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리그너스 대륙전기 130
벨이 무릎을 꿇더니 브로리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순식간에 조그마한 소녀의 체구가 벨의 품에 쏙 안겨 들어왔다.
“어?”
갑작스러운 벨의 행동에 브로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작은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며 까닥까닥 움직였다. 가만히 있어야 할지, 몸을 빼내야 할지 어찌할 줄 모르는 움직임이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 자신을 안아준 사람이 없었기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무것도 안 해도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어. 아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만 해.”
잠겨 있는 벨의 목소리를 들으며 호도 짧은 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단지 등용에 성공했다고 그녀에 대해 좀 더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따뜻하군.”
브로리가 말했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런 벨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은 모습이었다.
“이게 엄마라는 존재의 느낌인가? 그대가 나의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 같은 느낌을 주는구나.”
“아아…….”
엄마의 얼굴조차도 모른다고 했던가? 브로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벨은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주었다.
“엄마.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하지만 엄마에게는 아빠가 있다고 들었다. 주변 수인들에 말의 의하면 자식과 부모는 서로를 사랑하고 필요로 한다고 했지.”
브로리의 황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호에게로 향했다.
“그럼 호가 내 아빠가 되는 건가? 분명 메이즈 케이지 안에서 그대는 내가 필요하다고 했었다.”
“……어?”
“응? 으으응? 잠깐, 그게 아니라.”
호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엄마와 아빠? 지금 브로리는 뭔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브로리의 생각을 고쳐주기 위해 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벨이 인상을 버럭 썼다.
“애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래요? 가뜩이나 지금 분위기도 훈훈한데, 분위기 다 깰 참이에요? 매정도 해라.”
“그, 그런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속사포처럼 내뱉는 벨의 말에 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녀의 말대로 지금처럼 훈훈한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었다. 브로리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고 말이다. 하기야 조금 오해를 하면 어떻고, 아빠라고 부르면 어떠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보면 사정을 설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브로리가 자신들에게 정을 준다면 더욱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여파는 호의 상상 이상으로 크게 이어졌다.
“엄마와 아빠는 옆에서 어디서든 함께하는 존재라고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벨과 호는 떨어져서 식사를 하는 거지?”
“히끅?!”
“자, 잠깐. 뭐…… 뭐뭐뭐뭐라고?!”
식사 자리에서 나온 브로리의 한 마디. 그리고 그 한마디는 평온했던 식당을 폭풍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스프를 마시는 아스트리드 벨. 고기를 집은 포크를 떨어뜨리며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한시현.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우덴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 리아 캬베데.
“크하! 역시 점심엔 시원한 맥주지.”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하는 드워프 존스 홉킨스. 아, 그는 방금 전 브로리가 했던 말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한 여인만큼은 달랐다.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방금 뭐라고 했죠? 브로리?”
“벨은 엄마. 호는 아빠라고 했다.”
“……윤호. 저게 대체 무슨 말이지? 지금 당장 설명해 봐.”
그리고 말이 심하게 짧아진 한시진을 보며 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한시진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눈으로 보이고 있었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눈을 살짝 비볐는데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을 보니 절로 침이 넘어갔다. 저게 말로만 듣던 유형의 살기인가 싶었다. 그리고 호는 재빠르게 양 손을 동시에 흔들었다.
“아, 아니야. 오해라고!”
그와 함께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해 달라는 듯 호는 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얼굴에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젠장! 이런 자리에서는 농담이라고 말해줘야지!’
호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했다.
곧 브로리가 말한 엄마와 아빠에 대한 설명이 호의 입에서 한 치의 생략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한시진의 화가 풀리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브로리가 합류한 지 사흘. 꽤나 피곤한 나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왜 그러셨습니까? 멍멍.”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브로리를 만난 로우덴이 물었다. 그녀는 영주성의 휴식 공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주위에는 로우덴과 브로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무엇을 말이지?”
“멍멍. 엄마와 아빠라는 단어는 브로리 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던 단어 아니었습니까?”
로우덴은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스트리드 벨과 자신의 주군인 호의 행동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준 건 분명한 것 같았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브로리의 한 마디 덕분에 자신의 주군인 호는 굉장히 난처한 상황에 빠졌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재미있게 지나갈 수 있었던 해프닝이었지만 그녀에게 대해 알고 있는 로우덴은 브로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내뱉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흐음…….”
브로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영리한 견인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랑을 받더군.”
“네?”
“윤호 라는 소환자 말이야. 이곳에 도착한 이후 계속해서 그에 대해 관찰했다.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엘프나 다크엘프를 비롯해 수인들은 물론이고 서큐버스와 같은 마족 심지어 인간들도 그를 좋아하더군.”
“멍멍. 소환자라고는 하지만 호 님께서는 현명한 군주십니다.”
로우덴은 정직하게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그래. 자네가 따르는 것을 보면 틀림없겠지. 그래서 부러웠다. 나는 누군가가 좋아하는 그런 대장은 아니었거든.”
“……당신 역시 혼혈만 아니었으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경받는 수인이 되었을 겁니다. 멍멍.”
