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리그너스 대륙전기 126
“원숭이 놈들이 또 전쟁을 일으켰다고?”
한 여성이 놀람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탐스러운 꼬리를 지닌 수인 영웅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셴르나. 마족 및 드워프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수인족의 서쪽 영토, 바리안스의 대지를 지배하는 수인족의 상급대장이었다.
묘인족인 리셴르나의 유능함은 수인 왕국뿐 아니라 다른 종족에게도 꽤나 잘 알려져 있었다.
바리안스의 대지의 패자로 영토 남쪽에 터를 잡고 있는 드워프들의 도발을 몇 번이나 막아냈으며 마족과 엘프의 군단을 동시에 상대해내며 안테 로리 아니 이제는 지크 로리로 이름이 바뀐 폐허를 재건하기도 했다.
서부의 철벽, 사막의 꾀주머니로 특히 드워프들에게 악명을 떨치는 그녀는 명실공히 수인 왕국을 대표하는 영웅인 십이멀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그 림드 산맥?”
“네. 병사 삼만을 동원했으며 마장기가 일곱 기나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부하의 대답에 리셴르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림드 산맥. 한때 수인 왕국을 구성하는 종족 중 하나인 원인족의 영토였던 광활했던 대지로 지금은 그들의 무능함으로 인해 마족의 손에 떨어지진 영토였다.
림드 산맥은 과거 셰-발 전쟁에서 견인들을 비롯해 많은 수인들의 희생을 치르고 가까스로 차지한 땅이었다. 하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 세력이 크게 줄어든 견인들을 대신해 림드 산맥을 손에 넣은 원인들은 림드 산맥을 지배만 했을 뿐 발전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도 주지 않았었다.
그리고 결국 삼천이 조금 넘는 병사들을 이끈 마족의 소환자에게 그 넓은 림드 산맥을 통째로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만 것이다. 바로 리셴르나 본인에게도 크게 한 방 먹였던 윤호라는 소환자에게 말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고 해도 정도껏 해야지. 게다가 그 빌어먹을 녀석이 그렇게나 만만하겠어?”
마족의 소환자이자 이제는 림드 산맥의 패자가 된 윤호를 떠올리자 리셴르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매만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한 방에 마장기를 포함해 정예로 구성된 자신의 부대가 전멸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던 게 떠올라서였다.
제대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녀석이었지만, 상급 대장으로 임명되어 바리안스의 대지를 지배하던 리셴르나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줬던 인물이 바로 윤호라는 이름을 지닌 마족의 소환자였다.
그리고 윤호라는 소환자의 이런 활약은 소환자들이 무능하고 별 볼 일없을 거라 생각하던 수인들의 인식을 바꾸고 있었다. 더불어 원인들의 무능함 역시 수인 왕국 전체로 퍼져나가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원인 녀석들이 제법 힘을 썼나 보네. 마족의 소환자가 림드 산맥을 차지한 지 얼마나 됐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냥.”
부하의 대답에 리셴르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소환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 한계는 있는 법. 워낙 낙후된 지역인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림드 산맥의 전력을 크게 높이는 것은 아무리 소환자라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욱이 일곱 기의 마장기가 포함된 전력이었다.
“마장기가 그 정도나 포함이 되었으면 어렵지 않게 제압…….”
리셴르나가 말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림드 산맥에 대한 원인들의 공격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첫 전쟁에서도 원인들은 마장기를 포함한 군대로 공격을 감행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보유했던 마장기를 모두 잃어버리며 처참하게 패배하고야 말았다. 오히려 상대는 아군 마장기의 잔해를 드워프 종족에게 판매해 자신들이 다스리는 영지의 발전을 한층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제 1차 에스트라다 공방전이라 불리는 그때의 전쟁은 다시 한 번 원인족의 무능을 크게 부각시켜줬을 뿐 아니라 림드 산맥의 마족에게 뛰어난 마장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알려주었었다. 그리고 현재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림드 산맥의 마족은 B등급 마장기 키마라이 두 대와 C급 마장기 카니앗산 한 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네 기의 차이라…….’
이번 원정에서 원인들은 총 일곱 기의 마장기를 동원했다고 했다. 분명 네 기의 차이는 리셴르나의 상식에 있어 굉장히 큰 차이였다. 더군다나 마장기는 한 기만 등장해도 전황을 뒤바꿀 수 있는 위력적인 병기였다.
“흐흐흥…….”
리셴르나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마족과 원인족의 전투 상황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원인족의 힘겨운 승리였다.
네 기라는 마장기의 숫자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원인들에는 다른 종족들과 달리 특별히 이름 난 마장기사가 없었다.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를 지배하는 원인족의 부족장 버독이 있기는 했지만 그 또한 딱히 뛰어난 실력의 마장기사는 아니었다. 힘을 쓰는 일이라면 수인 왕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지만, 마장기는 힘으로 다루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림드 산맥의 마족에게는 검은 악마라 불리는 마장기사가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리셴르나는 그 검은 악마가 네 기의 숫자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욱이 1차 원정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수인 왕국의 B등급 마장기인 웨어 타이거급 또한 두 기나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이왕이면 두 놈들이 서로 공멸했으면 좋겠네.’
