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리그너스 대륙전기 137
‘어라?’
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호감도 퀘스트였다. 그것도 이세계의 영웅이 아닌 단지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조연이라 생각됐던 상단의 인물에 대한 호감도 퀘스트였다.
“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스템 메시지에 호는 절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혹시 기분이 나쁘셨다면…….”
“아, 괜찮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을 뿐이니까.”
호의 웃음에 레드 벨벳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호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호감도 퀘스트도 뜬 마당에 레드 벨벳 아니 디아린이라는 본명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공략 조건이 어떤지 궁금했다.
[디아린이 상단주로 있는 상단의 창립 멤버 혹은 후견자가 되기-0%
상인으로써의 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100%
100만 리스가 넘는 상행에 도움을 주기–100%
300만 리스가 넘는 상행에 도움을 주기–100%
5000만 리스가 넘는 상행에 도움을 주기–100%
1000만 리스가 넘는 상행에 도움을 주기–100%]
그리고 정보를 살펴본 호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레드 벨벳의 호감도 퀘스트는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상단주로 한 상단의 창립 멤버가 되어나 도움을 준다면 그녀 역시 엘 샤난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따르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오백만 리스와 천만 리스가 넘는 상행에 도움을 줬다는 것은?’
호의 시선이 디르시나의 대략적인 공사 개요가 적혀 있는 책에게 향했다. 그 책에는 아르테미스 상단에게 맡길 거래도 적혀 있었다. 적어도 1000만 리스 이상의 물품이 오가는 거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뻐하는 표정이 눈에 보이는 레드 벨벳을 보며 호가 쓰게 웃었다. 갑자기 그녀의 호감도와 관련된 퀘스트를 얻고 나니 아르테미스 상단에서 일을 맡긴다는 게 무언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디아린이 상단주로 있는 상단을 창설하고 직접 그녀에게 일을 맡겼으면 좀 더 싼 값에 공사 자재를 납품 받을 수 있었다.
그뿐일까?
그녀의 상단을 더욱 더 크게 키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상단은 지금의 아르테미스 상단보다도 더욱 더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니, 영주 직속의 상단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로우덴이 말하던 디르시나를 상업도시로 만드는 데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로써 영지 직속의 상단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흐으음.”
하지만 어떻게 레드 벨벳을 상단주로 있는 상단을 창설할 수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현재 그녀는 아르테미스 상단 소속. 그것도 상단 내에서 꽤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러나 이미 호감도 퀘스트가 생겨났고, 세부 조건 역시 제법 진행되어 있는 것을 보니 넌지시 의향을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반응이 올 것 같았다.
“…….”
그런 생각을 하며 호가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 응접실에는 묘한 기류가 맴돌고 있었다.
레드 벨벳은 방금 전의 실수 때문에 계속해서 호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호는 어떻게 해야 레드 벨벳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지금이라도 당장 디르시나에 납품할 물품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묘한 분위기를 버티지 못한 것은 레드 벨벳이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레드 벨벳을 향해 호가 말했다.
“아르테미스 상단과 우리의 관계는 꽤 오래되었지? 아, 그대와의 관계 말이네.”
“2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영주님.”
“음…….”
레드 벨벳의 대답에 호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속전속결. 어차피 말을 길게 늘일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세력으로 스카웃하기 전에 아르테미스 상단에 대한 그녀의 충성심을 확인해야 했다. 그래도 호감도 퀘스트의 내용에는 레드 벨벳의 꿈은 십대 상단과 같은 자신만의 거대한 상단을 운영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 말은 곧 자신만의 상단을 원하고 있다는 거겠지. 아마 아르테미스 상단에서 일하는 것도 인맥을 넓히거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호는 팔의 깍지를 끼며 레드 벨벳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여신 라헬을 통해 이 세계로 끌려왔고 림드 산맥의 패자로 이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륙의 여러 상단들을 만났었지. 하지만 그중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은 몇 되지 않았어. 그리고 그대는 그중 하나에 속하는 인물이지.”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깨달은 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영주에게는 상단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호의 이야기에 레드 벨벳은 고개를 주억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리그너스 대륙의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상단의 존재는 웬만한 영주라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이 대륙을 지배하는 종족의 수장들이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그녀는 의문이 하나 들었다. 어째서 림드 산맥의 패자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여러 번 호와 만나긴 했지만 그는 한번도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레드 벨벳은 오히려 로우덴이라는 다소 고지식한 면이 없잖아 있는 수인족과 거래에 관련된 대화를 나눈 적이 더욱 많았다. 그때였다.
“그리고 나에게도 디르시나에 거점을 둔 상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지.”