로우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혼혈에 대한 수인들의 배타적인 행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 지금의 난 이곳이 마음에 든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다양한 종족들이 함께하는 장소. 말로만 듣던 파라다이스이자 전설 속의 알르드가 아니던가. 게다가 이곳에도 많은 수인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내가 혼혈인 것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지. 참 신기한 일이야. 그렇지 않나? 로우덴?”
“그렇습니다. 멍.”
“뭐, 그래서 조금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런 도시를 만들어내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윤호라는 인물에게 질투라는 것이 생겨났기 때문이지.”
“쿨럭.”
브로리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그와 함께 로우덴의 입에서 커다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말문이 막히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지금 로우덴의 모습은 놀라서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후후. 소환자라는 존재들은 보이는 외모와 행동 그리고 말투로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더군. 내가 그들에 비해 백 년은 더 살았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리고서야 말이지.”
“아마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멍.”
“그런가? 어쨌든 나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내 과거를 들을 때마다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
“특히나 호와 벨의 반응이 인상 깊었지. 어찌되었든 나는 그들에게 적이 아니었던가? 너무나도 쉽게 나를 믿고 경계를 푸는 모습이 신기했어.”
브로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로우덴은 그녀가 굉장히 즐거워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호 님께서는 당신에게 먼저 신뢰라는 것을 주신 겁니다. 멍멍.”
“알아.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서 감동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호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을 했던 것도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 영지의 업무에 대해서는 거의 몰라서 말이지.”
부끄러운 듯 브로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수인족의 대장이었던 시절 제대로 된 영지의 일을 처리한 적이 없었다. 한 마을의 대장으로써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영지의 업무에 대해 알려준 이도 없을뿐더러 브로리가 자신들의 대장이라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여긴 수인들은 그녀의 모든 행동에 비협조적으로 나왔었다.
“하지만 아스트리드 벨이라고 했던가? 난 그녀가 한시진이라는 여인보다 호의 짝으로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네.”
“주군의 여자는 한시진 님뿐입니다. 멍.”
“나도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아. 하지만 용맹한 전사는 여러 여자를 가질 수 있지.”
“……그들은 소환자입니다. 우리하고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멍멍.”
“하하하. 그럴까?”
웃음을 터뜨리는 브로리의 모습을 보며 로우덴은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브로리 발란스. 144 살의 그녀는 수인 왕국에서 파란만장한 일을 겪었던 영웅이었다.
* * *
호가 수인들과의 전쟁을 끝내고 디르시나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보름가량이 흘렀다. 브로리가 합류하고 보름동안 꽤나 여러 사건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큰 사건만 짚자면 요새도시 에스트라다의 영주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A등급 영웅이자 호의 충실한 수족인 리아 캬베데가 디르시나로 왔고, 브로리 발란스가 에스트라다로 향했다.
그리고 수인족의 대장이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영지 일은 맡아본 적이 없는 브로리를 도와주기 위해 2회 차 소환자인 윤아 역시 에스트라다로 향해야 했다.
“으으. 정말 가야해요? 조금 무서운데…….”
“내정으로 경험치를 쌓기에는 에스트라다가 좋지. 게다가 브로리 발란스는 SS등급의 영웅. 그녀 곁에만 있으면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래도…….”
“언제까지 우리가 아니 내가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일단 너 자신의 능력을 키워야 해.”
두려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윤아의 모습에 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아는 호의 휘하에 있는 소환자 중 가장 등급이 낮은 인물이었다.
이 세계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도 그녀는 아직 1회 차 소환자들에 비하면 애송이나 다름없었다.
윤아는 아직 리그너스 대륙의 무서움을 깨달아야 했고, 경험치를 획득해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켜야 했다. 같은 대한민국 출신이라고 해도 호는 윤아의 어리광 따위는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마냥 그녀를 막다른 곳에 몰아넣는 건 아니었다.
“에스트라다 공방전에서 두 번이나 패배했기 때문에 수인 왕국의 원인 부족도 어느 정도 정비를 할 시간이 필요할 거야. 그런 만큼 근시일 내에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지지 않겠지. 하지만 서로 적대하는 만큼 국경 지역에서 소규모 교전 정도는 일어날지 몰라. 그걸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많은 경험치를 쌓을 수 있을 거야.”
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호 역시 그와 비슷하게 경험치를 획득했었다.
“브로리라면 충분히 너를 지켜줄 수 있어. 신윤아. 힘들겠지만, 싸움에 익숙해져. 그리고 경험치를 모아서 하루라도 빨리 상위 직업으로 승급해. 그게 우리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이야.”
“……알았어요.”
그리고 호의 강한 눈빛을 받은 윤아는 잠자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내가 말했던 아이템들 획득하면 바로바로 디르시나로 보내주고. 그건 아주 중요하다고.”
“읔…….”
윤아가 인상을 구겼다. 호가 말한 것은 영웅들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리고 너 대륙전기 플레이해본 거 아니까, 브로리한테 영지 관련 일에도 알려주는 거 있지 말고. 그게 가장 중요하다?”
“네네.”
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운이 쭈욱 빠진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에스트라다로 출발했을 때 호의 시선에 들어온 윤아는 활기찬 표정으로 브로리에게 신나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렇게 브로리 발란스와 신윤아를 에스트라다로 보내고 리아 캬베데를 디르시나로 불러온 것에는 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리아 캬베데의 지력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