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리그너스 대륙전기 119
“마장기의 준비는?”
“이미 마정석의 충전은 끝냈습니다. 멍멍. 당장이라도 출전하셔도 됩니다. 여유 마정석 분량도 충분히 준비해 놓았습니다. 다만 마장기의 파손이 일어날 경우에는 전투를 지속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의 기술로는 마장기를 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
“멍멍. 그렇습니다. 행여나 반파라도 된다면 이번 전쟁에 투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로우덴의 대답이 이어졌다. 호를 제외한 다른 영웅들은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고 귀를 실룩이며 둘의 이야기만을 듣고 있었다. 현재 자신들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둘의 이야기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전과 마찬가지처럼 수인들이 다시 한 번 쳐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미 호는 림드 산맥에서 수인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묘한 긴장감이 회의실 내에 흐르고 있었다.
“멍멍. 문제는 수인족의 대장 브로리입니다.”
바로 브로리. 수인 옹국 최강의 전사 중 하나라는 그녀의 등장 때문이었다.
“브로리? 그거 드래곤 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이름에 윤아가 장난스럽게 말을 꺼내려다가 호의 강한 눈빛을 받고는 입을 다물었다.
“브로리?”
그리고 튼튼해 보이지만 짧은 어깨 사이로 목을 쑤욱 빼낸 드워프, 존스 홉킨스가 얼굴에 주름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설마 그 황금꼬리의 잡종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멍멍. 안타깝지만 맞습니다.”
“흐…… 흐에엑?!”
로우덴의 대답에 존스 홉킨스가 비명과 함께 인상을 와락 구겼다. 마치 못 들을 이름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윤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비록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녀는 수인 왕국의 소환자로 짧은 시간이지만 수인 왕국의 대왕 아쉬토와 함께 나름 한가락 한다는 수인 영웅들을 여럿 만났었다. 하지만 그중에 브로리라는 인물은 없었었다.
“누구예요?”
“저, 저도 모르겠어요. 언니.”
윤아가 슬쩍 옆에 앉아 있는 한시현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윤아처럼 브로리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수인 영웅이야. 그리고 회의 중에는 좀 조용히 해.”
“네…….”
그런 둘의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바로 한시현의 언니 한시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궁금증을 풀어주기 보다는 둘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존스 홉킨스의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그녀가 왜 직접 에스트라다를 노리는 거지? 게다가 그녀는 원인들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정확히 말하면 브로리 역시 원인족의 영웅입니다. 멍멍.”
“어어? 난 그 녀석이 리셴르나 휘하의 영웅인 줄 알았는데? 쿠퍼쏘우가 리셴르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어먹었던 것도 전부 그 브로리 때문이 아닌가?”
존스 홉킨스의 말에 로우덴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말을 이었다.
“멍멍. 바리안스 대지의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 말씀이십니까?”
“맞네.”
“그건…… 멍!”
그 순간 로우덴의 입에서 크나큰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호는 그 모습이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외친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멍멍! 그, 그겁니다! 영주님!”
“……그게 뭔데?”
그리고 호는 로우덴과 존스 홉킨스를 번갈아 보았다. 로우덴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는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런 호의 말에 로우덴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브로리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용병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멍멍! 수인이긴 하지만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른 종족의 편에 서서 수인들을 공격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지요. 멍. 일 년 점쯤 수인과 드워프의 전쟁에서 수인들이 승리했다던 소식은 이미 알고 계시죠?”
“대충은 알고 있어.”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저 남쪽의 산맥을 경계로 둔 수인 영웅 리셴르나와 드워프의 족장이 크게 한바탕 붙었고 드워프가 한 방 먹었다는 것은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브로리 역시 그 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수인과 드워프의 전쟁에 참가한 것은 그녀가 수인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서, 그리고 수인족의 상급대장이자 전쟁에서 병사들을 이끌었던 리셴르나와의 친분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로우덴이 힘겹게 자신의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들며 말했다.
“바로 돈 때문이죠.”
“음음!”
그런 로우덴의 말에 존스 홉킨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리셴르나가 거금 좀 썼지. 들리는 얘기엔 B급 마장기 두 대 값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어.”
‘B급 마장기 두 대?!’
대략 25억 리스 정도로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눈엣가시와도 같은 적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보면 그다지 비싼 가격도 아니었다.
“멍. 만약 우리가 만족할 만 한 돈을 그녀에게 제시한다면…….”
“브로리. 그녀가 우리 편에 설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군.”
“그렇습니다. 멍멍!”
몇 억 리스까지는 아니지만 천만 정도라면 어떻게든 무리해서 긁어모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천 만 리스로 브로리의 군대를 물릴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멍멍. 그렇다면 제가 브로리를 만나 보겠습니다. 저는 그녀와 약간의 친분이 있거든요.”
“좋아. 부탁해. 로우덴.”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로우덴의 지력 수치와 말 빨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먹힐 가능성이 있었다. 진짜 이 멍멍이 정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녀석이었다.
* * *
시원하고 살짝 흐린 날이었다. 에스트라다를 지키기 위해 디르시나에서 출진하는 인물은 호와 한시진이었다.