대다수의 수인이 모두 그렇듯 리셴르나 역시 다른 종족들에게 전혀 신뢰를 주지 못하는 원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수인 왕국이라는 한 울타리에서 함께하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웬만하면 긴 꼬리를 지닌 간사한 놈들하고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리셴르나는 원인족과 림드 산맥의 마족이 서로 큰 피해를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부하를 바라보았다.
“원인족의 군대를 이끄는 대장은 누구지?”
하지만 림드 산맥의 소환자들은 호락호락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기상천외한 전략, 전술을 사용할 뿐 아니라 리셴르나가 알고 있는 수인 왕국들의 허접한 소환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전쟁에도 능숙했다. 적어도 전략과 전술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녀석이 출전해야 림드 산맥을 탈환할 수 있을 터였다.
“그, 그게 브로리라고 합니다.”
“……브로리?”
리셴르나의 눈썹이 휘어지기 시작했다. 부하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튀어 나온 탓이었다. 금파신 브로리. 그녀가 알고 있는 수인 왕국 내 최강의 전사 중 하나였다.
“그 브로리가 원인족의 의뢰를 받고 출전했다고? 아니 돈을 얼마나 쓴 거지?”
“들리는 말에 의하면 20억 리스 이상이라 합니다.”
“하……. 나 참.”
굉장히 큰 돈 이긴 했다. 충분히 브로리가 관심을 가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브로리는 인간과 원인족의 혼혈이었다. 그리고 혼혈을 배척하는 수인들의 특성상 브로리는 그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수인 왕국 내에서 굉장히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강력한 전사라는 사실은 그녀에 대한 평가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인간들로 예를 들자면 브로리는 수인 왕국 내에서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조금 실력 있는 용병 정도로 취급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리셴르나는 그런 브로리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 브로리가 움직였다면.’
리셴르나가 알고 있는 브로리는 전투와 마장기전의 천재였다. 그렇기에 리셴르나는 드워프와의 전쟁에서 많은 돈을 들여 브로리를 고용했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브로리가 원인들의 의뢰를 받아서 움직였다고? 이상한데…….”
하지만 원인들은 자신과는 상황이 달랐다. 원인 부족과 브로리의 관계는 그야말로 철천지원수보다 아주 조금 나은 관계에 불과했다.
물론, 브로리는 자신의 마장기를 황금색으로 만들만큼 용병들처럼 반짝이는 금화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도 브로리가 다른 종족도 아닌 원인족의 의뢰를 받고 림드 산맥을 공격한다?
‘브로리가 움직인 이유가 있는 건가?’
원인족과 브로리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리셴르나는 쉽게 그 사실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전쟁의 상황은?”
“아직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그런가? 뭐, 들으나 마나겠지.”
수인 군대를 이끌고 있는 대장이 브로리라면 림드 산맥은 곧 수인 왕국의 손에 떨어질 게 분명했다.
검은 악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마족 마장기사의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브로리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리셴르나는 마음이 가슴 한 구석이 돌을 얹은 듯 묵직했다.
‘브로리가 왜 움직인 거지? 셰–발 전쟁의 전장이었던 림드 산맥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 않으려고 했던 녀석이?’
하지만 브로리는 원인들의 의뢰를 받아들였고, 림드 산맥으로 진군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하던지 간에 말이다.
“껄끄럽단 말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아, 그런 게 있다. 어쨌든 림드 산맥 전투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최우선적으로 곧바로 나한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자신의 명령을 받은 부하의 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리셴르나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 * *
똑. 똑. 똑.
동굴의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며 묘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공동 안을 울렸다.
귀찮을 정도로 적의를 드러내던 고블린과 코볼트의 울음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그런 몬스터들의 소리마저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동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고요함 속에서 한 소녀가 감았던 눈을 떴다. 황금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그녀가 평범한 신분이 아닌 고귀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재수 없게도…….”
짤막하게 잠이 들었던 소녀가 눈을 뜬 이유는 바로 꿈 때문이었다. 과거 자신이 수인들에게 무시, 학대, 차별 당했던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했던 기억이 꿈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꿈속에서 소녀는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고, 죽을 위기도 몇 번이나 넘겼다.
그런 연유로 인해 소녀는 수인들과의 생활에서 도망을 쳤다. 그러고는 소녀의 어머니가 알려준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런 소녀를 반긴 것은 더러운 것을 봤다는 경멸의 눈초리와 돌팔매질이었다. 결국 소녀는 인간들한테서도 도망을 쳐야 했고, 그렇게 인간도 수인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소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수인들의 손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신체를 단련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소녀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그것도 타고난 재능이었다. 그리고 그 재능은 시간이 지날수록 파괴적으로 변했다.
소녀를 괴롭히던 수인들은 소녀의 무시무시한 힘에 굴복했고, 무릎 꿇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수인들은 여전히 소녀를 무시, 차별했다. 인간들은 더했다. 그들은 소녀의 모습을 본 순간 날카로운 무기들로 소녀를 공격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소녀는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잠시긴 해도 수인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좋아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소녀가 반짝이는 돈을 내놓을 때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정이 고팠던 소녀는 수인들이 좋아하는 돈을 벌기 위해 용병으로…….
“그런 꿈 따위. 별로 꾸고 싶지 않았는데…….”
넓은 공동 안에서 브로리는 홀로 금속의 병기, 마장기에 몸을 기대 앉아 있었다. 황금으로 도금되어 숲과 벌판을 누비던 자신의 애기는 이미 동력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메이지 케이지.
이 빌어먹을 동굴 안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