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리그너스 대륙전기 158
‘이거 단단히 작정을 하고 부른 건가?’
그런 거면 곤란했다. 비장의 무기인 브로리가 있다 하더라도 커티삭에는 열 기가 넘는 마장기와 삼십만이 넘는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S랭크의 병사들도 있었다. 까닥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호승심도 치밀어 올랐다. 상대는 볼 붸르니체스. 최상급의 마족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마의 지배자라는 쉐르난비체도 수인 왕국의 대왕 아쉬토도 팔 왕국의 수장이자 골든 크로우를 다스리는 이레네 아르티아도 아니었다.
단지 마족의 대영주로 S등급의 영웅에 불과한 녀석이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한때 이 대륙의 모든 영웅들을 굴복시키고 리그너스 대륙을 제패했던 왕이었다. 비록 게임에서였지만 말이다.
“이곳은 게임 세계가 아니야. 하지만…….”
자신이 플레이했던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흡사한 면이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은 이 세계에서도 제법 잘 통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결과가 그 증거였다. 어느덧 방에 혼자 남게 된 호가 자신의 양손을 맞잡으며 중얼거렸다.
“볼 붸르니체스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강하게 나가서는 안 돼.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지.”
이 세계에 떨어진 초창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자신은 림드 산맥의 패자. 그리고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라는 레어 클래스를 지닌 A등급 영웅이었다.
목적이 있는 파티라고는 해도 볼 붸르니체스의 이름이 있는 이상 파티를 허투루 진행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의 격은 있어야 했다. 게다가 볼 붸르니체스가 직접 파티를 열겠다고 지시를 내린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조그마한 영지인 커티삭으로 상당수의 유력 마족들이 모이고 있었다. 대부분 볼 붸르니체스의 휘하에 있는 마족들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최상급 마족을 모시는 마족도 볼 붸르니체스의 휘하가 아닌 커티삭 만한 크기의 조그마한 소영지를 다스리는 마족들도 더러 존재했다.
다른 최상급 마족을 모시는 마족들은 볼 붸르니체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파티에 참가했다.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마족들도 목적이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알려 볼 붸르니체스의 밑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강한 마족의 보호를 받을 수만 있다면 투쟁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덕분에 커티삭은 엄청난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고위급 마족들이 홀로 오지는 않는 법. 여관마다 커티삭을 찾아온 마족과 호위들이 가득 들어찼고, 그마저도 모자라 여기저기서 새로운 여관이 급하게 지어지고 있었다.
단, 며칠간의 파티를 위해 이들이 뿌리는 돈은 커티삭의 곳간을 상당 부분 채워줄 터였다.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은 최상급 마족 중 하나인 볼 붸르니체스의 권력이었다.
“이벤트는 즐기라고 있는 법이지.”
어쨌든 호는 파티가 열리기 전까지 정말 실컷 놀았다. 친분이 있는 마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호를 부를 마족도 없었다.
하지만 호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와중 마족들 사이에서는 림드 산맥을 다스리는 소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었다.
“삼 년 전 소환된 소환자가 이 커티삭에 있다며?”
“이번 볼 붸르니체스 각하의 파티에 참여한다고 하던데?”
“수인 왕국의 공격을 막아내고 림드 산맥을 점령한 인물이라던데 어떤 인간일까?”
호에 대한 이야기는 마족들에게 있어 굉장히 흥미로운 화젯거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3년 전, 처음으로 이 리그너스 대륙에 소환된 소환자들은 대부분 비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족의 소환자들은 대다수가 선택의 신전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마왕 쉐르난비체의 손에 모조리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만마의 지배자의 손에서 살아남은 녀석들은 평범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주점, 카지노, 환락가등에서는 림드 산맥의 패자인 호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중에는 소환자를 높이 평가하는 마족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마족도 있었다.
“웃기는 소리! 버러지 같은 소환자가 그런 실력이 어디 있어?”
쾅하는 소리가 주점에 울려 퍼졌다. 술을 마시던 근육질의 마족이 테이블을 내려친 것이다. 당연히 주점 내의 모든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호라는 녀석이 수인 왕국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건 거짓말이 틀림없어! 볼 붸르니체스 각하의 용맹한 병사들이 막아낸 것을 와전시킨 소문에 불과하다고!”
쩌렁쩌렁 주점을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떠드는 대도 불구하고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근육질의 마족은 신이 난 듯 계속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녀석은 오크가 든 몽둥이만 봐도 오줌을 지릴 거다! 게다가 귀쟁이 녀석들과 친하게도 지낸다며? 그 놈은 마족이 아니야! 배신자다!”
“흐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아?”
“그러게. 엘프 녀석들과 손을 잡는다는 건……. 마족의 긍지를 무시하는 거라고.”
“너무 성급한 생각 아니야? 쉐르난비체 폐하께서 직접 마장기를 하사하신 소환자라고. 그 소환자를 의심하는 건 쉐르난비체 폐하의 안목을 의심하는 거나 다름없어.”
배신자. 그 한 마디에 주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격한 토론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며 근육질의 마족 비트 엑스트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때였다.
“여기 시원한 맥주 한 잔.”
“컹컹. 술 드셔도 됩니까?”
