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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152화 (152/522)

# 152

리그너스 대륙전기 152

냉정하게 말해 그녀의 말대로 행동을 하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확실히 볼 붸르니체스에게 무릎을 굽히고 사정을 설명, 이해를 구하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림드 산맥의 패자라는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뭐, 그런 녀석들과 자네는 상황이 다르지. 자네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림드 산맥의 패자니까 말일세.’

호는 커티삭에서 만났던 볼 붸르니체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소환자들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미안함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아무 능력도 보이지 못하는 소환자는 당연히 죽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리그너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영웅들이 볼 붸르니체스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호는 이 세계의 영웅들에게 소환자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무하게 죽어나간 마족과 수인의 소환자들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 했던 경험이 없었더라면. 상대의 정보를 알아볼 수 있는 유저의 능력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많은 소환자들처럼 어디선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었을지도 몰랐다.

이 세계에 끌려온 영문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의 죽음에 아무런 느낌도 관심도 주지 않았을 게 눈에 훤히 그려졌다.

그 순간, 으득하고 이빨이 절로 깨물어졌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호는 소환자에 대해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는 볼 붸르니체스에 자신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표정을 보아하니 볼 붸르니체스, 그 마족과 전쟁을 벌일 생각인가?”

“……마음 같아서는 군사를 일으키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었다. 지금 당장 볼 붸르니체스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그런 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브로리가 뭐라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하지만 완전히 생각이 없는 건 아니야.”

“무슨 말이지?”

“칼타스라는 녀석이 실패한 이상 볼 붸르니체스 역시 내가 자신이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느꼈을 거야.”

호의 말에 브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볼 붸르니체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지켜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새끼.’

호는 눈을 부릅떴다. 앞으로 자신이 보이는 행동거지에 따라 볼 붸르니체스가 어떻게 나올지 눈에 훤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자신이 두려움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라는 것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내가 굽히고 들어간다 해서 그가 날 좋게 봐줄 것 같지는 않아. 내가 아는 볼 붸르니체스는 딱히 소환자를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거든. 오히려 이때를 기회로 삼아 림드 산맥에 세력을 뻗을게 분명해.”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방법을 찾아봐야지.”

대답과 함께 호는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열어 눈앞에 넓게 펼쳤다.

그와 함께 자신이 플레이했었던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경험을 떠올리며 지금의 상황에 대해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결책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칫. 인터넷만 할 수 있다면…….’

호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 나왔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유저들의 피와 땀이 녹아 있는 소중한 경험담이 섞인 조언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의 이 상황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가장 큰 위기나 다름없었다.

볼 붸르니체스가 작정하고 군사를 일으키면 자신은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종이를 무언가를 썼다가 구긴 후 던져 버린다. 그리고 다시 종이에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흠.”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벌이는 호의 모습에 브로리는 아무 말 없이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 호가 처한 상황이 꽤나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볼 붸르니체스라는 마족이 얼마나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살았던 수인 왕국을 빗대어 생각하면 십이멀이라 불리는 수인족의 상급대장 12인 정도의 세력을 지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인상을 가득 쓰며 한참동안이나 머리를 쥐어뜯던 호가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엘븐 템플러를 불러 편지를 건네주었고, 편지를 받은 엘븐 템플러는 재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무슨 편지지?”

“믿을 만한 구석은 아니지만 보험 좀 하나 들어놓으려고.”

“보험?”

처음 듣는 단어에 브로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또다시 편지를 작성하는 호의 행동에 그녀는 자세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 * *

“쿠워어어!”

오우거 칼타스의 고함 소리가 깊은 폐부에서부터 흘러 나왔다. 그런 칼타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그마한 몬스터들이 자신을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림드 산맥에서부터 태어나고 자란 오랜 세월동안 이토록 큰 절망에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취에엑! 췩! 커어엉!”

퍼억, 퍽 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백여 마리로 이루어진 부하들이 하나둘씩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나무뿌리나 돌멩이를 들고 반항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곧 몽둥이찜질을 당한 후 기절해야만 했다.

그리고 칼타스는 어느새 주위에 몰려든 엘븐 템플러들이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멀찍이 떨어진 남자를 바라보는 칼타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저 남자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이들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변변한 무기도 없는 몬스터 백 마리를 모아놓고 사방에서 엘븐 템플러로 포위를 해 몽둥이찜질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손속에 사정을 두는 모양이지 죽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과다출혈로 한두 마리씩 목숨을 잃는 녀석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행동이 한 번이었다면 혹은 두 번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어차피 이들이 자신을 그냥 풀어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정보를 알려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했다!”

“죽이지는 않잖아?”

멀찍이서 들려오는 오우거의 외침에 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꾸했다.

