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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157화 (157/522)

# 157

리그너스 대륙전기 157

‘……아니로군.’

하지만 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상황처럼 볼 붸르니체스가 자신을 견제하는 게 그에게는 옳은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호는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마족을 배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은 곧 대륙 통일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전승에 따라 창조신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도 자신은 이 대륙을 통일해야 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볼 붸르니체스도 마왕 쉐르난비체도 모두가 적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현재 자신의 소속인 마족도 허울뿐인 껍데기였다.

현재 소속이 마족이라는 건 마족에 대한 충성심이 우러나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선택의 신전에서 운 나쁘게 걸린 것에 불과했다.

‘소속이라는 게 이 세계에서 소환자들이 성장해 나가는 데 있어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니, 방패막이조차 되지 않았다.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인 혹은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경우보다 오히려 선택의 신전에서 소속이 정해진 종족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멍멍. 어쨌든 우리는 볼 붸르니체스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멍.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그게 내가 커티삭으로 가야하는 이유로군.”

“그렇습니다. 멍멍.”

자신의 주군을 위험한 장소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로우덴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다만 절도 있게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다.

“흐음…….”

“만약 호 님께서 초대장을 무시하시면 볼 붸르니체스는 당장 군사를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멍멍.”

로우덴의 말을 들으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게 분명했다. 이 초대장은 자신에 대한 볼 붸르니체스의 시험이었다. 그리고 호는 아까와는 다른 공기가 응접실에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맨 몸으로 커티삭에 갈 수는 없지.”

“멍멍. 물론입니다.”

커티삭을 방문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최대한의 대비를 하고 가야했다. 그리고 곧 커티삭으로 향할 멤버가 꾸려지기 시작했다.

“멍멍. 브로리 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하셔야 합니다. 호 님이 위험에 처했을 때 호 님을 구출해 줄 수 있는 분은 브로리 님 밖에 없습니다.”

먼저 브로리가 합류했다. ‘골든 스테이트’라는 전용기를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디르시나에 있는 모든 영웅을 때려잡을 수 있는 그녀의 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다음으로 합류한 사람은 조금 의외의 인물이었다.

“저요?”

“멍멍. 그렇습니다.”

로우덴이 아스트리드 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로우덴의 말이 의외인지 벨이 호의 얼굴을 쳐다봤다. 호도 의외라는 생각이었다.

“어째서지? 로우덴? 나는 한시진을 추천할 줄 알았는데.”

“멍. 한시진 양은 디르시나에 남아야 합니다. 브로리 님과 함께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닌 한시진 양이 함께한다면 오히려 볼 붸르니체스의 경계심을 북돋을 뿐입니다. 멍멍.”

로우덴은 초대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상대가 어떤 의도로 초대장을 보냈는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그렇게 브로리를 포함해 아스트리드 벨 그리고 케이든 크로스와 컹컹이가 합류했다. 케이든 크로스와 컹컹이가 합류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마족의 영웅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커티삭으로 함께할 병력은 급하게 양성한 마족의 C랭크 보병인 아이스 스파토이와 C랭크 궁병 정예 실리스들로 이루어졌다. 괜히 엘븐 템플러를 데리고 갔다가 볼 붸르니체스의 만남에 역효과가 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멍멍.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마장기를 이용해 도망치셔야 합니다. 멍.”

“조심해야 돼, 오빠. 진짜……. 나도 가고 싶은데. 지금이라도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걱정 된단 말이야.”

마정석 꾸러미를 건네주며 안절부절 못하는 한시진의 모습에 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로우덴의 말대로 괜히 볼 붸르니체스의 경계심을 살 필요는 없어.무슨 일이 꼭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고. 그리고 브로리가 함께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야.”

“후우…….”

호의 말에 한시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시진의 모습을 보며 호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호가 아는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아는 현명한 여자였다.

“컹컹. 영주님 이제 곧 있으면 출발 준비가 끝납니다.”

오우거 슬레이어인 컹컹이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은색의 풀 플레이트로 완전 무장을 한 그의 모습은 마치 인간 기사단의 기사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한 손에는 삐쭉삐쭉한 가시가 방사형으로 돌출되어 있는 모닝스타를 들고 있었다.

“알았다.”

컹컹이에게 대답을 한 호는 한시진과 로우덴을 한 번씩 스윽 훑어보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는 커티삭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에 올라탄 호가 박차를 가했고, 호를 선두로 마장기와 마족의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긴 여행이 되겠군.’

점점 멀어지는 디르시나의 모습을 보며 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커티삭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또한 볼 붸르니체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큰 변화가 일어날 것 같았다.

* * *

최상급 마족이자 마족의 S등급 영웅이기도 한 볼 붸르니체스는 요즘 한 가지 일 때문에 머리가 아파오고 있었다.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 소환자인 주제에 제법 대단하기는 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볼 붸르니체스는 이미 윤호라는 인물을 한 번 만나본 적이 있었다.

다른 소환자들에 비해 능력도 있고 기개도 있어보였지만 그래봤자 소환자는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였다. 만마의 지배자이자 위대하신 마왕 쉐르난비체 폐하에게 영혼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게다가 볼 붸르니체스는 천족과 인간들의 전쟁에서 인간들의 소환자 한 명이 인간을 배신, 천족으로 전향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소환자는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게 그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더더구나 호라는 녀석은 위대한 마족의 깃발 아래에 있으면서 타 종족의 군대를 주력으로 양성하는 싹수부터 노란 녀석이었다.

림드 산맥이라는 제법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대로 두면 그 녀석은 엘프와 손을 잡고 우리에게 검끝을 돌릴지도 모른다.’

