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리그너스 대륙전기 155
해머스와 디르시나는 토렘지라 불리는 가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거리는 약 사나흘 정도. 덕분에 호와 브로리 그리고 엘븐 템플러들은 자연스럽게 노숙을 해야만 했다. 여행자나 상단들이 쉴 수 있는 마을이 영지 중간 중간에 건설되어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영토에 살고 있는 인구도 부족했고 말이다.
“하지만 영지들이 S등급 이상으로 발전하면 그런 마을들도 생겨나겠지.”
여행의 피로로 인해 어젯밤에 바로 잠에 들었다가 끈적끈적한 느낌으로 인해 잠에서 깬 호가 자신의 코에 묻은 투명한 액체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100 살이나 넘은 녀석 주제에…….”
왜 브로리가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코를 핥아대는 이유도 말이다.
이미 잠은 다 깬 마당에 산책이나 가볍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이 어두컴컴한 것을 보니 아직 아침은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으으응.”
호가 천막 안에 설치된 침대에서 내려오자 브로리가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두꺼운 이불을 브로리의 목 끝까지 올려준 호는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일어…….”
“아, 됐다.”
막사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엘븐 템플러가 인사를 하려고 하자 호는 재빠르게 손을 들어 엘븐 템플러의 인사를 막았다. 이 새벽에 굳이 소리를 내 병사들의 잠을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
타닥거리는 불씨와 함께 오백의 엘븐 템플러들은 나뭇가지와 잎으로 만든 천막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몇몇은 피곤한 표정으로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그중에는 남성 엘븐 템플러도 여성 엘븐 템플러도 있었다.
“마족의 군대를 생각하면 정말 조용하네.”
커티삭에서 오크들의 군대를 이끌었을 때는 그들의 코고는 소리와 취익 거리는 큰 숨소리로 인해 잠을 설쳤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잠시 부대 주위를 걷던 호는 두 명의 여성 엘븐 템플러가 나무둥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리였다.
‘야식인가?’
뽀글이도 야심한 밤에 먹어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는 법. 음식의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호의 발걸음은 절로 그 둘을 향하고 있었다. 한 명의 엘븐 템플러는 작은 나뭇잎 모양의 틀에 무언가를 넣고 굽고 있었다. 얼핏 생김새가 붕어빵과 비슷했다. 나뭇잎으로 만들어졌으니 나뭇잎 빵이라고 해야 되나?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차를 끓이고 있었다. 얼핏 보면 간단한 티타임 자리를 마련하는 것 같았다.
“어, 어머?!”
“쉿!”
틀에서 빵을 꺼내던 한 엘븐 템플러가 갑작스레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호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차를 끓이고 있던 나머지 한 명도 마찬가지였다.
“야식?”
“아. 네, 네.”
호가 묻자 엘븐 템플러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을 굽기 위해 팬을 돌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손바닥 크기의 빵에는 새콤달콤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멀리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가까이 오니 그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들이 반쯤 먹은 것으로 생각되는 빵이 보였다. 재료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주황색이 나는 시럽이 안에 들어 있었다.
“우드라바라고 하는 간식이에요. 굉장히 맛있어요. 호 님.”
“우드라바?”
자연스럽게 엘븐 템플러가 건네주는 빵을 받아든 호는 멍하니 빵을 바라보았다. 생긴 것은 나뭇잎같이 생겼는데 이름은 정말 괴상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드라바. 전혀 연관성은 없어보였지만 번역하자면 나무애벌레라는 뜻이었다.
“드셔보세요. 맛있어요.”
두 여인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호는 어쩔 수 없이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름은 좀 껄끄러웠지만 붕어빵처럼 맛깔스럽게 불룩 솟아오른 빵의 모습과 달콤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 탓이었다.
“오?”
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의외로 맛이 상당히 뛰어났다. 우드라바는 마치 크로와상을 먹는 것처럼 겉은 살짝 바삭했지만, 속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거기에 입안으로 들어온 시럽은 달달함과 새콤함이 동시에 섞여 있어 빵과 함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빵집에서 판매해도 인기 상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맛이었다.
“정말 맛있는데?”
“맛도 있고 만드는 방법도 간단해서 엘프들에게 사랑을 받는 음식이랍니다. 여기 이 차도 드셔보세요.”
“이 차는 이름이 뭐지?”
라임향이 진하게 나는 차를 받아든 호가 물었다.
“저희들은 푸라고 불러요.”
“…….”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쨌든 방금 전에 잠에서 깬 까닭인지 허기가 밀려온 호는 두 엘프 여인이 만들어 주는 우드라바와 푸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간식 겸 식사를 하는 동안 대화도 함께했다. 주된 내용은 역시나 엘프들의 생활과 전쟁에 관해서였다.
“엘프들은 불을 사용하지 않지 않아? 빵을 구워먹는다니 조금 놀라운데?”
“어? 우리 엘프들도 불은 사용해요. 불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데요?”
“아, 먼 옛날 하이 엘프들은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해요.”
“전쟁요? 호 님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참전할 거예요. 무섭기는 하지만 제 친구들과 호 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돈이 필요해서 자원입대 했어요. 부모님이 몸이 편찮으시거든요. 엘븐 템플러로 복무하면 월급도 두둑하게 나오니까 계속해서 복무할 거예요.”