뭐, 동료와 친구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앙심을 품은 엘븐 템플러들의 고의성 가득한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칼을 들고 직접적으로 죽이지는 않았으니 자신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물론, 칼타스라 불리는 저 오우거가 분노의 외침을 내뱉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호는 오늘 아침부터 그에게 몬스터 백 마리씩을 준 후 계속해서 엘븐 템플러로 공격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해머스를 파괴한 몬스터들에게 그 분노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몬스터들을 괴롭히는 특이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A등급 클래스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의 전직 조건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어딜 가나 꼼수는 존재하게 마련이야.”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의 전직 조건에는 직접 부대를 지휘해서 100 번의 전투를 승리로 마쳐야 한다는 굉장히 까다로운 항목이 있었다. 제대로 이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장에서 산다고 해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자신들의 비상한 머리를 이용해 꼼수 아닌 꼼수를 만들었다. 바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전투라는 게 양측의 숫자가 각각 백 명이 넘는 순간 승, 패가 결정되어 집계 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아직 칼타스라는 녀석과 난 적대 관계라는 말이지.”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칼타스를 포함해 그들을 풀어주는 순간 자신은 언제든지 그와 승, 패를 가릴 수 있는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비록 아무 무기도 없이 맨 몸으로 딱 백 명만 보내놓고 그의 몇 배 이상이나 되는 엘븐 템플러로 하여금 후려패서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이게 먹힐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이 방법은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에 나와 있는 꼼수였다. 하지만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나 통할 법한 수단이지 솔직히 이 세계에서는 기대도 안 했던 방법이었다. 괜히 칼타스라는 녀석도 있다 싶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해 봤는데 대박 아닌 대박이 터져 버렸다.

“후우. 대체 이 쓸모없어 보이는 행동은 왜 하는 거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칼타스에게 다가가 주먹 한 방씩을 날리고 오던 브로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호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똑같은 명령만을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몬스터들을 향해 전의를 불태우던 엘븐 템플러들도 이제는 호를 향해 의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전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러나 호의 명령은 계속되었고, 칼타스를 비롯해 몬스터들의 수난은 몇 날 며칠이나 진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해머스에서 호가 해야 할 일은 칼타스를 괴롭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튼튼한 나무 성벽의 건설을 마쳤습니다.”

“호 님. 오늘부터 마정석 광산의 마정석 채취가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부하들을 통해 보고들이 밀려온다. 한 시간이 멀다하고 쌓이는 서류들로 인해 호는 영주성의 집무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을 대신해서 이 집무실에 로우덴이나 아스트리드 벨을 넣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디르시나에 있었다.

“후우.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한참 서류와 씨름을 하던 호는 굳은 어깨를 살짝살짝 풀며 달력을 바라봤다. 몬스터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호는 벌써 삼 주 째 해머스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마정석을 채굴하는 즉시 골든 크로우 소속 상단에게 연락을 하도록. 아마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야.”

호가 양손 가득 서류를 들고 오는 엘븐 템플러를 향해 한 장의 서류를 건네주며 명했다.

해머스를 침략한 몬스터 때문에 마정석 생산시설이 박살 났고, 그로 인해 골든 크로우와의 거래 또한 잠시간이지만 중단된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리고 호의 명령에 엘븐 템플러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호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엘븐 템플러가 서류를 챙기는 모습을 본 호가 물었다.

“브로리는 뭘 하고 있지?”

“아까 전까지는 엘븐 템플러들의 훈련에 열중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쿠워어어어어!

엘븐 템플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고막을 진동시키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아마 해머스에 살고 있는 영지민이라면 모두가 들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커다란 소리였다.

“……그렇군.”

엘븐 템플러의 보고가 끝나지 않았지만, 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굳이 브로리가 무엇을 하는지는 끝까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오우거 칼타스와 몬스터들을 괴롭히는 게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해머스를 침공했던 몬스터들의 수장, 오우거 칼타스. 현재 그 녀석과 그 휘하에 있던 몬스터들은 해머스 곳곳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해머스에 준 피해를 생각하면 평생 동안 부려먹어도 모자라다는 게 호의 생각이었다.

수많은 엘븐 템플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상 도망을 칠 수도 반항을 할 수도 없었다. 오우거 칼타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 엘븐 템플러들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울 수도 있겠지만, 해머스에는 가볍게 그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브로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칼타스가 반항을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꽤나 생존본능이 대단한 녀석이었지.”

호는 고개를 저으며 이제까지 자신이 본 칼타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쨌든 그 녀석은 해머스를 파괴한 원흉이긴 했지만 본의 아니게 자신에게 제법 많은 도움을 준 몬스터였다.

볼 붸르니체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줬으며 거대한 덩치와 강력한 힘 그리고 쉽게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해머스의 복구공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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