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리그너스 대륙전기 151
“운이 좋았어. 영토를 순찰 중이었거든.”
“여, 역시 영주님은 대단하십니다! 수하들을 생각하는 그 인자한 마음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 사드나인. 앞으로 더욱더 영주님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사드나인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사드나인이 나를 떠나거나 배신할 일은 없겠는데?’
어쨌든 호는 사드나인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몬스터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전투를 벌였으니 말이다.
사드나인뿐 아니라 부상으로 누워있다는 보고를 받은 엘 카닐슨과 엘 라디아에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능력치가 높은 영웅도 아닌 고작 D등급 영웅 세 명이서 몬스터들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냈다.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외성과 영주성 그리고 주위의 흔적을 둘러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네! 영주님! 멍멍!”
자신의 주군인 호와의 대화를 끝내고 정말로 자신들이 몬스터를 물리쳤다는 사실을 자각한 사드나인이 주위를 상황을 살필 때였다. 그의 눈에 수인 왕국의 B등급 마장기인 웨어 타이거가 들어왔다.
“웨어 타이거가 어째서 여기에? 아니, 웨어 타이거는 대부분 암갈색에 검은 줄무늬가 아니었던가?”
수인 왕국의 B급 마장기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도 신기할진데 눈앞의 웨어 타이거는 희한하게도 온몸이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색을 띄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유니크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브, 브로리?!”
그리고 잠시 후, 웨어 타이거의 조종석에서 나온 한 소녀를 발견한 사드나인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수인 왕국의 영웅들에게 안 좋은 의미로 엄청난 유명세를 떨쳤던 최강 로리 브로리였다.
* * *
“크르륵?”정신을 차린 오우거 칼타스의 커다란 눈이 눈앞의 인간에게로 향했다. 눈앞의 인간은 이십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는데,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이들의 대장인 것 같았다.
‘내가 살아 있나?’
황금색의 마장기가 자신을 후려친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아마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칼타스는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사적으로 안면 근육으로 항복을 외치던 게 어느 정도 도움이 먹힌 듯 보였다.
그래도 아직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수의 병사들이 자신을 포위하고 있었다.
칼타스의 눈이 느릿하게 하지만 지금 상황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 위해 신중하게 움직였다. 먼저 큼지막한 크기의 마장기들이 보였다. 다행히 마장기사들이 전부 마장기에서 내린 듯 보였기에 어떻게든 죽을힘을 다한다면 도망은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인간 남자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오우거. 어떻게 저 캐터펄트를 손에 넣었지?”
호는 몬스터들의 손에서 얻은 마족의 캐터펄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떻게 몬스터가 마족의 공성 병기를 손에 넣었는지 알아야만 했다. 이 정보는 자신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했다.
‘이게 배후가 있는 일이라면…….’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마족이 있느냐고 묻던 브로리가 말이 떠오르자 호는 얼굴을 굳혔다.
가볍게 넘어갈 사안이 아닌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전부 수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원래 호는 림드 산맥을 발전시키며 최소한 마장기의 생산 체계를 갖출 때까지 힘을 키울 생각이었다. 세력을 뻗는 것은 그 이후로도 충분했다.
마장기만 생산할 수 있다면 브로리와 한시진을 앞세워 소규모의 정복 전쟁은 어떻게든 해결이 되기 때문이었다.
현재 벌이고 있는 도시의 특성화 개발 또한 자신의 영토인 림드 산맥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계획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외부의 위협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모든 재화와 노동력을 도시 특성화에 투자하려는 만큼 외부에서 압박이 들어오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미 디르시나에서는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된 이상 물릴 수도 없었다.
‘당장이야 마장기를 판매한 대금으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게다가 아직 라홀로프 상단에 노예 대금으로 건네줘야 할 돈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우거는 호의 질문에 눈알만 굴릴 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는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오우거. 저 캐터펄트를 어떻게 손에 넣었지?”
“……크르륵.”
호의 두 번째 물음에도 칼타스는 침묵을 유지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기절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칼타스는 자신을 찾아온 거대한 덩치의 마족에게 속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 거대한 덩치의 마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짜증이 가득한 소녀의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아, 저 개새끼.”
그 순간 호는 옆에 서 있던 사드나인이 몸을 움찔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저 입가심도 안 될 것 같은 꼬마 애는?’
그리고 갑자기 자신의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조그마한 혼혈 소녀를 보며 칼타스는 코에서 뜨거운 바람을 내뱉었다. 얼굴 가득 인상을 잔뜩 소녀의 모습이 무섭기는커녕 어이조차 없었다. 소녀가 살짝 주먹을 말아 올리는 모습에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저 캐터펄트 어디서 손에 넣었냐고 묻잖아?”
“…….”
“대답 안할래? 아,저놈. 또 내 말을 무시하네?”
‘어……?!’
어디선가 듣던 멘트. 불안한 느낌이 퍼뜩 칼타스의 머리로 파고들었다.
콰아앙!
