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리그너스 대륙전기 141
“우리가 찾던 그런 인물인가?”
“네, 그렇습니다. 아니, 그럴 것 같습니다. 멍멍.”
왠지 느낌이 좋다는 생각에 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S등급의 영웅인 로우덴의 말이었다. 지력도 높은 만큼 어느 정도 눈썰미도 있을 테니 발견한 인재 또한 평범한 녀석은 아닐 것 같았다.
아니, 평범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는 공략본이 있었고, 공략본에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모든 영웅들의 직업 등급을 상승시킬 수 있는 아이템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어디 있지?”
호의 말에 로우덴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문 쪽에서 엘븐 템플러와 함께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흰 피부와 뾰족한 귀, 엘프였다.
노예로서 꽤나 심한 고초를 당했는지 온몸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연녹색의 눈동자만은 선명했다.
‘아니, 엘프가 아닌가?’
그런 엘프 여성을 자세히 바라보던 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외모는 엘프인데 뭔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호는 이마를 찌푸렸다. 자신의 감각은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상한 점이 무언지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로우덴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어리스양입니다. 멍.”
“에어리스?”
“네, 그렇습니다. 멍. 사실 그녀를 만난 것은 천운이었습니다. 아주 운이 좋았죠. 멍멍. 역시 영주님은 정말로 대륙의 영웅이 되실 분입니다. 멍멍.”
황금 놀 족인 A등급 영웅, 컹컹이를 만났을 때도 짧은 감탄사만 터뜨렸던 로우덴이었다.
그런 그가 극찬을 하다니 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그냥 일반 엘프와 딱히 다를 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 에어리스라는 이름의 엘프를 대하는 엘븐 템플러의 태도가 은근히 조심스러웠다. 영주인 자신의 앞에서도 말이다. 그리고 에어리스를 바라보던 호의 시선이 다시 로우덴에게로 향할 때였다.
“멍멍. 에어리스 양은 하이 엘프입니다. 영주님.”
로우덴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고, 호의 고개가 다시 한 번 기울어졌다.
“하이 엘프?”
자신이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할 때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종족이었다.
아니, 하이 센티널이라는 엘프의 계급은 알고 있었지만, 엘프 왕국의 여왕인 엘 유스타시아 조차도 자신을 하이 엘프라고 부르지 않았었다. 그리고 로우덴은 하이 엘프의 등장을 꽤나 대단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이 라는 수식어가 붙긴 했으니 뭔가 대단한 것은 같은데. 이상하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하이 엘프라는 종족이 존재한다는 글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프를 바라보며 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로우덴은 기뻐하는 모양새였지만, 호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호는 다시 한 번 로우덴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하이 엘프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는 의도가 담겨 있는 행동이었다. 곧 로우덴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멍멍, 그랬지! 소환자이신 영주님께서는 리그너스 대륙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모르시겠군요.”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으음. 멍멍. 하이 엘프는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그림자 같은 존재입니다. 멍.”
“그림자 같은 존재라? 하이 엘프라는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드는데.”
호는 자신의 세계에 있었을 적 무렵 여러 판타지 소설을 읽어본 경험이 있었다.
거기에서 하이 엘프는 선한 존재이며, 대부분 엘프들의 상위 계층 즉 엘프들을 이끄는 지도자로 등장했었다. 로우덴이 말한 그림자 같은 존재는 호가 알기로는 하이 엘프가 아닌 다크 엘프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에서 쌓았던 그런 호의 지식은 알 바 없다는 듯 로우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멍멍. 전설에 따르면 이 세계는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께서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한 두 신께서는 피로감에 깊은 잠에 빠지신 상태지요. 멍.”
“그렇지. 그리고 현재는 창조신의 역할을 지금은 그들의 딸이라는 여신 라헬이 행하고 있지. 창조신에 관한 책을 살펴보면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
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째서 자신들이 이 세계로 넘어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마족과 천족에게 내려오는 전승과 함께 이 세계에 대한 역사가 적혀 있는 책을 찾아서 읽어 본 적이 있었었다. 아무리 이 세계에 대한 역사를 몰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엇다.
“멍멍.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보지 못하셨습니까? 태초의 혼돈에서 태어난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는 여러 개의 세상을 만들었고, 그중 한 곳에 리그너스라는 이름을 붙이셨다. 멍.”
“음?”
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디르시나의 영주성에 있는 책에 역시 방금 전 로우덴이 말했던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은 그런 내용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며 넘겼었다.
“멍멍. 하이 엘프는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가 만드신 여러 개의 세상 중 루베릭 대륙에 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루베릭 대륙?”
“그렇습니다. 멍. 여신 라헬과 라헬교로 인해 타 대륙에 관해서는 워낙 알려진 게 없는 터라 루베릭 대륙에 대해 알고 있는 존재는 리그너스 대륙 내에서도 몇 없을 겁니다. 멍멍멍.”
“…….”
“물론 저는 다릅니다. 멍. 자의는 아니지만 리그너스 대륙을 여행하면서 많은 지식을 쌓았으니까요. 멍멍.”
