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리그너스 대륙전기 129
‘잘됐네.’
어차피 브로리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군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다행히 저런 모습을 보아하니 굳이 오너 시스템의 횟수를 소모하지 않고서도 쉽게 그녀를 등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흘깃 봤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브로리를 보며 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함께할 공간을 만들어주지. 집에 가자. 브로리.”
“응? 하, 하지만 난 리스가 없는데? 그러니까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호의 말에 반색을 하던 브로리가 곧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빈 주머니로 그녀의 조그마한 손이 몇 번이나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런 거 필요 없는데?”
브로리의 행동을 보며 호가 웃으며 말했다. 무력 수치 964. SS등급의 영웅을 등용하는 데 있어 리스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 그래도 될까?”
“물론이지. 그런데 말 놔도 되지?”
“그런 건 상관없는데……. 정말로?”
“당연하지. 가면 로우덴 말고도 다른 수인 영웅들도 있을 거야. 지내기는 어렵지 않을걸?”
“그, 그러면 가볼까?”
호의 대답에 브로리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의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띵동.
-‘페렛 습지대’의 수인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전투성과를 결산중입니다. 3……2……1. 결산완료. 이번 전투의 성과등급은 S랭크입니다. 경험치를 74920 획득했습니다.
-총대장으로 활약에 힘입어 20%의 경험치를 추가적으로 획득합니다.
-SS등급 영웅 브로리 발란스를 등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어서 벨소리와 함께 호의 눈앞으로 메시지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한 호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정말로 전쟁이 끝이 난 것이다.
“멍멍! 잘됐군요! 브로리 발란스!”
로우덴이 환한 표정과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인물 중 그 누구보다도 브로리의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원인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인해 그녀와 친분이 있기도 했다.
“읏!”
트라우마이자 수인들에게는 배척의 대상이었던 발란스라는 성을 거침없이 부르는 로우덴의 행동에 브로리가 크게 인상을 썼다. 하지만 자신을 필요로 한다던 호도 그렇고, 다른 이들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모습에 브로리는 천천히 얼굴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철군준비를 해라! 에스트라다로 돌아간다!”
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수레로 분리한 웨어 타이거와 키마라이를 실은 병사들이 입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호의 마음은 굉장히 가벼웠다. 메이즈 케이지를 찾은 용건을 아주 완벽하게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발걸음을 옮기면서 절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SS등급의 영웅인 브로리를 손에 넣은 이상 수인족의 도발도 더 이상은 두렵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금색 웨어타이거. 일반 기종이 아닌 커스텀 기종, 일명 전용기 또한 덤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당연히 호는 황금색의 웨어 타이거를 브로리 전용 마장기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SS등급의 영웅인 브로리와 한시진의 조합이라면 원인족 전체가 작정하지 않고 달려들지 않는다면 웬만한 도발쯤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억지력도 충분했다. 이제는 정말 림드 산맥의 개발에 모든 힘을 쏟을 수 있었다.
“브로리가 갑자기 너무 고분고분해졌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오빠?”
입구로 향하면서 키마라이에 탑승한 한시진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나 하는 위험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그녀는 아직도 마장기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운이 좋았어. 로우덴에게 브로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알아야 했는데, 혼혈이라는 이유로 인간들과 수인들에게 상당한 괴롭힘을 받았나봐. 그래서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너무나도 쉽게 마음을 연 것 같아.”
“함께하자고 했던 오빠의 말 한마디예요?”
“응.”
키마라이의 시선이 브로리가 있는 뒤쪽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로우덴과 함께 걷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포로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밝아 있었다.
“고생 많이 했나 보네. 평범한 말 한 마디에 저렇게 얼굴에 감정을 보일 정도면. 아직 어린애로 보이는데…….”
브로리에 대한 이야기는 한시진 역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외형만 보자면 브로리의 모습은 영락없는 초, 중학생에 불과했다. 자신의 동생인 한시현보다도 어리게 외모 탓일까? 한시진의 말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행히 앞으로는 우리와 함께할 거야. 외모는 저래도 실력이 대단한 영웅이니까 너한테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아, 그렇겠네요.”
호의 말에 한시진이 눈을 크게 떴다. 브로리 발란스. 황금색 웨어 타이거의 주인공인 그녀는 수인 왕국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사 중 하나라고 했었다.
특히나 그녀는 전쟁 초반 유인작전을 수행하면서 벌어진 전투에서 브로리의 공격 한 방에 나가떨어진 적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화랑기사단장이자 천재 화랑기사로써 이세계의 일반적인 마장기사들은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지만, 브로리의 실력은 그런 어중이떠중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고 해도 지지 않겠어.’
한시진이 마음을 굳게 먹으며 다짐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인 호를 위해서는 좀 더 실력을 키워야만 했다. 전처럼 적에게 한 번에 나가떨어지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숫자로 표현한 세부 능력이라는 그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 * *
“……어? 일찍 일어나셨네요?”
