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리그너스 대륙전기 124
브로리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호와 로우덴이 세운 계획은 간단했다. 각개격파(各個擊破). 현재 자신들의 전력으로는 상대가 불가능한 적인 일인군단 브로리와 그녀의 군대를 떼어내어 따로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혈통과 종족을 중요시하는 수인들의 전통에 따라 브로리가 수인 내부에서 극도로 차별을 받는 혼혈이라는 점과 그로 인해 그녀의 부하들에게조차도 제대로 된 믿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챈 로우덴의 계획에서 착안된 작전이었다.
어쨌든 이번 작전만 성공한다면 현재의 전력으로는 상대가 힘든 브로리의 군대 역시 물리칠 수 있었다. 로우덴의 작전은 이제까지 성공적으로 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전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서는 브로리가 빠진 수인 군대를 자신들이 물리쳐야만 했다.
“공격! 공격해라!”
“저 마장기를 막아!”
“전진해라! 마장기를 도와!”
호와 브로리가 서로 술래잡기를 하고 있을 무렵, 메이즈 케이지에서 반나절 정도 떨어진 평원에서 폭음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비명소리, 병장기가 부딪치는 서늘한 금속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로우덴이 이끄는 군대가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다.
“크아악!”
“아아악! 살려줘!”
“마, 마력포다! 모두들 피해!”
피가 흩뿌리고, 살점이 날아다닌다. 찢겨지고, 베이고, 끊어지고. 전투에서 승리하기 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전장의 참혹함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었다.
“으…….”
로우덴의 옆에서 전장의 모습을 바라보던 윤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이 있던 세계에서는 보지 못한 아니 볼 수 없는 끔찍한 장면들이었다.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이 현실이 아닌 또 다른 이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그녀는 한껏 자제력을 발휘해 아무렇지도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멍멍. 켄타우로스 전사들을 투입합니다.”
그런 윤아와는 달리 로우덴은 쉬지 않고 전장의 상황을 파악하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브로리가 없다고 해도 수인 군대의 숫자는 자신들보다도 많았다. 게다가 상대는 훈련이 덜 된 오합지졸도 아니었다.
‘멍! 병사들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역시 브로리를 제외하면 저 많은 병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영웅이 없는 게 분명해. 멍멍!’
하지만 브로리라는 커다란 존재감을 자랑하는 대장이 사라진 탓인지 수인 병사들의 움직임은 전투가 지속될수록 점점 혼란에 빠져가는 모습이었다.
쿠웅! 쿵!
그런 병사들의 전투만큼이나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마장기전 역시 치열했다. 비록 숫자의 차이는 크게 났지만, 한시진의 키마라이는 수인 영웅들의 마장기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투확!
주포를 충전하고 있던 카니앗산이 한시진의 마장기를 향해 주포가 쏘아냈다. 곧 한시진이 자리 잡고 있던 주위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키마라이가 아무리 B등급 마장기라고 해도 직격을 당했더라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법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가볍게 카니앗산의 공격에서 몸을 빼낸 키마라이는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한 수인 왕국의 카니앗산급 마장기를 향해 지근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샤아악!
종이가 베이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카니앗산의 다리 하나가 쿵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무너지듯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한시진의 공격을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 우아아악!”
카니앗산이 미처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키마라이의 대검이 몇 번이나 움직였고, 곧 쿠웅하는 소리와 함께 카니앗산의 커다란 동체가 주저앉기 시작했다.
“이런, 당했다!”
그 모습을 본 수인 영웅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쓰러진 카니앗산의 동체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마력의 불이 서서히 꺼지고 있었다. 또한 조종석으로 추정되는 부분에서는 동료의 피로 추정되는 붉은색의 액체가 차츰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 자식이! 감히 우리 쫑이를!”
우르릉거리는 음성과 함께 웨어 타이거가 카니앗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의 동료를 죽인 마족의 마장기를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단숨에 두 동강 내기 위해서였다.
투웅! 퉁!
하지만 그런 웨어 타이거의 의도는 멀리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력포로 인해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크읏!”
웨어 타이거의 시선이 자신에게 마력포를 발사한 마장기에게로 향했다. 커다란 철로 만든 수레에 몸체만 덩그러니 올라와 있는 카니앗산이 그 정체였다.
“로투스의 맛이 어떠냐! 엄호사격은 나한테 맡기라고 냥!”
마력 통신을 통해 한시진의 귀로 리아 캬베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움직임이 불편할 법도 하지만 리아는 자신이 로투스라고 이름 붙인 반쪽짜리를 제법 잘 조종하고 있었다. 저격수처럼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꽤나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유효 타격도 만들어내고 있었다.
쿠웅! 쿵!
리아 캬베데의 난입에 카니앗산 두 기가 로투스를 향해 마력포를 발사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로투스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곳에 떨어져 내렸다.
“고마워요!”
리아에게 쏠린 시선으로 인해 잠시 숨을 돌린 시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니앗산 한 기를 무력화시키기는 했지만, 상대에게는 아직 B등급 마장기를 포함해 다수의 마장기가 건재한 상황이었다.
