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리그너스 대륙전기 154
‘곤란한데…….’
혹시나 있을 볼 붸르니체스를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호가 생각한 방법은 바로 다른 종족과의 연합 전선이었다. 볼 붸르니체스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종족과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는 자신을 포함해 두 개의 공격루트를 막아내야 했다.
인간들은 논외로 쳤다. 디르시나 북쪽에 8왕국 중 하나인 블루 스케일이 자리를 잡고 있긴 하지만 블루 스케일은 수상 전력을 제외한 육상 전력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이 바로 엘프와 드워프였다.
하지만 림드 산맥의 패자라 해도 호는 달랑 한 개 영토만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드워프의 왕이나 엘프왕국의 여왕에게 직접 동맹이나 군사교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호가 한 일은 엘프 왕국의 영토 중 동남부를 맡고 있는 최고 결정권자이자 엘프 왕국의 장로 중 한명인 엘 로즐린과 드워프의 족장 중 한 명인 쿠퍼 쏘우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었다.
엘프 왕국이나 드워프 왕국 전체의 동맹까지는 필요 없었다. 당장 볼 붸르니체스의 야욕만 막을 수만 있으면 되었기에 내린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보낸 게 이주일 전. 엘 로즐린에게는 답장이 오지 않았지만 쿠퍼 쏘우에게는 답장이 온 것이다.
자신의 제안에 흥미롭다는 내용을 담아서 말이다. 브로리의 손에 있는 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탄 마장기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검은색에 어두운 밤나무색이 섞여 있었어. 인간처럼 이족 보행을 하는 마장기였는데 철퇴를 사용했지. 등급도 높아 보였네. B등급 마장기의 출력 이상의 힘을 보였어. 그때는 아마 A등급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아.”
“해임빌인가.”
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드워프의 족장 중 한 명인 그라면 적어도 A등급 마장기의 오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워프의 A등급 마장기 중에서는 해임빌이라는 이름의 마장기가 철퇴를 무기로 사용했다.
“그래도 내 골든 스테이트의 상대는 아니었지. 아쉽게도 마장기의 성능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오너의 실력이 떨어졌어.”
브로리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전투를 떠올리는 그녀의 표정에는 전사로써의 자랑스러움과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브로리의 이야기가 계속될 때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를 바라보는 호의 표정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아. 나한테 당하고 난 이후 분노에 찬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나는군. 술을 마셨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붉은 얼굴이었지.”
“뭐라고 했는데?”
“자신의 애기를 파괴한 나를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겠다고 했어. 뭐, 신경 쓸 말은 아니었지. 이제껏 나한테 그런 말을 했던 놈들을 줄로 세운다면 사열 종대로 사파리에 위치한 수인 왕국 병영의 운동장 열 바퀴는 족히 나올 테니까. 게다가 전사에게 그런 말은 실력을 인정해주는 영광스러운 칭찬이 아니던가?”
“……빌어먹을.”
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무용을 늘어놓던 브로리가 호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설마 드워프 아니 쿠퍼 쏘우와 무슨……?”
“사실 볼 붸르니체스를 막기 위한 동맹을 맺으려고 했어. 그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상대니까. 볼 베르니체스가 움직일 때 행동한다면 이미 늦을 테니까 미리 대비를 하려고 했지.”
“이거 그렇다면 내 존재가 걸릴지도 모르겠는데?”
브로리의 말에 호는 팔을 내저었다.
“괜찮아. 아니 괜찮을 거야. 어차피 과거의 일이고 지금의 넌 수인 왕국의 수인이 아니잖아? 쿠퍼 쏘우가 그렇게까지 속이 좁은 드워프는 아닐 거다.”
호가 확신하듯 말했다.
리셴르나와의 전쟁에서 용병으로 참여했던 브로리에 대한 원한보다는 자신과 함께 마족과 수인 왕국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동맹을 맺는 게 장기적으로 바라봤을 때 그에게는 훨씬 이득이었다.
게다가 호가 쿠퍼 쏘우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 중에는 볼 붸르니체스의 손에서 자신을 지켜준다면 마장기를 포함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그가 바리안스의 대지를 얻을 수 있게 도와준다고까지 적혀 있었다. 쿠퍼 쏘우가 동맹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틀 뒤 호에게 쿠퍼 쏘우가 보낸 또 다른 편지가 도착했다.
* * *
“…….”
갑작스레 쿠퍼 쏘우에게 날아온 편지를 읽어 본 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드워프가 꼬장꼬장한 종족이고 원한을 잊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볼 붸르니체스의 손에서 자신을 지켜주면 바리안스의 대지를 얻을 수 있게 모든 역량을 동원해 도와주겠다는 자신의 제안을 쿠퍼 쏘우가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작 자신의 마장기를 파괴했다는 브로리에 대한 원한 때문에 말이다.
“드워프와의 동맹은 물 건너갔나 보군.”
마침 집무실에서 뒹굴 거리던 브로리가 편지를 읽은 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우리 영토에 니가 있다는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동맹은커녕 군사를 일으킬 기세야.”
“리셴르나라면 충분히 쿠퍼 쏘우를 막아낼 수 있다.”
“그렇기야 하겠지. 하아아.”
호의 입에서 한숨이 길게 흘러 나왔다. 드워프 족과의 동맹을 통해 볼 붸르니체스를 견제하며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림드 산맥의 특성화를 끝내고 폭발적으로 전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리 볼 붸르니체스라도 쉽게 군사를 일으킬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받은 쿠퍼쏘우의 편지로 인해 그 계획은 물 건너 가 버렸다.
