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리그너스 대륙전기 116
[오빠?]
[오빠, 일어나 봐. 어제 회식했어? 왜 이렇게 잠만 자? 오늘 데이트하기로 했잖아?]
뾰족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구지……?’
분명 자신이 아는 이였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호는 스케치에 물을 뿌린 것처럼 뿌옇게 한 여인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 뭐 했어? 또 늦게까지 술 마셨지? 술 적당히 먹으라고 했잖아.]
‘아, 아닌데? 난 분명히…….’
밤늦게까지 빠르게 훗사르의 테크를 탈 수 있는 기술 루트 연구와 함께 자신의 휘하에 있는 리젤을 비롯한 다른 낮은 등급의 영웅들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을 얻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오빠? 킁킁. 잠깐 이거 무슨 냄새지? 여자 향수? 여자 향수 아냐? 야. 너 일어나 봐. 윤호! 자는 척 하지 말라니까! 너 어제 뭐했어? 술 쳐 먹고 사람들하고 노래방 갔지? 여자 불렀어? 안 불렀어? 안 일어나? 너 이 자식! 정신 안 차릴래?!]
‘어?!’
예전에 경험한 것 같은 데자뷰에 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목소리는 한시진도 리아 캬베데도 그리고 아스트리드 벨도 아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틀을 딴 이상한 세계에 빠져들기 전 자신의 애인이었던 혜연의 목소리였다.
‘자, 잠깐, 혜연아! 내가 부른 거 아니야! 난!’
화가 난 혜연의 목소리에 호는 제대로 눈을 뜨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잠시 감았던 눈은 다시 뜰 수가 없었고, 입도 열리지 않았다.
[자, 잠깐. 너 이거 놓지 못해? 나쁜 새끼야! 눈 안 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손과 팔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리웠던 그녀의 얼굴도 그리고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많은 말들도 할 수가 없었다. 호는 반사적으로 혜연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상했던 세계로 다시 끌려갈 것만 같았다.
[이. 이거 안 놔? 네가 그런다고 내가 봐줄 거 같아?]
‘읏?!’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한 목소리가 혜연의 목소리에 섞여 들었다는 느낌에 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는 더욱 강하게 혜연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의 몸을 끌어안았다.
[야! 윤호! 이거 안 놔?! 눈 똑바로 뜨고 나 보라니까? 왜 자꾸 자는 척해?]
‘이, 이거 안 놔요? 아이씨! 잠버릇이 왜 이래?’
하지만 그에 비례해 혜연의 목소리에 섞여 들어오는 목소리의 크기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호가 혜연을 놓지 않기 위해 그녀의 몸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는 순간 점등하기라도 한 듯 눈앞에 화악 밝아지기 시작했다.
“……시진아?”
“그런 사람 아닌데요.”
차가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였다. 잠시 눈을 몇 번 깜빡인 호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아스트리드 벨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빌어먹을. 그럼, 그렇지.”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기형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는 익숙한 문양의 천장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엘 라디아의 말에 따르면 대상자의 안전과 행운을 기원하는 마법사들의 문양이라고 했다.
“악몽이라도 꾸신 거예요? 어떤 사람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던데?”
“……아니. 잠시 예전의 꿈을 꾼 것 같아. 이 세계로 오기 전의.”
“아…….”
호의 대답에 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비록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소환자라는 존재들은 모두들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멀리 타국에만 나가도 고향을 그리워한다는데, 소환자들은 단순히 타국에 나간 게 아닌 다시는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힘내요.”
벨이 아는 호는 이 세계에서 언제나 든든한 모습을 보여줬던 남자였다.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 승리를 거두기도 무서운 괴물들과 싸우기도 했다.
그런 호가 예전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약한 모습을 본 탓일까? 벨은 그런 호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장난을 치러 왔는데, 이상한 장면만을 목격한 것 같았다.
* * *
“정복? 뭐, 당연히 할 수 있지.”
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아무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그 정도야 간단한 거 아닌가? 그런데 말이지, 어째서 버독 녀석이 그런 걸 나에게 부탁하는 거지? 그 고릴라 자식은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낏! 브로리 님의 뛰어난 무용이 필요해서입니다. 이미 마족의 소환자는 두 번이나 우리들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그건 너희들이 약해서 그런 것 아니야? 나를 너희와 같은 급으로 보지 말라고. 기분 나쁘니까.”
