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리그너스 대륙전기 142
“케이든 크로스 양!”
날카로운 목소리가 거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한 엘프 여성이 화가 난 표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케이든 크로스가 칫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의 자리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하이 엘프라 불리는 에어리스였다.
“괜찮으세요. 영주님?”
케이든 크로스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호는 방금 전까지의 부드러웠던 감촉을 느끼며 자신의 팔을 살짝 돌리고는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 몇 번이나 말씀 드렸는데. 편하게 말해주세요. 영주님.”
“노, 노력하겠습니다.”
손가락을 마주치며 얼굴을 붉히는 에어리스의 말에 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맘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머리와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이 엘프인 에어리스의 나이는 무려 2214 세. 자신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나이였다. 로우덴의 말에 의하면 하이 엘프의 수명은 대략 만 살 정도로 드래곤과 비슷하다고 했다.
“허허. 정말 보기 좋구만.”
“역시 영주님. 인기가 굉장하셔.”
아까 전에는 섹시한 다크 엘프가 그리고 이번에는 눈이 빛날 정도로 청순하고 아름답게 생긴 하이 엘프가 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영지민들이 한 마디씩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에어리스의 귀가 쫑긋 움직였고, 더더욱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 영웅들에게 인기가 넘치는 호의 행복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병사들이 돌아옵니다!”
병사의 목소리와 함께 멀리서 마장기 한 대와 오와 열을 이룬 병사들이 디르시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림드 산맥에 존재하는 던전 토벌을 마친 디르시나의 안주인 한시진의 귀환이었다.
“다녀왔어요.”
회의실에서 호를 향해 한시진이 말했다. 그녀는 흰색의 셔츠에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띄는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금색의 천이 제복의 끝자락에 덧대어져 있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조롭지도 않다는 느낌도 주고 있었다.
천이 얇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몸매를 부각시켜주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그와 함께 옆구리에는 예전 호가 주었던 우스바 에스테리온이 매어져 있었다. 검을 고정시키는 혁대가 가죽의 살이 보일 정도로 헤진 것에 반해 광이 날 정도로 반짝이는 검 손잡이의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검을 소중히 다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고생했어. 시진아.”
“헤헤.”
호의 대답에 한시진은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공적인 던전 토벌의 귀환을 축하하는 영주성의 회의실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네요? 새롭게 등용한 영웅들인가 보죠?”
한시진은 그렇게 말하며 회의실의 종족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던 중 헥헥거리며 눈웃음을 짓고 있는 로우덴과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레 손을 들어 주기도 했다. 로우덴의 옆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견인이 한 마리 더 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상당히 거칠었다.
“응? 응. 디르시나의 발전에 도움을 주실 분들이지.”
호의 대답을 들으며 한시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새롭게 자신들과 함께하기로 한 수인 영웅으로 보였다.
자신이 없던 동안 디르시나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특성화 개발의 일환으로 디르시나에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지 전체가 공사판이 된 모습은 그녀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얼굴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엘프와 다크 엘프도 있었는데 이 대륙에서 대표적인 미의 종족이라는 말처럼 그녀들은 남자라면 본능적으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엄청난 미인이었다.
‘불공평한 세계라니까, 정말.’
보기만 해도 질투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들을 보며 한시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만약 엘프나 다크엘프와 같은 종족이 자신이 살던 세계에 살고 있었다면 인간 여성들은 결혼은커녕 연애를 하는 것도 힘들었을 터였다. 그야말로 외모만능주의가 극에 달했을 게 분명했다.
“언니, 언니.”
호가 이번 던전 토벌에 대한 내용이 담긴 서류를 살펴보는 동안 조그맣게 자신을 부르며 대놓고 반가운 표정을 짓는 동생을 향해 가볍게 윙크를 해준 한시진은 다시금 새로운 얼굴인 다크엘프와 엘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애인이자 림드 산맥의 패자인 호가 그녀들을 동료로 만든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리아 캬베데나 브로리 발란스처럼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에 도움이 될 사람들일 게 분명했다.
“생각보다 엘븐 템플러의 피해가 별로 없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시진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호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일개 회사원이라고 말했지만, 한시진이 봤을 때 호는 결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평범했다면 이 세계에서 이제까지 살아남았을 리도 없었고, 림드 산맥의 패자가 될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한시진의 시선을 느끼며 호는 그녀의 정보창을 열었다. 이번 원정에서 얼마만큼의 성장을 거뒀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한시진
2. 성별 : 여(25)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216
6. 직업 : 인피니티 소드(A)
7. 세부능력
통솔 : 370 / 500(S)
무력 : 511(+68) / 750(+68)(SS)
지력 : 194 / 300(A)
정치 : 162 / 200(B)
매력 : 181 / 200(B)
카리스마 : 430 / 500(S)
8. 특성 : 화랑의 정신, 강행군, 마나의 기운, 화랑의 검술, 검의 달인
9. 스킬
<임전무퇴> S랭크.
전쟁터에 나가서는 결코 물러서지 말고 용감히 싸우라는 화랑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효과 :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대가 물러서지 않으며 피해를 입더라도 병사 수에 따른 부대의 공격력 및 방어력의 패널티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휘하는 부대는 패닉 상태 및 어떠한 해로운 효과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전투 중 병사 수가 10%씩 감소할 때마다 부대의 공격력, 방어력이 10%씩 증가합니다.