날씨가 좋은 화창한 아침, 아스트리드 벨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호를 비롯해 로우덴과 한시진이 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게 사흘 전이었다. 그리고 호는 디르시나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그리고 아침은 아스트리드 벨에게 있어 중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각종 서류로 어지럽혀진 영지의 집무실을 청소하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찍부터 호가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벨을 향해 호가 힐끔 눈짓을 했다.
“…….”
조그마한 소녀가 책상에 앉아 흰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냥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었다. 소녀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샤삭!
빠르게 펜이 종이를 흘기고 지나갔고, 그 소리가 집무실에 울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그리고 벨의 눈동자가 호를 향했다가 소녀를 바라보는 순간 다시 한 번 샤삭 거리는 소리가 집무실에 퍼져 나갔다.
‘저게 무슨 행동이람?’
벨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소녀의 손은 영지의 업무 결재를 하는 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움직이고 있었다. 호가 결재 내용을 읽을 때는 빤히 그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호의 손이 짧게 움직이는 순간, 소녀의 손도 움직이는 것이다.
잠깐 보이는 모습이라면 충분히 귀여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저 소녀는 어제도 지금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브로리라고 했던가. 그녀의 나이는 벨이 살던 세계를 기준으로 했을 때 높게 봐야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한시진의 동생인 한시현보다도 조금 어려 보였다.
“참, 잘 따르네요?”
“……나도 내가 어린 아이에게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은 몰랐어.”
그런 탓에 호와 브로리의 모습은 마치 사이좋은 큰오빠와 동생처럼 보였다. 만약 호가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였다면 아빠와 딸의 느낌?
이런 브로리의 행동에 호 역시 당황스럽고 난감했다. 하지만 브로리는 디르시나에 도착한 순간부터 껌딱지처럼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곤 말이었다. 아니, 호의 옆방이 아니면 잠을 자지 않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한시현과 방을 바꾸기까지 했었다.
로우덴을 통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은근슬쩍 물어봤더니 그냥 그러고 싶다는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것 참.’
처음에는 다들 이런 브로리의 행동을 귀엽게 받아들였다. 실제로 브로리의 외모는 상당히 귀여운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자 귀여움이 불편함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 참 각인효과도 아니고…….”
조류 중에는 처음 본 것을 엄마라고 생각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습성이 있는 개체들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포유류에서도 나타나는 편이었는데 개나 소, 말과 같이 사회성이 높은 동물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사람과 비슷한 특징을 지닌 원숭이나 버림받은 사자, 곰, 사슴 등에서는 종종 나타난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그리고 황금색의 꼬리를 지닌 브로리는 사람과 원인족의 혼혈이었다. 거기에 인간과 수인들 양쪽에서 버림받은 존재이기도 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올랐고,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여기 이거.”
식당으로 가기 위해 호가 몸을 일으키자 어제부터 종이를 들고 호의 행동을 따라하던 브로리가 자신이 그린 것을 호에게 내밀었다. 흰 종이에는 노란색으로 그려진 괴상한 낙서들이 빼곡하게 개발새발 그려져 있었다.
“니가 일하는 동안 나도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그리셨네요.”
호가 브로리가 그린 것을 보며 말했다. 뭘 그렸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 딴에는 뭔가 굉장히 열심히 했다는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벨이 호를 대신해 브로리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자 브로리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살던 성과 일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서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적응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어?”
호의 시선이 종이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빼곡하게 그려진 괴상한 낙서들은 일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마치 결재 서류에 자신이 동일하게 사인을 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브로리의 시선이 호에게 향했다.
“너는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기에 나는 너한테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리스를 주고 싶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리스는 전부 수인들의 성에 있으니까 줄 수 없는 상황. 설령 가져올 수 있다 한 들 이미 수인들이 전부 가져갔겠지.”
“…….”
“이틀 간 윤호 너의 행동을 관찰했다. 이제는 나도 니가 하는 일은 따라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브로리의 말에 아스트리드 벨이 탄성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번 전쟁에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하기로 한 이세계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로우덴에 말에 의하면 브로리는 수인이면서도 혼혈인 탓에 수인들에게 많은 차별을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그런 탓에 호는 일부러 그녀에게 영지 업무를 내리지 않았었다. 디르시나에 그리고 자신들에게 정을 붙일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브로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마 디르시나에서 보여주는 다른 사람들의 친절에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네.’
그러고 나니 자신의 행동을 따라하던 브로리의 이상한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수인들에게는 리스를 주었다지만,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리스는 없고. 어떻게든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가족들의 사랑이 뭔지도 모른다고 했지. 안쓰러워라…….’
벨도 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그녀는 브로리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브로리에 대해서는 로우덴을 통해 조금이나마 사정을 들었었다. 아마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굉장히 많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사정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이런 불쌍한 소녀가 귀찮다는 생각을 하다니. 가뜩이나 자기 딴에는 이곳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을 텐데……. 창피하다는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가슴이 뭉클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