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리그너스 대륙전기 144
“리아 캬베데 언니가 그래써오. 호 님의 말을 듣지 아느면 오크들이 때린다고 해써오.”
“아아…….”
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째서 리젤에게 오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나 싶었더니 리아 캬베데가 뭔가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심히 궁금해졌다. 만약 리아 캬베데가 에스트라다에 있었으면 진지하게 일대일 면담을 했을 것 같았다.
“아무 불이익도 주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 눈물 좀 그치라고.”
“냥. 저, 정말인가오?”
“그래.”
“리젤 울지 아나써오.”
그렇게 가까스로 리젤을 진정시킨 호는 천천히 그녀의 정보창을 열기 시작했다. 주문술사라고 전직한 것 까지는 확인했지만 세부적인 능력치는 살펴보지 못했다.
<영웅 정보(Status)>
1. 이름 : 리젤 칼리노
2. 성별 : 여(78)
3. 종족 : 묘인족
4. 소속 : 마족
5. 레벨 : 83
6. 직업 : 주문술사(C)
7. 세부능력
통솔 : 42 / 50(D)
무력 : 37 / 50(D)
지력 : 170 / 200(B)
정치 : 121 / 200(B)
매력 : 72 / 100(C)
8. 특성 : 침착한 캐스팅, 고도의 집중, 자연의 씨앗.
9. 스킬 :
<강인한 집중>(A)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나 주술사를 비롯한 클래스들을 지닌 존재들은 주문을 외우는 시간 동안 다양한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주문의 집중이 깨져 피해를 입는 경우가 빈번하죠. 강인한 집중은 그런 외부의 위험에 정신이 빼앗기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효과 : 외부의 충격을 받아도 무조건적으로 주문이 성공합니다.
가장 먼저 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자릿수의 세부 수치들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실망감이 들지는 않았다. 한시진, 브로리 발란스와 같은 높은 수치를 보유한 화려한 능력치는 아니었지만 리젤이 C등급 영웅, 그것도 갓 C등급으로 오른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나쁜 수치도 아니었다. 특히나 레벨이 83 까지 뻥튀기가 되어 있었다.
또한 주문술사라는 클래스답게 지력 능력이 꽤 높았다. 게다가 아무리 레어 클래스라고 해도 C등급에 어울리지 않는 A등급 스킬인 강인한 집중도 역시 상황에 따라 굉장히 좋은 효과를 나타낼 것 같았다.
“꽤 괜찮은데?”
“헤헤. 리젤 성장해써오. 호 님 덕분이에오. 리젤 호 님 조아오.”
가르릉 거리며 머리를 들이미는 모습에 호는 미소와 함께 리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묘인 특유의 부드러운 털의 촉감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종족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수인들은 행동이 꽤나 귀여운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리젤을 C등급으로 승급시키는 데 성공한 호는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열어 리젤을 B등급으로 승급시키는 데 필요한 아이템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묘인족이라 그런지 리젤을 B등급으로 승급시키는 데 필요한 아이템에는 개다래나무가 다시 한 번 포함되어 있었다.
혹시나 싶어 A등급의 승급에 필요한 재료를 찾아보니 역시나 개다래나무가 존재했다.
다만 일반 개다래나무가 아닌 고급스러운 개다래나무라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근시일내에 리젤을 승급 시킬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는 디아린에게 부탁하면 되겠지만…….”
리젤의 B등급 승급에 필요한 여섯 개의 아이템 중 하나는 디아린에게 부탁해도 구하기 힘든 물품이었다. ‘심연의 뼛조각’이라는 아이템으로 이는 언데드가 등장하는 던전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 * *
C등급으로 성장한 리젤은 에스트라다의 영주 대리로 제법 영지를 잘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그래봤자 에스트라다가 하는 일이라곤 방어와 관련된 군사 시설 건설과 특산품인 한혈마 생산에 필요한 건물들의 공사였다.
“이런 속도로 건설이 진행되면 내년에는 한혈마의 종마들이 초원을 뛰놀 수 있을 겁니다. 무우!”
미노타우르스와 흡사하게 생긴 소 한 마리가 커다란 눈망울을 뽐내며 말했다.
수인 왕국을 이루는 부족 중 하나인 우인족으로 모 게임의 어떤 종족처럼 대지모신의 가호를 비네라고 말할 것 같은 생김새였지만, 이 세계에서 그들이 믿는 신은 대지모 신이 아닌 에쿠스르라는 존재라고 했다.