<몰아치는 폭풍> A랭크.
윈드 레이지는 맹렬한 바람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날카로운 검으로 모든 적들을 베어버립니다.
-효과 : 5 분간 자신의 무력 수치가 20%상승합니다.
<검의 길> SS랭크.
검술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낸 인피니티 소드는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검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어 내어 압도적인 전투를 벌입니다.
-효과 : 하루 한 번에 한 해 5 분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의 방어력을 무시하는 공격을 가합니다.
그리고 한시진의 정보를 살펴 본 호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었다.
최연소로 대한제국이라는 한 나라의 최정예 부대를 이끌던 군인답게 그녀가 전투적인 면에서 상당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는 건 호도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전투와 관련된 그녀의 재능은 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모양이었다. 눈앞의 소녀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A등급 클래스, 그것도 특수 클래스인 인피니티 소드의 전직에 성공해 있었다.
“아, 그리고 오빠. 저 전직했어요.”
“방금 확인했어.”
“네, 오빠가 말해준 대로 인피니티 소드로 전직했어요.”
자신을 향해 활짝 웃는 시진을 보며 호는 목구멍으로 침이 살짝 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는 언제나 다른 소환자들보다 자신이 앞서 있다고 생각했었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경험과 공략본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비록 자신의 조언이 있다고는 하지만 한시진은 자신보다도 먼저 A등급 클래스를 획득했다.
“정말 대단하네. 진짜 대단해.”
“오빠를 위해서 열심히 했어요.”
그러나 호는 시진을 향해 질투심이 든다거나 시기하는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다.
자신은 림드 산맥의 패자였고,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애인이었다. 만약 시진이 자신과 별다른 연관이 없는 소환자에 불과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는 정말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인이었다. 만약 소환자들 사이에서 주인공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녀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한시진도 A등급 클래스를 얻은 만큼 자신 역시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의 전직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 * *
새로운 영웅들이 늘어나고 던전 토벌에 나섰던 한시진이 병사들과 함께 디르시나에 합류했다.
덕분에 호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디르시나 대공사가 시작된 최근 몇 주 사이에 급격히 피곤했던 그였다. 심지어 브로리 발란스가 이끌던 군대와 전쟁을 치렀을 때도 이렇게까지 힘든 것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건설에 참여하는 영웅들이 늘어서일까?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끊임없이 일어나던 사건 사고가 크게 줄어들었다.
하루의 일과처럼 여전히 사고가 터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붕괴사고처럼 큰 사고는 아니었다. 덕분에 호는 디르시나에서 벌어지는 공사 현장 중 한 곳을 지휘하던 리아 캬베데를 다시 마법 연구소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캬아앙! 다, 다시 서류만 봐야 하다니! 저도 햇볕을 쐬고 싶어요! 냥!”
호의 명령에 리아 캬베데는 애처롭게 울부짖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골든 크로우와 마장기 관련 기술에 관한 연구 협약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연구에 관한 개발에 손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망치! 못 가져와! 아니, 내가 직접 움직인다!”
리아 캬베데가 마법 연구소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탓일까? 드워프인 존스 홉킨스의 움직임이 굉장히 성실해졌고, 빨라졌다.
“존스 홉킨스씨.”
“히이잌! 연구소만은! 네?”
“안전제일. 아시죠?”
“무, 물론입니다. 드워프들은 다들 안전을 좋아합니다. 하! 하하! 하하하하! 안.전.제.일! 아자! 아자! 아자!”
자신과 마주칠 때마다 큼지막한 땀이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존스 홉킨스의 모습에 호는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어지간히 마법 연구소로 돌아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트러블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하루에 한 건 이상의 사고가 벌어졌고 인명 피해가 생길 때도 있었다. 게다가 다크 엘프 영웅인 케이든 크로스를 마지막으로 새로운 영웅도 찾아내지 못했다.
라홀로프 상단이 보내온 노예 쪽은 하이 엘프인 에어리스밖에 쓸 만한 인물이 없었다.
행여나 자신이 찾지 못한 인재가 있을까 싶어 도시를 순찰하며 만나는 노예들마다 정보창을 열어 보았지만 전부 일반인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보름 뒤, 첫 상행을 나섰던 디아린이 디르시나에 도착했다. 예상보다도 도착이 일주일 정도 늦은 상행이었다.
“전쟁?”
호가 디아린을 향해 깜작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라기보다는 아, 인간들의 기준으로는 산적이 날 뛰는 것과 비슷해요.”
“그래서 림드 산맥 너머의 엘프 영지들이 지금 오우거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거야?”
“네. 오우거 뿐 아니라 수많은 중, 소형 몬스터들도 합세하는 바람에 마장기까지 투입되었다고 해요.”
레드 벨벳, 아니 디아린의 보고를 듣던 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디아린 상단이 예상보다 일주일가량이나 도착이 늦었던 이유는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림드 산맥을 넓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유인 즉, 림드 산맥으로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통행로인 토갈론의 요새가 붉은 핏빛의 대지로 향하는 상단의 통행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몬스터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