“아르테미스 상단은 림드 산맥의 패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레드 벨벳이 말했다. 림드 산맥의 패자는 아르테미스 상단이 제법 신경을 쓰는 고객이었다. 그리고 그런 레드 벨벳의 대답에 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림드 산맥에 본점을 둔 상단이 필요다고 말했네. 아르테미스 상단이 우리와 좋은 관계인 것은 맞지만, 우리를 위해서 움직이는 상단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영주님. 언제나 상단은 자신들의 이익이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맞아.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익을 안겨다줄 상단이 필요하다는 거야. 게다가 나는 원하는 게 굉장히 많거든.”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영주님. 왜 그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시는지…….”
말끝을 흐리며 레드 벨벳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표정을 가다듬은 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의 능력을 제법 높이 평가한다네, 레드 벨벳. 아니 디아린.”
레드 벨벳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아쉽게도 호는 그 자리에서 레드 벨벳에게 승낙의 답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거절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호의 제안에 그렇게 대답을 한 레드 벨벳 아니 디아린은 그로부터 며칠 뒤 다시 호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르테미스 상단의 인원들과 함께 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홀로 디르시나를 찾았다.
그리고 디아린은 아르테미스 상단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레드 벨벳이라는 가명을 버리고 디아린 상단을 창설, 자신의 꿈을 다시 펼쳐나갈 수 있게 되었다. 디아린은 호의 지원 아래에 빠른 속도로 상단의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인물들을 고용해 나갔으며 인맥을 통해 거래처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상단-디아린 상단(신뢰)[50000 / 50000]-마정석, 광석, 식량]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데?”
디아린 상단과의 평판을 확인한 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게도 자신에게 여러모로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상단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르테미스 상단과의 관계가 크게 나빠지기는 했지만, 딱히 신경을 쓸 필요까지는 아니었다.
앞으로 아르테미스 상단이 했던 일들은 디아린 상단이 대신할 테니 말이다. 당연하겠지만 디르시나에 본점을 둔 디아린 상단이 주로 다루는 특산품들은 림드 산맥의 특산품이기도 한 마정석과 광석, 그리고 식량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S랭크의 수인 기병 양성에 필요한 특산품인 에스트라다의 한혈마를 비롯해 베코바의 철광석과 은. 그리고 칼리드의 밀까지. 이 모든 것이 디아린 상단이 다루게 될 물품들이었다.
“지금 우리 상단의 역량으로는 대륙을 관통하는 장거리 상행은 무리에요. 하지만 블루 스케일이나 수인 왕국의 영토 그리고 코르다를 지나 토갈론의 요새 북쪽까지는 상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어느 정도의 판매처도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전에 자신의 상단을 운영해 본 경험 있던 데다가 불과 며칠 전까지 아르테미스 상단에서 림드 산맥의 지점장을 맡았었던 영향력의 결과였다.
“아쉽게도 마족의 지역은 갈 수 없었어요. 커티삭까지는 괜찮겠지만, 커티삭의 안 쪽 그러니까 상급 마족인 볼 붸르니체스의 영토에는 조그마한 판매처도 확보하지 못했어요.”
의외인 것은 마족의 소환자인 자신의 상단이 다른 종족도 아닌 마족의 영토에 판매처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페릴 예노스가 지배자로 있는 커티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 그러니까 상급 마족인 볼 붸르니체스가 직접적으로 다스리는 영지들은 디아린 상단의 접근을 거부했다. 심지어 수인 왕국 내에서도 상행 허락이 떨어졌는데도 말이다.
“흠. 괜히 껄끄러운데.”
그 이유를 짐작하자면 짚이는 게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호는 딱히 그 문제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판매처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고, 이제부터는 천천히 마족들과도 조금씩 거리를 둘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마족의 소환자가 아닌, 나만의 세력이 필요해. 하지만 아직은 힘이 부족하다.’
자신이 림드 산맥이라는 한 지역의 패자라고는 하지만 대륙을 지배하는 종족들의 세력에 비교하면 티끌보다 조금 큰 존재에 불과했다. 내실을 다지며 계속해서 숨을 죽일 필요성이 있었다.
“멍멍. 저희들만의 상단이 생기다니 잘 된 일입니다. 저 예상에 따르면 앞으로 디아린 상단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림드 산맥에서 생산되는 마정석과 해양석의 가치가 굉장히 높기 때문이죠. 멍멍. 아르테미스 상단이 급격하게 세를 불리기 시작한 것도 림드 산맥의 해양석을 자신들의 품목으로 취급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멍. 딱히 상단을 이끌 인재가 없어서 이제까지 남 좋은 일만 했었는데, 멍멍. 디아린님이 함께 하셔서 다행입니다.”
디아린 상단의 창설에 가장 기뻐한 것은 바로 로우덴이었다. 디르시나를 상업 도시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단을 유치해야 한다고 부르짖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새롭게 합류한 디아린은 호의 생각이상으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굴러들어온 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림드 산맥의 지배자가 소환자라는 것을 의식하는지 디아린은 디르시나의 다른 소환자인 아스트리드 벨과 한씨 자매들에게도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특히나 호를 제외한 다른 소환자는 전부 여자들. 그리고 디아린은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디아린이 다른 소환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호는 딱히 제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앞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만큼 서로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