“미안하군.”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떠한 이유 때문에 벌어졌는지 알고 있는 브로리가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니가 잘못한 게 아니라 쿠퍼 쏘우라는 녀석의 소갈머리가 밴댕이같은 거니까.”
호는 팔을 내저었다. 드워프와 동맹을 맺지 못한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브로리를 탓해봤자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볼 붸르니체스의 동태는 어때?”
“아직까지는 큰 변화가 없다. 커티삭에 마장기 서너 대 가량이 추가적으로 수송되긴 했지만 그게 수인 왕국과 엘프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인지 아니면 직접적으로 우리를 노리고 오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
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렸다. 아직 킬리드의 순찰이 남아 있었지만 해머스가 안정되는 즉시 디르시나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현재 진행 중인 마장기 제작 관련 기술을 중단하고 대마장병 연구에 역량을 집중해야 했다.
‘그와 함께 훗사르의 연구도 끝내야 돼.’
호는 지금 당장 영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마장기의 제작 기술에 계속해서 힘을 쏟아봤자 볼 붸르니체스가 군사적인 행동을 보이기 전까지 단 한 기의 마장기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구도 제대로 끝내지 못 할 뿐더러 마장기의 제작에 필요한 시설들의 건설도 하지 못할 게 뻔해 보였다.
결국 정말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일반 병사들로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결국 볼 붸르니체스의 공격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마장기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바로 대마장병의 연구와 병사들의 랭크 업이었다.
디르시나의 도시 특성화를 조금 늦추고 로우덴을 비롯해 합계 능력치가 높은 녀석들을 연구실에 때려 박으면 어떻게든 길이 보일 터였다. 해머스에 주둔하고 있는 엘 카닐슨도 디르시나로 보낼 생각이었다.
아날치드라는 D등급 클래스였던 엘 카닐슨은 C등급으로 승급한 현재 워커라는 이름의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엘 카닐슨이 보유한 스킬은 ‘정말로 연구에 미쳐보자’라는 이름의 연구 개발 속도를 올려주는 스킬이었다. 원래 보유하고 있었던 ‘연구에 미치자’라는 스킬의 진화판이었다.
“그래. 공돌이를 갈면 기술이 생긴다.”
자신이 있었던 세계의 진리와도 같은 말을 떠올리며 호는 희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며칠 뒤, 림드 산맥의 몬스터 및 여러 위협들을 막아낼 수 있는 성벽의 건설과 마정석 생산 시설의 완벽한 복구 그리고 전투에서 희생된 영지민들의 보상 및 처리가 끝이 났다.
사드나인과 엘 라디아 그리고 새롭게 해머스에서 등용할 수 있었던 E등급 영웅 엘 스밸리까지.
세 명의 영웅들이 함께 했지만 영웅들의 능력이 높지 않았던 터라 호는 자신이 생각했던 최소한의 목표치까지 달성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해머스에서 보내야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볼 붸르니체스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런 볼 붸르니체스의 움직임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정확하게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리고 해머스를 폐허로 만들었던 오우거 칼타스는 현재 킬리드에 있었다.
“그 녀석이 킬리드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왔다. 그리고 킬리드의 영주가 편지를 하나 보냈더군.”
엘븐 템플러 오백과 함께 디르시나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호에게 브로리가 편지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그런 브로리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살짝살짝 비춰지고 있었다. 베코바와 마찬가지처럼 해머스에서도 꽤 시간을 보내며 영지민들과 정이 든 모양이었다.
“편지?”
호는 킬리드의 영주를 떠올리며 브로리가 건네 준 편지를 펼쳐 보았다.
현 킬리드의 영주는 엘 아르윈으로 오너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영혼에 새겨진 엘프 영웅이었다. 그리고 편지에는 영지의 건설에 크게 도움이 될 마족의 영웅을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놈이 조금 일을 잘하기는 했지. 아부도 잘 떨고.”
편지를 보는 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우거 칼타스. 해머스를 침입한 대가로 평생 강제노역행이 예정되어 있던 녀석이지만 타고난 아부와 뛰어남을 넘어서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노동 능력으로 분노에 가득 차 있던 해머스 주민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대단한 놈이었다.
거기에 어떻게 수인들을 구워삶았는지 사드나인과 브로리의 제안으로 인해 호는 며칠 전 칼타스에게 충성맹세를 받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호가 제대로 칼타스를 믿는 건 아니었다.
볼 붸르니체스가 개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자신의 영지인 해머스를 공격한 녀석이었다.
“킬리드에서도 성벽만 건설해야 할 거다.”
그런 그를 킬리드로 보내며 호는 엘 아르윈에게 칼타스에게 성벽만 건설하게 만들라는 명령도 덧붙였었다.
어차피 볼 붸르니체스의 침공을 대비해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도시인 킬리드의 방어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만큼 이번 칼타스의 이번 인사는 킬리드의 성벽 및 방어시설 건설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충성심은 알 수 없지만 오우거인 그의 노동력은 진짜배기였다. 그렇게 편지의 내용을 모두 읽은 호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렀다.
“병사들의 출발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멍멍!”
이어서 사드나인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멀리서 엘븐 템플러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해머스에서의 볼일도 끝난 마당에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짧지만은 않았던 영토 순찰을 마친 호와 브로리는 디르시나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