엘븐 템플러 들의 대화를 들으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병사들은 언제나 소모품이었다.
유저들은 마장기나 영웅들에만 신경을 썼지, 병사들에게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다른 특색이 별로 없었으니까. 프로그래밍 자체도 비슷했다. 게이머의 질문과 물음에 병사들은 한결같은 대답한 하곤 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존재들은 달랐다. 각자의 이유와 사정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만약 볼 붸르니체스가 이 땅을 점령한다면? 많은 수의 영지민들이 고통속에서 신음할 터였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껏 간식을 얻어먹고 막사로 돌아가면서 호는 주위의 엘븐 템플러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비슷한 사정을 가슴에 품고 있을 터였다.
“볼 붸르니체스를 물리쳐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네.”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 * *
“거기 목재 끌어 올려!”
“건물 무너진드아! 비켜!”
“안전제일! 안전제일! 오늘 하루도 사건 사고 없이 지나갑시다!”
디르시나에서는 상업 도시라는 특성에 맞춘 공사가 크게 진행 중이었다. 이미 제법 건물이 올라온 곳들도 있었다. 영지의 동, 서, 남, 북으로 초대형 시장이 들어섰으며 도시 곳곳에 세무서를 비롯한 관공서들의 건설도 시작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디르시나 연안에는 갤리온급 이상의 커다란 배가 접현할 수 있는 항구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해양석을 채취하기 위한 작업선들이 출항하는 부두와는 크기가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로우덴은 이제 막 건설에 들어간 항구의 공사가 끝나면 상선을 이끌고 디르시나를 찾아올 상단들이 더더욱 많아질 거라고 확신했다. 인간, 엘프, 마족, 수인과 경계를 맺고 있는 디르시나의 위치는 중계 무역으로는 나쁘지 않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상단들이 디르시나를 방문하게 되면 그들이 가져온 물건들로 인해 디르시나에서 거래되는 특산품들의 종류도 더더욱 다양해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경제 효과는 엄청날 터였다. 이미 디아린 상단이 가지고 오는 타 종족의 특산품들은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자금과 인력을 들인 공사가 진행 중인 디르시나는 곧 크게 발전될 도시의 모습처럼 보였다.
“지금부터가 중요해.”
하지만 호는 디르시나의 이 모습이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디르시나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주변 도시들의 발전이 필요했다. 거기에 대륙 각국의 특산품들을 가져올 수 있는 상단의 존재도 필수였다. 게다가 타 도시의 사람들이 쉽게 오갈 수 있는 안전한 루트와 편의시설들도 있어야 했다.
어찌되었든 이런 디르시나의 대공사가 주변 영주들에게 관심을 끈 것은 사실이었다.
호와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코르다의 영주 엘 샤난은 물론이고, 원인족의 영토인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를 다스리는 버독 그리고 블루 스케일의 군항인 카틀라스를 다스리는 백작 스퀴드 수운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에 대한 엘 샤난의 관심은 호의 아니 애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브로리의 사건을 포함해 호에게 명치 세 방을 얻어맞은 버독은 자신들에게서 탈취한 마장기를 판매한 대금으로 호가 대공사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에 뒷목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타레스! 당장 그 녀석의 모가지를!”
“아, 안됩니다! 버독 님! 사파리의 대회의에 참가하는 종족들이 저희를 탐탁지 않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 버독을 타레스를 열심히 뜯어 말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 역시 당장 소환자를 공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의 전투를 통해 다수의 마장기를 잃은 터라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사파리의 대회의에서는 고작 소환자에 불과한 녀석에게 여러 기의 마장기를 잃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원인족의 장로인 갈라고에게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디르시나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블루 스케일의 군항인 카틀라스의 백작, 스퀴드 수운다의 관심은 호기심에 가까웠다.
“대체 어디서 그런 큰돈이 흘러나온 거지?”
“얼마나 큰 공사가 진행되는 것이냐?”
“림드 산맥의 전력은?”
림드 산맥의 패자인 호가 삼 년 전, 여신 라헬로 인해 소환된 마족의 소환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호에 대한 정보는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이제까지 소환자에게 크게 관심을 가진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카틀라스 군항이 디르시나의 바로 위에 위치했던 터라 스퀴드 수운다는 디르시나와 호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었다.
“10억 리스 이상의 자금이 들어가는 대공사라고 합니다.”
“B등급 마장기 세 기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추가적인 마장기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올해만 수인 왕국과 세 번의 전쟁을 벌였고, 전부 승리로 끝냈다고 합니다. 들리는 이야기에는 전략과 전술의 귀재라는 평입니다.”
“수인 왕국의 상급 대장 중 하나인 사막의 꾀주머니 리셴르나가 윤호를 공격했다가 대패를 당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들어온 정보들은 스퀴드 수운다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 대단하군! 우리 쪽에도 여신 라헬이 소환한 소환자가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지만 스퀴드 수운다가 아는 그들은 이 세계의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래도 블루 스케일의 여왕인 셰이라 클리퍼드는 그들이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다는 이유를 들여 세 명의 소환자를 궁성 안에서 생활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스퀴드 수운다는 궁성에서 머물고 있는 소환자들이 마장기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도 전쟁터에서 병사 하나도 상대할 수 있는 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족의 소환자이자 림드 산맥의 패자인 호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