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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138화 (138/522)

# 138

리그너스 대륙전기 138

“내일이 첫 상행인가?”

“네. 블루 스케일로 향했다가 라다크 산맥을 넘어 엘프의 영토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응접실에 앉아 호록 차를 들이키던 디아린 호의 질문에 대답했다. 디아린 상단이 창설된 지 일주일. 드디어 첫 상행이 결정된 것이다.

“근 한 달 정도는 만나지 못하겠군.”

“다른 이들도 바삐 움직이는 마당에 상단주인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디아린의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디르시나에서 가장 바쁘게 활동을 하는 영웅은 다름 아닌 한시진이었다. 현재 그녀는 디르시나를 떠나 있었는데 엘븐 템플러들과 함께 킬리드 지역의 던전을 토벌 중이었다.

바로 A등급 클래스인 인피니티 소드의 전직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인피니티 소드로 전직할 수는 없겠지만.’

던전 토벌로 획득한 경험치를 세부 능력으로 변환할 수는 있었다. 게다가 인피니티 소드 전직에 필요한 조건에는 성공적인 던전 토벌이 들어가 있었다.

‘후우. 막상 던전 토벌을 나서야 할 사람은 나인데 말이야.’

A등급 클래스인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 아직까지도 호는 이 A등급 클래스를 손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전직에 필요한 세 개의 조건 중 두 개는 만족시켰지만, 아직 조건 하나가 남아 있었다. 바로 직접 부대를 지휘해 100 번의 전투를 승리로 마쳐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수인 왕국과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며 여러 전투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호는 100 번 중 반 정도밖에 조건을 완료하지 못했다. 그나마 돌파구가 보이는 게 이미 토벌을 했던 림드 산맥의 던전들에 몬스터들이 다시금 모이기 시작한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고블린이나 오크와 같이 번식능력이 왕성한 녀석들은 짧은 시간만 주어져도 천 마리 이상의 대규모로 수가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 이 점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 전직 조건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디르시나를 비울 수가 없었다. 영지의 특성화 개발로 인해 자신이 필요한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생명체의 해골로 만들어진 옥좌 위에서 한 여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우아해 보였고, 한 편으로는 위엄이 넘쳤다. 또한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 정도의 색기도 있었다. 또한 고운 분칠을 한 것 같은 뽀얗고 흰 피부는 천장 어디선가에서 비춰지는 빛을 받아 그녀를 한층 신비롭게 만들고 있었다.

우우웅!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것은 여인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주위에 짙은 검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검 한 자루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마냥 떠다니고 있었다. 먼 옛날 파신 크탈나스의 몸에 상처를 내었다는 마족들의 신기 카시아움였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던 여인이 고갯짓을 하는 순간 검은색 피부를 지닌 괴물들이 옥좌의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한 목소리로 외치듯 말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다스리는 만마의 지배자께서 들라 하신다!”

목소리가 끝나고서 잠시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싶더니 곧 커다란 문이 끼기긱 열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큐버스와 다양한 보석들을 들고 있는 고블린들 그리고 거대한 덩치를 지닌 미노타우르스였다.

“위대하신 만마의 지배자께 상급의 작을 받은 볼 붸르니체스가 인사를 드리옵니다.”

“오랜만이로군. 볼 붸르니체스.”

마왕 쉐르난비체의 말에 볼 붸르니체스가 공손하게 고개를 깊이 숙여 절했다. 그러자 어느 샌가 카시아움이 날아와 붸르니체스의 어깨를 검 등으로 두 번 두드리고는 쉐르난비체가 앉아 있는 옥좌로 되돌아갔다.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있었던 엘프와 수인 왕국의 도발로 인해 자리를 비우기가 힘들었습니다. 늦게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보고는 들었다. 제법 귀찮은 녀석들이 붙었다지?”

수인 왕국을 이루는 종족 중 하나인 묘인족의 리셴르나, 엘프 왕국의 로열 센티널 엘 아스린. 자신들의 세력에서도 한가락 하는 녀석들이 이끄는 군대가 붉은 핏빛의 대지라는 조그마한 지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도발을 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상급 마족인 볼 붸르니체스가 직접 커티삭이라는 조그마한 도시까지 출정을 나가야만 했었다. 그리고 볼 붸르니체스는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어떤 연유로 인해 세 종족의 군대가 부딪치게 되는 일이 벌어졌는지는 마왕 쉐르난비체에게 보고를 했었지만, 아직 이야기를 하지 못한 내용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 모든 게 소환자 때문입니다.”

“소환자라…….”

쉐르난비체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미소가 걸렸다. 커다란 미노타우르스가 말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쉐르난비체는 그의 얼굴을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선택의 제단에서 자신에게 불쾌감을 안겨다 주었던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보고에 의하면 그 남자는 그때 살아남았던 소환자들을 규합해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었다고 했다.

“윤호라고 했던가? 림드 산맥에 터를 잡았다고 들었다.”

쉐르난비체의 매혹적인 눈꺼풀이 위 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습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볼 붸르니체스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무례하게 만마의 여왕을 빤히 보고 있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한순간 섬찟한 기운이 그런 미노타우르스의 등골을 훑었다. 어느새 카시아움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태곳적부터 내려왔다는 이 마족의 신기는 자신의 주인이자 만마의 지배자인 마왕 쉐르난비체에 대한 그 어떠한 무례도 용서하지 않았다.

“거기서 자신만의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수인 왕국과 두 번의 전쟁을 벌여 승리로 거뒀다고 합니다. 보고에 의하면 두 대의 키마라이가 전쟁에 나섰다고 합니다.”

