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리그너스 대륙전기 127
“무턱대고 달려가는 게 아니었어.”
한 주먹거리도 안 될 인간 녀석들이 자신을 자극하고 도망가는 모습에 부리나케 쫓아간 게 실수였다.
거기에 추격 도중 소환자라는 인간에게 한 방 얻어맞은 탓에 이성의 끈도 놓아버렸던 탓도 컸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한 번 들어서면 노움이 아니고서야 빠져나올 수 없다는 메이지 케이지의 소문은 브로리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다. 자신이 메이지 케이지에 들어설 일도 없고 말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브로리의 눈에 붉은색으로 도색된 마족의 마장기가 들어왔다.
마족의 B등급 마장기인 키마라이로 자신을 이 메이지 케이지까지 유인했던 마족의 소환자가 사용하던 마장기였다. 자신을 유인했던 소환자가 마장기를 버려두고 간 것을 안 그녀는 언젠가 마족이 마장기를 찾으러 올 것이라 생각하고는 키마라이의 근처에서 계속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키마라이를 버려두고 간 마족은 코빼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벌써 며칠이나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마 동굴을 빠져나갔거나 나처럼 어딘가에서…….”
컹! 커엉!
브로리가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듯 중얼거리던 도중 멀리서 희미하게 코볼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브로리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런 울음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건 힘만 빼는 일이라는 걸 요 며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치잇.”
코볼트의 울음소리는 머지않아 메아리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 또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 브로리의 입에서 깊은 숨이 흘러 나왔다. 허기가 진 것일까?
꾸르륵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동굴 안을 찾아보면 어떻게든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것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브로리는 자신이 이곳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말이다.
“전쟁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 부하들은……. 지금쯤 죄다 도망쳤겠지? 아마 그럴 거야. 벌써 며칠 째 돈도 안줬으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메이즈 케이지에 갇힌 지 일주일 이상은 지난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을 메이즈 케이지로 유인했던 소환자의 행동은 로우덴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 분명했다. 셰필드 족의 몇 안 되는 생존자인 그는 천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 중 로우덴보다 머리가 좋은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찾으려고 싸우는 녀석들은 없을 테니. 결국 패배했겠네.”
브로리는 확신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찾기 위해 누군가가 메이즈 케이지의 내부로 진입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브로리의 입가에 쓴 웃음이 걸리기 시작했다.
설령 마족을 상대로 수인들이 승리를 거뒀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을 찾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여러 관계를 맺었지만 수인들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브로리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 * *
상대의 마장기를 모조리 침묵시킨 한시진이 전장에 참여하는 순간 전투는 끝이 났다.
위압적인 마장기의 등장에 다양한 종족들로 구성된 수인 군대는 자신들의 병장기를 버리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군대를 이끄는 몇몇 지휘관들이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어떻게든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정예 실리스들은 그런 지휘관들만 노려 저격했고, 이는 수인 군대가 무너지는 것을 가속화시켰다. 대승이었다. 그것도 호와 로우덴이 예상했던 것 이상의 큰 승리였다.
그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후우. 이제 전쟁은 완전히 끝난 건가요?”
호를 향해 윤아가 물었다. 안개가 끼기는 했지만, 에스트라다 성이 있는 곳까지는 제법 큰 가도가 있던 터라 호와 일행들이 길을 잃는 일은 없었다.
“응. 수인들의 움직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내일부터 후속 부대를 남겨두고 철군할 예정이야.”
수인 군대는 패퇴했고, 전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호는 병사들을 물리지 않고 있었다. 행여나 수인들이 저번처럼 다시 규합해 에스트라다를 노릴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괜한 우려인 모양이었다. 크나큰 패배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수인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영토로 향했다는 보고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호의 대답에 윤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같은 대한민국 출신의 소환자로 호를 따라 이번 전쟁에 참전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이번 전쟁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정예 실리스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해 경험치 빨대를 꼽기는 했지만, 정예 실리스들은 멀리서 적들을 요격하는 궁수 부대. 윤아가 직접적으로 수인들과 마주친 적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전쟁은커녕 전투하고도 거리가 멀었던 윤아에게는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이는 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정예 실리스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바로 호였다.
“후우. 멍멍. 그나저나 로쉬 해협의 해무는 정말 거미줄처럼 굉장히 끈덕지군요.”
안개를 뚫고 온 로우덴이 특유의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했고 호 역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앞을 볼 정도로 짙은 안개는 아니었지만 묘한 느낌을 들게 만드는 안개였다.
“로쉬 해협이라면 북쪽의 바다를 말하는 거죠?”
“멍멍. 그렇습니다. 블루 스케일의 주력 함선들이 오고가는 곳이지요.”
시진의 말에 로우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바다라…….”
언젠가는 바다에도 세력을 넓히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자신의 세력은 수중용 마장기는커녕 조그마한 함선도 제대로 만들 기술조차 없었다.