림드 산맥의 패자로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 폐하가 하사해주신 키마라이를 비롯해 여러 대의 마장기까지 보유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정말로 그가 엘프들과 손을 잡는다면 볼 붸르니체스 역시 곤란했다.

그렇기 때문에 볼 붸르니체스는 호의 세력이 다른 종족에게 흡수되기 전에 자신이 처리할 계획을 세웠다.

그 시작은 몬스터들의 준동이었다. 수인 왕국과의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림드 산맥의 전력이 대부분 에스트라다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노리고 림드 산맥의 몬스터를 준동시켜 후방에 위치한 도시인 해머스를 노리게 한 것이다. 그리고 몬스터들로 인해 림드 산맥이 혼란상황에 빠지면…….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들을 짓밟고 림드 산맥을 차지하려고 했었지.”

쿠흥 하는 소리와 함께 볼 붸르니체스의 코에서 거친 콧김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계획은 실패했다. 호라는 소환자의 운이 좋은 것인지 하필이면 마장기를 동원한 부대가 근처를 순찰하고 있던 터라 해머스가 점령당하기도 전에 오우거 칼타스를 비롯한 몬스터 군대가 전멸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볼 붸르니체스는 그 상황에서 호라는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를 기다렸다.

“분명 칼타스라는 녀석이 시시콜콜 죄다 떠들었을 텐데…….”

이번 몬스터 사태로 인해 호는 자신이 본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무언가 대책을 세울 걸 분명했다. 소환자이긴 하지만 맨 몸으로 림드 산맥의 패자가 된 녀석이니까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터.

그리고 만약 엘프 놈들과 손을 잡는다면 볼 붸르니체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군대를 움직일 생각이었다.

이미 커티삭에서는 자신의 세 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고, 커티삭에서 도시 두 개 가량 떨어진 영지인 워로드에는 스무 기의 마장기를 포함해 두 개의 군단이 자신의 출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볼 붸르니체스는 호라는 녀석이 엘프들과 손을 잡으려고 한다는 낌새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해머스에서 머물다가 디르시나로 돌아가 최근 진행 중인 대공사에 열중하고 있다는 보고만 받았을 뿐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그렇다고 의심을 거둘 수는 없었다. 소환자라고는 하지만 그가 보유한 전력만큼은 진짜배기였으니까. 이 세계에 온지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호는 수십 년 전부터 커티삭의 주인이었던 자신의 부하인 페릴 예노스보다 훨씬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호를 공격할 수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는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 폐하의 관심을 받고 있는 소환자였다. 그렇기에 명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가 마족을 배신할거라는 확실한 증거 말이다.

“초대장을 보낸다. 커티삭에서 파티를 열어라!”

볼 붸르니체스가 외쳤다.

그는 호가 꿍꿍이가 있는 녀석이라면 자신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생각 없는 녀석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게 오히려 볼 붸르니체스가 원하는 바였다. 만약 호가 자신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볼 붸르니체스는 소환자의 피로 점철된 성대한 축제를 열 생각이었다.

그리고 볼 붸르니체스는 호가 커티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호는 그의 예상을 깨고 커티삭을 방문했다. 또 다른 소환자와 마족의 영웅들 그리고 다른 종족은 한 명도 섞이지 않은 마족의 군사들만을 대동해서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어젯밤부터 페릴 예노스, 멜리아 비쉬 님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낸 모양입니다.”

호를 정탐한 부하의 보고에 거대한 미노타우르스, 볼 붸르니체스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쿠흐흥…….”

볼 붸르니체스의 코에서 혼란스러움이 가득 담긴 콧김이 흘러 나왔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그럼 슬슬 자야겠네.”

“지금 시간이면 일어나실 시간이 아니시던가요?”

“나같이 아름다운 서큐버스는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는 법이지.”

고전적인 페릴 예노스의 대답에 호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그녀가 사라지자 호의 옆에 있던 멜리아 비쉬가 매끄러운 팔로 호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요즘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사고요?”

멜리아 비쉬의 말에 호는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페릴 예노스와는 달리 그녀는 호감도 퀘스트까지 뜬 영웅이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환락가 건설을 위한 돈을 보냈던 탓에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단순히 안부를 물어볼 겸 꺼낸 이야기는 아니고, 그렇다고 볼 붸르니체스가 시킨 것도 아니다.’

마족도 감정이 있는 존재. 호는 그녀가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호의 얼굴에 웃음기가 잠깐 사라졌다가 생겨났다.

“최근 디르시나에서 큰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사고를 친 게 없습니다만?”

“아, 그건 들은 적이 있어. 엄청난 돈이 들어가고 있는 공사라며? 들리는 이야기로는 카르타시움 지역 전체의 특산품이 몰려들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요.”

“그런데 멜리아 비쉬 님.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꺼내신 거죠?”

호가 모르는 척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아…….”

자신과 호 밖에 없는 방이지만 눈동자를 움직여 주위를 살펴본 그녀가 호가 가까스로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볼 붸르니체스 각하의 행동이 심상치가 않아. 페릴 예노스 님도 그렇고. 느낌이 좋지 않은 게 곧 열릴 파티에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안 좋은 일이라면?”

“타종족의 군대를 양성하며 마족의 깃발을 더럽힌다는 너의 행동에 대해 심문성의 질문이 있을지도 몰라.”

“으음…….”

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볼 붸르니체스 각하의 독단적인 행동이 분명해. 하지만 커티삭에는 볼 붸르니체스 각하 이상의 힘을 지닌 마족이 없어.”

“…….”

“곧 그분의 뜻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말이지.”

말을 꺼내는 멜리아 비쉬의 눈 주변은 거뭇하게 꺼져 있었다. 이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꽤나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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