“후후후. 그래?”

쉐르난비체가 자신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볼 붸르니체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제법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제단. 여신 라헬이 소환한 다른 세계의 존재들은 그녀의 기준으로 봤을 때 벌레만도 못한 녀석들이었다. 첫 소환이 이뤄졌을 때도 그랬고, 두 번째 소환이 이뤄졌을 때도 그녀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윤호라는 이름의 소환자도 그랬다. 여신 라헬이 소환한 다른 세계의 존재. 하지만 전설의 계승에 나오는 존재라 부르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별 볼 일 없는 힘을 지닌 존재였다. 자신의 힘은커녕 일개 마수조차도 감당해낼 수 없어 보였다.

그런 소환자가 자신이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이에 이 대륙에서 조금씩 성장을 해나가더니 어느새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볼? 나는 소환자라는 이름을 지닌 존재들이 마수 하나 아니 몬스터 하나조차 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느새 쉐르난비체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환자라는 존재는 짧은 시간 동안 나에게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성장했다. 놀라운 일이지. 윤호라고 했던가? 한 번 보고 싶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그렇게 변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구나.”

쉐르난비체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자신이 키마라이를 주었던 것은 수인족의 도발을 막아내라는 의도 그 하나뿐이었다. 어차피 그녀 휘하에는 백 여기가 넘는 마장기가 있엇다. 하지만 윤호라는 인물은 수인 왕국의 도발을 기상천외한 힘을 사용해 막아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수인 왕국의 세력을 차지하더니 그 자리에 눌러 앉아버렸다.

그런 쉐르난비체의 감탄에 볼 붸르니체스의 인상이 살며시 굳어졌다. 그는 이 자리에 있는 마족들 중 유일하게 윤호라는 이름의 소환자를 만나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다. 마족인 주제에 엘프와 인간 그리고 수인들과도 함께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만마의 지배자께서 관심을 보이실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그가 말했다. 커다란 그의 눈동자에 살짝 불꽃이 튀고 있었다.

“소환자라는 녀석들이 폐하께 불경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경한 마음?”

쉐르난비체의 말에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의 옆에 엎드려 있던 뱀파이어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현재 소환자가 지배하에 있는 림드 산맥에는 저희 마족들이 아닌 엘프, 수인을 비롯해 드워프와 같은 다양한 종족들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상단을 만들었는데 그 수장이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일지?”

뱀파이어의 말에 쉐르난비체가 톤이 높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뱀파이어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림드 산맥에 주둔하고 있는 대다수의 군대는 엘프와 수인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보고가 끝나자 볼 붸르니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쉐르난비체를 바라보았다. 마족에게 선택된 소환자들은 마족이 아닌 다른 종족을 받아들이는 배신의 행위를 하고 있었다. 림드 산맥에 터를 잡은 것까지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마족의 소환자인 주제에 그는 마족의 영토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코르다와 아멘드마를 그냥 두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마족과의 연관되는 것을 피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녀석들은 분명 폐하에게 칼을 겨눌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이 구체적으로 포착된 것은 아니지만 볼 붸르니체스는 분명 소환자들이 자신들을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거 너무 멀리 나간 생각 아닌가?”

어둠 속에서 칠흑의 갑주를 입은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온몸에서 짙푸른 기운을 흩뿌리고 있는 그는 죽음의 기사인 데스 나이트로 볼 붸르니체스와 마찬가지로 상급 마족의 위를 받은 마족의 군단장 중 하나였다.

“사운더러스. 붉은 핏빛의 대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대는 전혀 알 수 없는 사안이라네. 나는 지금껏 쉐르난비체 폐하의 명을 받들어 소환자들을 관찰해왔네. 그리고 소환자는 마족보다 다른 종족을 더욱 신경 쓰고 있어. 이는 쉐르난비체 폐하께 도전하는 일이나 다름없어!”

“난 폐하와 함께 선택의 제단에서 소환자라는 존재를 봐왔다. 그들은 오우거가 내뿜는 울부짖음에도 목숨을 잃는 허약한 존재들이야. 자네는 고블린들이 세력을 늘리는 것에도 신경을 쓰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소환자는 결코…….”

사운더러스의 말에 볼 붸르니체스가 신경을 곤두세우며 대꾸하려고 했다.

“둘 다 그만.”

그 순간, 온화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사운더러스와 볼 붸르니체스의 얼굴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 입을 꽉 다무는 것이 어떤 고통을 이겨내려는 모습 같았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대전 전체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수많은 괴물들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압박감을 느끼지 않고 대전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은 오직 하나. 마족들의 신기인 카시아움뿐이었다.

“불경한 마음이라. 그렇다면 소환자가 군사를 이끌고 이리 오고 있는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볼 붸르니체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쉐르난비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쓰는 일이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대륙의 칠제 중 하나이자 만마의 지배자인 쉐르난비체는 자신이 재단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저는 다만 소환자의 존재가…….”

“후후후.”

나직이 웃음을 터뜨리던 쉐르난비체가 볼 붸르니체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소환자의 존재가 나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인가?”

“…….”

“그럼 그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겠구나. 만약 윤호라는 소환자가 나에게 불경한 마음을 품는다면 그냥 그렇게 두어라. 나는 그가 감히 나를 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볼 붸르니체스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만마의 지배자인 그녀의 말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소환자가 날고 긴다 하더라도 칠제이자 만마를 다스리는 쉐르난비체의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환자라는 존재가 우리 마족뿐 아니라 다른 종족의 존재들과 함께한다는 게 더욱더 흥미롭지 않은가?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여인의 웃음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고,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의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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