“내 나이가 백 사십이 넘었다. 황금족의 꼬맹이야.”
“이제 저도 열두 살이 됩니다. 꼬맹이가 아니라고요! 컹컹! 바텐더! 저는 우유 주세요.”
바가 형성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조그마한 수인과 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비트 엑스트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인간? 수인족?’
여자는 십대 초반의 어린 인간 여자로 보였다. 하지만 엉덩이 부근에 긴 꼬리가 달려 있어 정확한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대놓고 돌아다니는 거야?’
하지만 비트는 곧 자신의 얼굴을 구겼다. 커티삭은 마족의 도시였다. 인간 혹은 수인이 대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마족의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는 인간과 수인은 오로지 마족의 노예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린 외모의 수인은 너무나 당당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아마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풀 플레이트를 무장한 놀 때문인 것 같았다.
‘바보 아니야? 누가 주점에 풀 플레이트를 입고 와?’
저 마족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사가 하나 빠진 녀석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비트 엑스트라의 눈은 그 둘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둘이 공통적으로 걸치고 있는 망토의 문장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가 사용하는 문장이었다.
“저놈들…….”
비트 엑스트라의 입에 히죽 미소가 걸렸다. 사실 주점에서 그가 호를 모욕하고 있던 것은 소환자 녀석이 지니고 있는 명성을 차지하기 위해 그를 투쟁의 길로 불러내기 위함이었다. 다른 세계의 인간 주제에 하급 마족인 자신보다 유명하다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가 자신의 도전을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투쟁의 길을 피한다고 해서 호에게 어떤 패널티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족들 또한 투쟁의 길을 피한다고 해서 상대 마족을 욕하거나 무시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하루도 빠짐없이 마족들끼리의 전투가 벌어졌을 터였다. 그건 제살 깎아먹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본인의 부하를 직접 건드리면 호라는 녀석도 내 도전을 피하지는 않겠지?’
비트 엑스트라는 자신이 제법 실력 있는 마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공을 세울 수 있는 자신감도 있었다. 저 두 꼬맹이 녀석들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줄줄 흘러내리는 삐딱한 자세였다.
“어이! 거기 너희. 여기가 어딘지 알고 술을 마시는 거야?”
비트 엑스트라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시비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바가 형성된 테이블에 낮아 있는 호의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바에 앉아 있던 수인과 놀이 슬쩍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
조그마한 수인 영웅의 눈동자에 담긴 무심함에 비트 엑스트라의 안색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수인족의 어린 외모는 엑스트라에게 자신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주점이 또다시 조용해졌다. 주점을 가득 메운 마족과 몬스터들의 얼굴에는 흥미진진함이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소환자인 호를 욕하던 마족이 수인으로 생각되는 인물을 향해 싸움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눈치 빠른 몇몇은 커티삭의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는 수인 영웅이 소환자 윤호의 부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은 이대로 싸움이 벌어지지 않으면 폭동이라도 일어날 분위기였다. 비트 엑스트라는 그런 주점의 분위기를 빠르게 파악했다. 이 분위기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 너, 꼬맹이. 수인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여기서 술을 마시는 거지?”
“나? 모습은 이래도 나는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의 이름 아래에 마족의 깃발을 들고 있다. 그대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지.”
꼬마 수인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비트 엑스트라도 마주 웃었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맥주잔을 들어 수인 영웅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퍼어억!
꽤나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맥주잔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인의 머리를 정통으로 강타하고 멀리 튕겨져 나갔다. 그와 함께 엄청난 환호성이 주점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방방 날뛰고 있었다. 싸움, 싸움이었다.
“어디서 말장난이야! 감히 수인 주제에!”
주점의 분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엑스트라가 호기롭게 외쳤다. 하지만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일까? 그는 조그마한 수인족의 옆에 앉은 풀 플레이트를 입은 놀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 하하하. 씨발.”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변한 주점에서 나지막한 욕지거리가 울려 퍼졌다. 맥주잔에 얻어맞고 머리가 돌아간 수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여기서 네년을 때려눕혀 주지. 아니,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괴롭혀주마. 네 녀석의 주인인 호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다. 감히 소환자 주제에 마족의 긍지를 더럽혀?”
“……어이. 너 이름이 뭐냐?”
수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비트 엑스트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마족들 역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제부터 신나게 치고 박는 싸움을 볼 줄 알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뭐, 뭐야?’
갑작스럽게 변한 분위기에 엑스트라는 초조함을 느꼈다. 수인 영웅이 울고 불며 자신에게 덤비면 가볍게 어루만져 줄 생각이었다. 그만한 자신감도 있었다. 상대는 쪼그마한 녀석이었고, 자신은 충분히 강했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쿨타크님의 휘하에 있는 비트 엑스트라다!”
결국 엑스트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두 개의 마을을 다스리는 마족의 이름을 입에 올려야만 했다. 그 말을 들은 수인 영웅이 히죽 웃었다.
“그래? 그러면 그 녀석도 죽여야 되겠네.”
“컹컹! 브, 브로리 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말썽을 피우면 곤란하다고요!”
“시끄러 개새끼. 나 지금 한 대 맞았다고.”
풀 플레이트를 입은 놀이 브로리라는 수인의 몸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엑스트라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