“내년이라.”
목장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공터를 바라보며 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수인족의 S랭크 기병인 훗사르의 연구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호는 그나이 칼츠만과의 계약을 떠올렸다. 늦어도 내년이면 훗사르를 양성해 골든 크로우로 보내야만 했다.
‘지금쯤 골든 크로우는 꽤 바쁜 상태겠지.’
이레네 아르티아나 그나이 칼츠만과 같은 골든 크로우의 영웅들은 아이리스 성국에서부터 시작되는 라헬교의 준동이라는 인간 종족의 세력을 뒤흔드는 커다란 이벤트를 막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나이 칼츠만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연구 협약에 관한 마장기 관련 기술을 보내왔다.
덕분에 마장기 제작 관련 기술 목록의 꽤 많은 부분에 개발을 완료했다는 것을 알리는 녹색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물론 호도 매달마다 빠짐없이 새롭게 양성한 엘븐 템플러들을 블루 스케일로 보냈고 말이다.
“좋아. 그럼 움직여 볼까.”
호가 박수를 짝짝 치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에스트라다의 특산품인 한혈마를 빠르게 생산하려면 그 제반조건들을 완성시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젤을 도와줘야 할 인재가 필요했다.
브로리 발란스나 신윤아가 있기는 하지만 리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둘은 영지의 내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신윤아는 꽤나 관심을 보이고 있는 모양새로 보였지만 능력이 부족했다.
“저 쪽에 삼거리에 가면 꺽쇠라는 우인이 있습니다. 힘이 굉장히 세고 끈기가 있어 일을 잘한다고 들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영주님에게 세계수의 축복을.”
“영주님, 영주님. 저기 있는 흰 소와 검은색 소 중 누가 더 일을 잘 할 것 같아요?”
“어머. 전 싸움에는 재능이 없어요.”
호는 에스트라다로 온 이유 중 하나였던 새로운 인재를 찾기 위해 성내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소문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점에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에스트라다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나크 평원의 영지를 지배하는 수인족의 대장들이 몇몇 상단을 제외한 에스트라다로 향하는 모든 이동을 금지했기에 새로운 모험가나 인물들을 보지 못한지 꽤 되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군.”
그런 주점 주인의 말에 호는 직접 성내를 순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떤 인재가 영웅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너무나도 쉬웠다. 플레이어의 능력을 통해 상대의 레벨이나 클래스 등급을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에스트라다의 인구는 5만여 명. 적은 숫자는 아니었기에 그래도 호는 어느 정도 쓸 만한 녀석들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영지의 순찰을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고, 아니야. 패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호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영지민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소문도 듣고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존재를 찾기도 했지만 모두 꽝이었다. 그나마 웃소라는 특이한 이름을 지닌 우인 영웅 아니 소 인간 한 마리를 등용한 게 전부였다. 그리고 웃소는 E등급도 아닌 F등급의 영웅에 불과했다.
“제 근육의 마블링이 화려하게 피어날 때까지 영주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음머어!”
“…….”
킁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두 개의 콧구멍에서 나오는 김을 보며 호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F등급의 영웅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어차피 리그너스 대륙의 영웅은 아이템만 있으면 진화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리젤의 말에 의하면 브로리는 한 번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면 일주일가량 성을 비운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귀환의 시기는 이틀 뒤. 그동안 호는 에스트라다를 순찰하며 새로운 영웅들의 등용에 힘을 썼다.
하지만 브로리가 도착할 동안 호가 등용한 인재는 순수한 큼지막한 눈동자가 매력적인 F등급 영웅인 웃소 하나뿐이었다.
“호? 여기는 어쩐 일이더냐?”
“어?”
뭔가 달라진 것 같은 브로리의 말투에 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찬찬히 그녀를 훑어보았다. 호가 알기로 브로리는 정에 굶주린 지능연령이 조금 떨어져 보이는 존재였다. 그런 호의 시선을 느낀 브로리가 피식 웃고는 호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빼내며 말했다.
“디르시나에 있었던 일은 연기였느리라. 아아, 생각해 보니 이거 미안하군. 나 때문에 그대의 여자들에게 오해를 푸느라 꽤나 고생했었지.”
“…….”
브로리의 말에 호는 놀란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한시현보다도 작아 보이는 인간 소녀가 즐거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어찌되었든 그대가 에스트라다에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나.”