그런 지식을 알고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운 듯 로우덴이 가슴을 내밀었다. 하지만 로우덴의 말이 끝나는 순간 호는 자신의 머릿속이 하얘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조금 전에 하이 엘프라는 단어를 듣고 불안감을 느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하이 엘프, 루베릭 대륙.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공략본에도 나오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호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계획이 큰 틀에서 어그러지고 있었다.
‘……아니,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다. 알고 있잖아?’
하지만 호는 곧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로우덴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행동을 해야만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승에 의하면…….’
창조신의 축복을 받은 소환자는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과 비슷했다. 그 후 플레이어는 창조신의 권능을 차지하려는 속셈을 품고 있는 여신 라헬까지 제압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진 엔딩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유저들이 피눈물을 흘렸던가?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고, 힘을 소진한 플레이어를 뒤통수치는 여신 때문에 라헬 개년, 라헬 쌍년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유저가 여신 라헬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리그너스 대륙에 숨겨져 있는 힘과 창조신의 축복을 손에 넣은 여신 라헬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자신의 어버이인 창조신들을 소멸시키고 자신이 새롭게 창조신이 되는 것으로 스토리는 끝이 났다.
‘그래. 리그너스 대륙만 통일하고 여신 라헬만 제압하면 돼. 그게 진 엔딩이잖아?’
그러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루베릭 대륙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멍청하게도 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열심히 하겠습니다.”
에어리스의 눈동자가 기대감과 흥분으로 반짝였다. 곧 조그마한 문장이 그려진 매끄러운 표식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디르시나에 소속된 윤호의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증표였다. 깨끗한 의상도 주어졌다. 엘프들의 의상이었다.
그리고 호의 명령에 따라 그녀는 엘븐 템플러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새 의상을 입기 전 깨끗하게 씻기 위해서였다. 그 후에는 온몸에 난 상처를 치료 받을 터였다. 노예 생활이 혹독했는지 그녀의 몸에는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다.
“하이 엘프라…….”
호는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진 에어리스의 종족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이 엘프라는 그녀는 막 엄청나게 대단한 능력을 지닌 영웅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호는 유저의 능력으로 에어리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루베릭 대륙의 존재라도 능력은 먹히는 모양이었다.
별 거부감 없이 그녀를 등용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에는 에어리스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하이 엘프인 에어리스는 B등급 영웅이었다. 그녀는 생명의 씨앗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법사 계열의 직업이었다. 그것도 보조계열로 보유한 스킬의 효과가 자신과 동료의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에어리스를 대하는 엘프들의 행동이 굉장히 조심스럽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멍멍.”
로우덴의 대답에 주위를 스윽 둘러본 호가 물었다.
“왜 그렇지?”
“멍멍. 전설에 따르면 먼 옛날 하이 엘프는 엘프들에게 고귀한 존재로 불렸다고 합니다. 멍.”
“역시.”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판타지 소설의 설정은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그림자 종족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럴 거면 그들을 하이 엘프가 아닌 섀도우 엘프라는 이름으로 불렀을 터였다.
“그런데 꽤나 시간이 흘렀으면 엘프들도 하이 엘프라는 존재를 잊었을 것 같은데?”
“멍멍.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엘프들은 사라진 하이 엘프들에게 존경을 표한다고 합니다.”
“그렇군. 그런데 내가 보기에 엘프와 하이 엘프의 외모는 완전히 똑같아 보이던데? 대체 어떻게 구별하는 거지?”
“멍멍.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엘프들은 다들 한 눈에 하이 엘프를 알아 볼 수 있답니다. 그들의 피가 알려준다고 하더군요. 멍.”
뱀파이어도 아니고 피가 알려주다니?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꽤 오랜 시간을 이 세계에서 보내고 있지만 역시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어쨌든 하이엘프인 에어리스는 이제부터 자신과 함께할 터였다.
그 말은 즉, 영지민들과 노예들 사이에서 새로운 영웅을 발견하겠다는 생각이 성공적이라는 말과 동일했다. 이대로라면 내일도 새로운 영웅이 자신을 방문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영웅의 부족함이라는 디르시나 아니 자신의 문제점이 조금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어서 C등급 내정 영웅인 페이샬 티슈와 D등급 내정 영웅인 센스가 합류하면서 아스트리드 벨이 한시름 놓았고, 레온 바티스타라는 C등급 클래스를 보유한 드워프도 합류하며 디르시나의 대공사에 한 몫 거들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머, 영주님?”
야릇함이 담긴 매끄러운 목소리에 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요요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다크 엘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공사판에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케이든 크로스 양.”
그녀의 등장에 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케이든 크로스. 다크 엘프인 그녀는 B등급의 영웅으로 이번에 호가 영입한 영웅 중 하나였다.
암살자 계통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은신과 잠입 그리고 부대의 이동속도 증가에 영향을 주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로스라고 불러주세요. 영주님.”
말과 함께 케이든 크로스는 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행동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호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