가장 위협적인 적인 키마라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수인 왕국의 마장기들이 주포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포가 충전되기도 전에 로투스의 주포가 카니앗산의 주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종족의 배신자가! 흐억?!”
로투스의 주포를 피해 자신의 마장기를 움직이던 견인 영웅이 눈앞으로 나타난 모습을 보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키마라이가 자신의 대검을 붕붕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니앗산은 거미처럼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언덕이나 산, 하천도 건널 수 있어 지형지물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범용성이 높은 마장기였다. 거기에 등 뒤에 있는 주포로 멀리서 상대를 타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카니앗산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근접전이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떼, 떼어내야 해!”
근접전에서는 사정거리와 반발력으로 인해 자신의 주력 무기인 주포를 사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가까이 붙은 적들에게 발사할 수 있는 마력 화살들은 일반 병사들에게나 위협적이지 단단한 장갑을 한 마장기를 상대로는 생채기나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회피! 회피해!”
‘크윽! 그게 마음대로 되냐고!’
마력 통신을 통해 동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견인 영웅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카니앗산을 움직일 뿐이이었다.
투투투투투!
마력 화살을 발사하고 기다란 다리를 이용해 키마라이의 접근을 방해했지만, 그뿐이었다. 상대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빨랐다.
카드드득!
곧 키마라이의 대검이 휘둘러지고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또 한 기의 카니앗산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괴…… 괴물.”
순식간에 아군이 무력화되는 모습을 보며 한 수인 영웅이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브로리가 없다 하더라도 자신들에게는 키마라이와 동급인 B등급의 웨어 타이거급 마장기와 카니앗산이 여러 기가 존재했다. 하지만 단 한 기의 적을 상대로 힘없이 밀리고 있었다.
“마, 막아!”
“웨어 타이거는 뭐하는 거야! 저 녀석이 우리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끔 앞에서 막아줘야지! 카니앗산의 근접전이 형편없다는 사실 몰라?!”
“나도 접근하고 싶다고! 하지만 접근만 하려고 하면 적의 카니앗산이 방해를 하는 걸 어떻게 해!”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지휘해 줄 특출한 영웅도 없던 탓에 마장기사들은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절호의 기회를 한시진과 리아 캬베데는 놓치지 않았다.
* * *
메이즈 케이지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시계는 없지만 적어도 수 시간은 훌쩍 넘은 것 같았다. 그 시간 동안 거침없이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는 아직 메이즈 케이지의 입구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지만 메이즈 케이지의 규모는 고작 몇 시간의 이동으로는 입구조차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컸다.
게다가 개미굴처럼 여기저기에 보이는 미로와 같은 동굴은 어째서 이 던전이 위협적인 몬스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D등급의 던전이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후우, 지친다. 지쳐.”
바위벽에 기대던 호는 곧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 창을 살펴보았다.
“제법 깊게 들어온 줄 알았는데…….”
미로처럼 나타난 메이즈 케이지 내부의 지도 한 쪽에 파란색의 점 하나가 점멸하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인 게 분명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도 되려나?”
어차피 던전 내부로 계속해서 간다 해도 덩그러니 비어 있을 공간만이 나타날 터였다. 게다가 이제는 이 답답하고 어두운 동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을 호는 공략본을 통해 메이즈 케이지의 입구까지 갈 수 있는 길을 대충 눈으로 훑어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출발한다 하더라도 입구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꽤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브로리의 눈을 피해 마장기를 숨겨놓았던 장소 또한 들러야만 했다. 지금쯤이면 키마라이에 부착되어 있는 마정석의 마나가 떨어졌을 테지만 딱히 걱정은 없었다. 호의 품속에는 충분히 키마라이를 가동시킬 수 있는 순도 높은 마정석이 있었다.
‘그나저나 브로리는 어디에 있는 거지?’
걸음을 옮기면서 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굴 안쪽으로 브로리를 피해 도망치기는 했지만, 현재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브로리가 마장기에 탑승하고 있다면 마장기가 가동하거나 움직이는 소리를 통해 그녀가 동굴 어디에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마장기의 마정석의 마나가 떨어졌을 터. 아마 홀로 이 동굴을 돌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가 현재 자신의 근처에는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이 던전의 몬스터만 만나면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마냥 난장판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고블린과 코볼트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면 그곳은 100%브로리가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주위는 숨소리마저도 천둥같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하고 고요했다.
‘그래도 조심해야 돼.’
공략본을 통해 이 미로 같은 던전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브로리와 마주치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일대일로 브로리와 마주친다?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마장기가 있는 곳 까지 가야겠네.”
빠른 걸음으로 대략 네 시간 남짓 걸으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안전하게 마장기에만 탑승만 할 수 있다면 브로리가 나타나도 붙어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던 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려 964 의 무력 능력을 지닌 SS등급의 영웅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스킬을 생각하면 일시적으로 브로리는 1000 이상의 무용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의 무력은 기껏 400 남짓. 마장기의 능력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무적은 아니었다. 이 리그너스 대륙에는 일신의 무력으로도 마장기를 파괴할 수 있는 괴물 같은 녀석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