“메이즈 케이지는?”
“아직까지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다고 합니다. 멍.”
“그런가?”
“메이즈 케이지라면 그 브로리라는 무시무시한 수인영웅이 있는 곳 아닌가요?”
호와 로우덴의 대화에 윤아가 끼어들었다. 수인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수인 영웅 브로리를 함정에 빠뜨린 곳이 메이즈 케이지라는 것을 모르는 인물은 이곳에서 아무도 없었다.
“맞아. 그녀가…….”
“이제 일주일 정도가 흘렀습니다만.”
로우덴이 호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을 금세 알아들으며 대답했다. 일주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확실한 것은 브로리는 아직 메이즈 케이지 내부에서 살아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D등급 던전이라고는 하지만 메이즈 케이브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고작 고블린과 코볼트에 불과했다. 브로리에게는 손톱만큼도 위협이 되지 못하는 몬스터들이었다.
‘일주일…….’
애매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력이 떨어져 동굴 어딘가에 지쳐 쓰러져 있을 터였다. 하지만 브로리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멀쩡히 동굴을 활보하고 다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호는 어떻게든 브로리를 자신의 포로로 만들고 싶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었다. SS등급의 직업을 가진데다가 무력 수치가 1000에 가까운 인물을 놓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자신에게는 오너 시스템이라면 특수한 능력까지 있었다. 리아 캬베데에게 사용을 하고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터라 손목의 숫자는 현재 2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브로리와 같은 영웅의 존재는 이 세계에서 자신의 생각과 뜻을 행동으로 펼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 터였다. 유능한 인재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게다가 메이즈 케이브를 찾을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자신이 버려뒀던 B등급 마장기인 키마라이 역시 수거해야했다.
“잠깐 철군을 조금 늦춰야겠어.”
“메이즈 케이지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사흘 뒤, 리아 캬베데의 카니앗산과 호위 병력을 제외한 병사들을 이끌고 메이즈 케이지로 향한다. 그리고 소형 몬스터들이 자리를 잡은 던전의 내부를 토벌하는 한 편, 키마라이를 수거하고 브로리를 찾는다.”
“알겠습니다. 멍멍.”
호의 명령에 로우덴이 자신의 허리를 살짝 굽히며 공손하게 말했다.
* * *
수인 왕국의 영토인 나크 평원의 경계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마족의 군대가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수인들은 패배했고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호의 지배하에 있는 에스트라다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던 수인들은 행여나 있을 마족의 보복을 우려해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호는 승리의 기세를 몰아 수인들의 영토로 진격하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호는 자신의 지닌 전력으로 수인 왕국의 땅 조금은 차지할 수 있어도 지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정복전을 펼치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조심해서 진입한다! 시진이는 너무 앞서가지 말고. 상대는 수인 왕국 최고의 전사 중 하나인 브로리야.”
“알았어요. 오빠!”
그리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호의 병사들이 향한 곳은 에스트라다가 아닌 메이즈 케이지였다. 호의 명령에 따라 키마라이를 회수하는 한 편, 수인들의 총대장인 브로리를 포로로 잡기 위해서였다.
“너희는 이쪽! 4, 6소대는 오른쪽으로 간다!”
“네!”
“알겠습니다.”
키마라이 한 대를 비롯해 수천 명의 병사들이 메이즈 케이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도 그 뒤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천에 가까운 엘븐 템플러들이 몇 명씩 조를 나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메이즈 케이지를 탐색했고, 정예 실리스들 역시 회색빛의 종이와 펜으로 메이즈 케이지의 내부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메이즈 케이지의 미로를 또 이용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로우덴의 명령 때문이었다.
노움들이 살던 거대한 도시라는 소문처럼 메이즈 케이지는 수천 명의 병사들 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탐색은 그리 빨리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고블린과 코볼트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아직 키마라이가 있는 곳까지는 도착하지 못했으니까. 좀 더 가야만 해.”
“오빠. 진짜 깊숙하게 들어갔네요?”
“브로리의 추격에서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래봤자 던전 입구 근처에 불과한 걸?”
시진의 대답에 호는 시야 한 구석에 놓여 있는 공략본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키마라이가 보입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던 도중 앞서 있던 엘븐 템플러의 목소리가 동굴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동굴이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었다. 더불어 호와 한시진의 걸음걸이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고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브로리?!”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호 님의 호위해라!”
브로리라는 말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한시진의 키마라이가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고, 호의 마장기가 버려졌던 넓은 공동에는 곧 엘븐 템플러들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브로리가 도망칠 수 없도록 마족의 병사들이 수십 겹의 포위망을 구축했고, 한시진의 키마라이가 커다란 대검으로 브로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리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황금색의 기다란 꼬리를 지닌 소녀는 키마라이의 옆에 놓여 있는 웨어 타이거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병사들의 포위를 밀어내며 호와 로우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