그리고 이어진 소리는 소녀의 주먹과 오우거의 얼굴이 부딪쳐서 난 소리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아니 상당한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꿀밤을 먹이듯 허공으로 뛰어오른 브로리가 오우거의 머리에 자신의 주먹을 내리치듯 휘둘렀고, 오우거의 얼굴이 땅에 박히며 조그마한 크레이터를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
그리고 사드나인과 함께 석상이라도 된 듯 자리에서 굳어버린 호는 매캐하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자 몸을 꿈틀거리는 오우거의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브로리. 저 녀석한테는 얻어야 할 정보가 많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나도 안다. 하지만 눈알을 굴리며 대답을 피하는 녀석의 입을 열기에는 폭력만큼 좋은 방법이 없지.”
“…….”
“그것이 내가 백여 년을 살면서 배운 진리다.”
뭐,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호는 브로리를 향해 어깨를 살짝 으쓱여보였다. 어차피 방금 전 그녀의 행동을 탓할 생각도 없었다.
브로리가 자신의 목을 좌우로 살짝 움직이며 쓰러진 오우거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머리가 땅 속에 박힌 채 몸을 꿈틀거리는 오우거의 몸을 발로 밀었다. 살기가 가득 섞인 말을 내뱉으면서 말이다.
“오 초 안에 일어나지 않으면 팔을 하나 잡아 뜯어버린다.”
브로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터에 바람이 불었다. 실시간으로 얼굴에 멍이 들기 시작하는 오우거가 거친 숨을 내쉬며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왠지 자신들이 나쁜 놈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는 조폭 같았다.
그래도 브로리 덕분에 호는 자신의 이름을 칼타스라고 밝힌 오우거의 입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우거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들은 호는 가슴이 돌을 얹은 듯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볼 붸르니체스.”
칼타스의 말에 따르면 림드 산맥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자신에게 찾아온 마족이 있다고 했다. 거대한 덩치와 커다란 뿔을 지닌 미노타우르스였다.
그리고 오우거를 압도할 수 있는 미노타우르스 영웅은 호가 알기론 그 밖에 없었다.
심연의 미노타우르스라 불리는 최상급의 마족이자 S등급의 영웅. 동부의 마족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는 마족이었다.
“어째서 그가……?”
솔직히 말해서 호는 볼 붸르니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도와준 것은 굉장히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소환자를 벌레처럼 여겼다.
자신 역시 그 벌레가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볼 붸르니체스와 대립을 하고 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일단 접점 자체가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을 만한 일이 없는 것이다.
‘설마?’
호는 문득 커티삭에서 볼 붸르니체스를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이 마족이 아닌 엘프의 보병인 엘븐 템플러를 주력 부대로 삼는 것에 상당한 불쾌감을 드러냈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예 실리스들이 없었더라면 마족을 배신했다고 여겼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분명 그때부터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을 안 좋게 생각하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으으음.”
집무실의 책상 위에 반쯤 몸을 걸터앉은 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볼 붸르니체스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은 그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호가 지배하고 있는 림드 산맥의 도시들이 마족의 영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다는 것에도 의구심을 드러냈었다.
게다가 아멘드마와 코르다를 정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교류를 했던 것이…….
“의심을 산 모양인 것 같은데.”
호는 입술을 삐죽였다. 지금의 자신은 마족의 깃발을 달고 있는 어중이떠중이 소환자가 아닌 림드 산맥의 패자였다. 최상급이나 상급 마족 정도는 아니더라도 중급 마족 정도의 작위와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마장기도 네 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마족보다도 엘프 왕국의 엘프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니 볼 붸르니체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눈에 뻔히 그려졌다.
“빌어먹을.”
억울한 면이 없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호 역시 코르다와 아멘드마를 정복하고 싶었다. 내친김에 엘프들의 최전방 요새인 토갈론 요새까지 차지하면 림드 산맥과 함께 붉은 핏빛의 대지에도 세력을 뻗칠 수 있었다.
하지만 크라솔라이트의 꿈이라는 SS급의 퀘스트가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고 퀘스트를 무시하기에는 그 여파로 자신에게 찾아올 드래곤의 분노가 무서웠다. 자신들도 꽤 성장했고, 브로리까지 합류했지만 아직 드래곤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문제는 이게 쉐르난비체가 내린 명령인지 볼 붸르니체스의 단독 행동인지가 걸리는데.”
호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쉐르난비체의 명령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가 직접 움직였다면 림드 산맥의 오우거를 이용한 치졸한 방법은 쓰지 않았을 터였다.
“직접 아멘드마와 코르다를 짓밟고 림드 산맥을 공격해 내 목을 베었겠지.”
어찌되었든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볼 붸르니체스를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볼 붸르니체스는커녕 그가 보유한 군단 하나도 당해내기가 힘들었다. 브로리, 한시진 등 뛰어난 실력을 지닌 동료들이 함께 한다고는 하지만 전쟁은 그녀들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듣자하니 꽤나 고위급의 마족이 얽힌 것 같군. 어떻게 할 셈이지?”
어느새 집무실로 들어온 브로리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어째서 볼 붸르니체스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면 그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하면 되겠군.”
브로리의 말에 호가 움직임을 멈췄다. 호의 눈동자가 마치 집어삼킬 듯 브로리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