 허탈한 듯 짧게 웃었다. 굳이 브로리와 컹컹이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진 상황이었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볼 붸르니체스 휘하의 마족들은 다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소환자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개 중에는 도가 지나친 발언을 하는 마족들도 있었다. 당장이라도 림드 산맥을 점령하고 소환자들을 노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마족들이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씁쓸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전후 사정을 들어보니 우리가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아니었던데?’
이런 마족들의 단체 행동에 호는 자신이 마족이라는 소속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뭐, 그들은 3년 전 여신 라헬로 인해 이 세계에 소환자들이 올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마족에 대해 크게 소속감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마족들의 반응은 호에게 그나마 있던 정나미도 다 떨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다.”
뒤이어 흘러나온 브로리의 조그마한 목소리에 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일단은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해야 했다.
머리가 좋은 로우덴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으면 도움이 됐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는 디르시나에 있었다.
일단 휘하 마족들의 소리에 볼 붸르니체스는 잠잠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번 일은 너희들끼리 해결하라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호는 계속해서 그가 침묵을 유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을 난감하게 만들 타이밍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경우 마족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하는 지 알아봤어요.”
아스트리드 벨이 말했다. 그녀는 과거 커티삭에서 행정 일을 맡았던 까닭에 제법 알고 있는 마족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그런 마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모양이었다.
“보통 이런 일은 사고를 일으킨 대상자들끼리 투쟁의 길을 연다고 해요.”
“투쟁의 길이라…….”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도 등장하는 단어인 까닭에 자신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투쟁의 길. 서로가 본인의 모든 것을 걸고 일대일의 전투를 펼치는 것을 뜻했다. 오로지 순수한 무력으로 대결을 펼치는 승자독식 구조의 결투로 힘과 무력을 숭상하는 마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해결방법이었다.
“그러면 이번 사건을 일으킨 브로리와 비트 엑스트라라는 녀석이 한 판 붙으면 되는 건가?”
그렇다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가벼운 경상을 입긴 했지만 브로리는 브로리. 그녀는 볼 붸르니체스가 직접 나선다 하더라도 충분히 짓밟을 수 있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트 엑스트라라는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만 들어도 별 볼 일 없는 녀석임이 틀림없었다.
“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비트 엑스트라라는 녀석이 죽었거든요.”
“죽었다고?”
“딱 세, 세 대 때렸을 뿐이었다. 먼저 나한테 맥주잔을 던지기에 정말 센 놈인 줄 알았다.”
브로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서 세 대라. 호는 그 엑스트라라는 녀석이 확실히 죽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가볍게 성호를 그었다.
“뭐, 이렇게 되면 투쟁의 길은 물 건너 간 건가? 그러면 지금과 같은 경우처럼 당사자가 죽었으면 어떻게 일이 처리되는 거지?”
“보통 휘하 부하들끼리 싸움이 벌어졌을 때 한 쪽이 죽게 되면 영지전을 벌인다고 해요.”
제법 조사를 한 모양인지 아스트리드 벨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영지전? 비트 엑스트라가 누구 휘하의 마족이었지?”
“쿨타크라는 인물이에요. 솔직히 그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커티삭과 비슷한 발전도를 보이는 마을 두 개를 보유하고 있는 마족에 불과하니까요. 마장기도 없다는 것 같아요.”
호의 표정이 살짝 펴졌다. 그 정도라면 손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쿨타크라는 녀석과 비교한다면 자신은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 * *
“어째서 자네가 쿨타크와 담판을 짓겠다고 말하는 거지?”
“……네?”
볼 붸르니체스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호는 마른 입술에 침을 살짝 묻혔다.
“사건을 일으킨 인물은 제 휘하의 무장인 브로리와 쿨타크 영주 밑의 비트 엑스트라라는 마족입니다. 그러니 마족의 규율에 따라…….”
“흠. 아무래도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자신의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미노타우르스의 모습에 호는 표정을 굳혔다. 가볍게 해결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일이 조금 복잡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의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본 영주가 무려 열두 명이라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내 말은 그런 사소한 시비를 가리자는 게 아니다.”
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볼 붸르니체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향한 강렬한 눈빛에 호는 눈을 감았다 떴다. 호의가 섞인 눈빛은 결코 아니었다.
‘빌어먹을.’
마음속으로 욕지거리가 흘러 나왔다. 어쩐지 볼 붸르니체스가 이제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게 이상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는 아직 소환자라 마족의 규율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일러주셨으면 합니다. 볼 붸르니체스 각하.”
일단은 한 발 물러나 좀 더 냉정하게 돌아가는 사태의 추이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자네가 영지전으로 시비를 가리자면 열두 명의 영주와 영지전을 치러야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라네.”
“…….”
“그렇기 때문에 자네와 같은 인간들의 방식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상하게도 말을 꺼내는 볼 붸르니체스의 목소리에는 즐거운 기색이 담겨 있었다.
“열두 명의 영주에게 일억 리스씩을 배상하도록 하게.”
“네, 네에?!”
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 억 리스는 애 이름이 아니었다. 막말로 소영지 두 개를 보유하고 있는 쿨타크라는 녀석이 수백 년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모을 수 있을까말까 한 돈이었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자네를 규탄하는 본인 휘하 마족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겠지.”
볼 붸르니체스의 말에 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살며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분노로 인해 굳은 얼굴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열두 명의 영주에게 일억 리스라면 무려 십이억에 다다르는 엄청난 돈이었다.
디르시나의 특성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이라면 결코 배상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배상이 불가능한 돈이었다.
“무리입니다. 림드 산맥의 경제력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재고를 바랍니다. 볼 붸르니체스 각하.”
“마족의 피는 황금보다 비싸다.”
“하, 하지만 이건 일방적인 시비로 인해…….”
“림드 산맥의 패자.”
자신을 부르는 볼 붸르니체스의 목소리에 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건 이미 결정이 내려진 사항이다. 나는 자네에게 이미 이 문제의 해결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 그리고 이번 싸움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시비에 따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야.”
“…….”
“마족과 수인이 커티삭에서 부딪친 싸움이다. 아, 또 하나의 해결책이 있긴 하네.”
말을 마친 볼 붸르니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자신이 선심을 쓰는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