말을 마친 브로리가 자신의 손뼉을 가볍게 두 번 쳤다. 그러자 시녀가 컵에 담긴 우유와 바나나와 비슷하게 생긴 아니, 어딜 봐도 바나나로 보이는 노란색의 과일을 몇 개 가져왔다.
그리고 잠시 후 신윤아가 모습을 드러냈고, 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사랑을 받지 못한 혼혈이라는 존재로 안쓰럽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사실이다. 난 아직 사랑이 필요한 존재니까. 후후. 그런 의미에서 자네의 영지는 굉장히 마음에 든다. 자네라는 존재도 그렇고.”
바나나로 보이는 길게 생긴 과일의 껍질을 까면서 브로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 옆으로 신윤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젓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어지간히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리젤의 말에 의하면 최근 출병이 잦다고 들었어.”
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브로리를 향해 말했다. 그녀의 행동변화에 꽤 놀라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수인족의 도발인가?”
“아니. 단순히 던전 토벌을 했을 뿐이야. 이 몸이 한 짓이 있어서인지 나크 평원에 있는 녀석들은 에스트라다를 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하더군. 뭐, 그런 이유 때문에 나크 평원에서 림드 산맥으로 향하는 모든 수단을 금지시킨 것 같지만.”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우덴의 말에 의하면 브로리는 혼혈이라는 차별을 자신의 무력으로 이겨냈다고 했다.
그런 브로리의 무력 행동에 당한 녀석들이 꽤나 있을 터. 아마 나크 평원의 수인족들은 브로리에게 겁을 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잘됐군.’
브로리가 계속해서 에스트라다의 성주로 있다면 나크 평원의 수인들은 쉽사리 도발을 하지 못할 터였다. 그 말은 즉, 림드 산맥의 영지 특성화를 진행하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최근 꽤 재미있는 일은 벌인다고 하던데? 콜스타인의 드워프들이 좋아할 만한 대공사라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흐음, 그래?”
브로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정말로 에스트라다는 무슨 일로 온 거지? 디르시나에서 큰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말대로라면 성주인 그대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현재는 한시진이 나대신 영주 대리로 있어.”
“아하. 키마라이의 주인이었던 소환자 말이로군. 제법 뛰어난 검사였지.”
어느새 과일 한 개를 해치운 브로리가 다시 바나나와 비슷한 생김새를 한 과일의 껍질을 까는 모습을 보며 호가 말했다.
“한 제국의 친위기사단장 쯤 되었던 인물이니까.”
“그 정도의 실력자로는 보이지 않던데?”
브로리가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모습에 호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브로리의 저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시진이 자신의 동료들 중 손꼽이는 실력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이 리그너스 대륙에는 한시진 같은 실력자는 차고 넘쳤다.
“소환자니까. 여신 라헬 때문에 영문도 모르게 이 세계에 넘어오며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소환자들은 처음 이 세계에 도착하면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어. 게다가 이 대륙은 우리들이 살던 세계와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라고.”
“흐음.”
“하지만 시간이 지난다면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레벨을 상승시키고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만 되면…….”
“아아.”
브로리가 손짓으로 호의 말을 끊었다. 빠른 속도로 입을 열던 호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얼굴이 살짝 화끈 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모양이었다. 호의 그런 모습을 보던 브로리의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대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한시진이라는 여자가 굉장히 부럽게 느껴지는군. 그녀는 그대에게 사랑받는 존재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소중한 존재지.”
“그리고 나는 뭐, 소환자를 무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브로리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아 있던 신윤아를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브로리의 행동에 신윤아가 흠칫 몸을 떨더니 브로리와 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대와는 달리 이 여자는 이 세계의 평범한 주민보다 못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더군.”
“아니, 제가 정상이라고요…….”
기어들어가는 윤아의 목소리에 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인간이 악마와 몬스터가 등장하는 판타지 세계에 떨어졌을 때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윤아는 꽤나 대단한 여자애였다.
“하지만 그대의 말대로 소환자는 굉장히 빨리 성장하더구나. 몇 번 억지로 전투를 내보냈더니 이제는 어느 정도 제 몫을 하더군.”
“컥! 쿨럭!”
말과 함께 브로리는 그녀가 자랑스러운지 팡팡 윤아의 등을 쳤다.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니 꽤나 아픈 모양이었다. 괜히 그녀를 브로리와 함께 에스트라다로 보낸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호는 윤아의 정보창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