예정대로 총병력 만육천에 키마라이급 B등급 마장기 두 대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거기에는 로우덴도 끼어 있었다. 브로리와의 협상뿐 아니라 SS등급의 영웅이 쳐들어오는 절체절명의 이 상황에서 뛰어난 지력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기를 바라는 호의 결정 때문이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는 물론이고 다양한 전략 시뮬레이션을 플레이한 경험상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자기 진영의 에이스는 전부 투입해야 했다.
“브로리. 브로리.”
에스트라다로 향하면서 호는 계속해서 공략본을 이용해 브로리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과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아쉽게도 공략본에는 브로리를 등용에 대해 대략적인 지침만이 나와 있을 뿐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았다.
“RPG처럼 정해진 게임이 아니니까 당연한 거긴 하겠지만.”
한참이나 공략본을 보던 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상현실게임.
어떠한 한 상황에 대해 무한에 가까운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유도가 있는 만큼 브로리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나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공략본에 나와 있는 브로리의 이벤트와 그녀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으로 말미암아 호는 브로리가 황금과 사과를 좋아하고 정에 약하다는 것 정도를 유추할 수 있었다.
“황금은…….”
리스를 의미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브로리가 좋아한다는 돈으로 그녀를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브로리는 자신을 공격하는 중이었고, 그녀의 군대는 에스트라다의 코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협상 테이블은 금방 이루어졌다. 호의 대화 요구에 브로리는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대화에 응했다. 그리고 호가 브로리와의 협상 테이블로 보낸 영웅은 당연히 로우덴이었다.
“아, 안쪽에 브로리 님이 계십니다.”
고양이 귀를 지닌 수인이 더듬거리는 말했다. 짙은 검정색의 털을 지닌 묘인이었다.
‘멍멍. 남쪽 사막 출신인가?’
묘인족은 리그너스 대륙 전역에 퍼져 자신들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로우덴은 주로 남쪽 사막의 출신들이 저런 털을 지니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로우덴이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자연스럽게 시녀들이 브로리가 머무르고 있다는 천막의 천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로우덴이 거침없이 천막의 안으로 들어섰다.
“……호오. 로우덴?”
“멍멍. 오랜만입니다. 브로리.”
황금색의 꼬리를 지닌 조그마한 소녀를 향해 로우덴은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로우덴과 수인족의 악동이라 불리는 브로리와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마족의 소환자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그대가 찾아올 줄이야. 이거 놀랄 일인데?”
“뭐, 보다시피……. 멍.”
“셰필드의 생존자가 마족의 곁에 있었을 줄이야.”
브로리의 입에서 나온 셰필드라는 단어를 들은 로우덴의 입에서 으릉 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길지 못했다.
“셰필드의 난. 원인족의 장로 갈라고의 농간에 빠진 견인 부족 하나가 통째로 인간들의 손에 전멸했던 재앙이었지. 그리고 그 재앙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다섯입니다. 멍멍. 지금은 하나밖에 없지만요.”
“그렇군. 그런 그대가 마족의 곁에 있는 이유가 뭐지?”
브로리의 말에 로우덴은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갈라고에 대한 복수입니다. 멍멍.”
“마족의 손을 빌려서?”
“빌리는 게 아닙니다, 멍. 브로리. 지금의 저는 수인 왕국의 영웅이 아닙니다. 이 로우덴은 마족의 소환자 윤호라는 인물을 진정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하? 그 약해빠진 소환자들을?”
로우덴의 대답에 브로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로우덴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멍멍. 브로리 님 역시 갈라고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어째서 원인들의 명령을 따르고 계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무슨 말이지?”
“셰필드의 난이 아니었다면, 종족의 수치라 불렸던 브로리 님도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당신의 그 끔찍했던 어린 시절 또한 없었을 테고요.”
“…….”
으득거리는 소리가 천막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브로리를 바라보는 로우덴의 눈동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로우덴의 앞까지 다가간 브로리가 그의 멱살을 확 잡아당겨 로우덴을 마주 보았다. 노란색의 눈동자가 타오르듯 활활 빛나고 있었다.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를 해주고 싶군. 로우덴 셰필드.”
“크으윽.”
어린 소녀의 강한 힘에 로우덴의 몸이 종이처럼 흔들렸다. 브로리 발란스. 인간도 그리고 수인족도 아닌 이 혼혈은 종족의 저주에서 살아남아 강대함 힘을 얻은 여인이었다.
“멍멍. 그 충고 고맙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백오십도 되지 않은 이 젊은 수인 영웅은 많은 수인들의 두려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브로리의 괴력에도 전혀 겁을 먹지 않고 있었다. 아주 조그마한 두려움조차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브로리는 알 수 있었다.
“칫!”
그리고 브로리는 로우덴의 멱살을 잡은 손을 던지듯 놓고서는 눈을 살짝 감았다. 로우덴 셰필드. 자신과 이 녀석과의 인연은 전부 셰필드의 난이 벌어진 인간과 수인의 전쟁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