“끼깃! 아, 알겠습니다!”
버독의 서신을 전하기 위해 브로리에게 찾아온 다람쥐 석궁수가 빠르게 대답했다. 눈앞의 소녀는 한때 원인족의 부족장을 두고 버독과 함께 치열한 대결을 벌였던 수인 영웅이었다.
인간과 동일한 생김새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소녀의 엉덩이 부분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꼬리가 드러나 있었다.
대전에는 소녀의 키 서너 배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원인들이 열중쉬어 자세로 소녀를 경호하듯 몇 발짝 뒤에 서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등에 멘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소녀쯤은 자신의 튼튼한 팔로 단숨에 짓눌려 버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앞의 브로리는 원인들 중에서 흉폭, 잔인하기로 소문이 난 수인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단순히 흉폭, 잔인하기만 한 수인이 아니었다.
그런 성격을 지니고서 아직까지 상처 하나 없이 살아 있다는 것이 그녀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잘 알려 주는 증거였다.
실제로 그녀와 싸움을 벌이다가 죽은 수인 영웅의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 탓에 브로리의 강함에 대해 잘 아는 수인들은 조금의 허풍을 더 붙여 그녀가 수인족의 대왕 아쉬토와도 엇비슷한 강함을 지녔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쨌든, 심심한 차에 잘 됐네.”
마족의 소환자에 대해서는 브로리도 귀가 따갑게 들었었다. 묘인족의 상급대장 리셴르나가 그에게 제대로 한 방 얻어맞기도 했고, 원인들은 그에게서 림드 산맥을 빼앗긴지 벌써 1년 가까이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얼마 줄 건데?”
“낏! 그러니까…….”
다람쥐 석궁수는 자신의 품에서 하나의 쪽지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브로리에게 바쳤다. 쪽지에는 버독이 쓴 내용이 적혀 있었다.
“5천만 리스? 이게 누굴 거지로 하나. 어디서 마장기 하나 가격도 안 되는…….”
인상을 찌푸리는 브로리의 모습에 다람쥐 석궁수의 갈색 피부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자신을 찢어 죽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브로리는 검은색의 석탄으로 만들어진 펜으로 종이네 숫자를 휘갈겨 적기 시작했다.
“이거 버독에게 가져다 줘. 20억 리스. 이 돈이 아니면 난 안 움직여.”
황금색의 꼬리를 지닌 수인 영웅, 브로리. 그녀는 싸움만큼이나 돈을 좋아하는 여인이었다. 항간에 의하면 원인족의 부족장을 놓고 버독과의 싸움에서 그녀가 물러난 것도 돈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후.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버독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브로리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부탁했을 때 자신이 적은 액수 이상의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용병처럼 말이다.
곧 20억 리스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버독의 도시에서 브로리의 도시로 수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억 리스의 입금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한 브로리는 버독과의 약속대로 자신의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적지는 림드 산맥의 에스트라다였다.
* * *
“태초의 혼돈에서 태어난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는 여러 개의 세상을 만들었고, 그중 한 곳에 자신들의 이름을 딴 리그너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한 자신들의 이름을 붙인 대륙에 새로운 생명들을 만들어 냈으니 순수한 욕망으로 점철된 마족과 순수한 믿음으로 만들어진 천족이 그것이니라.”
디르시나 영주성의 서재에서 이세계의 책들 중 하나를 꺼내 펼쳐보던 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최초의 자손이라 불리는 천족과 마족들은 서로가 자신들이 창조신의 진정한 자손이라 부르며……. 후. 마족들의 전승에 따르면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하고 창조신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는 존재는 단 한명이라고 했어.”
호는 자신의 들고 있는 이세계의 책을 보았다. 표현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책에는 천족들의 전승 역시 마족들의 전승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나와 있었다. 이해가 쉽지 않은 문장으로 나와 있는 정령과 엘프의 전승은 조금 달랐다.
“천족과 마족은 최초의 자손이지만, 엘프와 정령들은 그 후에 태어난 자손이라 조금은 다른 건가?”
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을 살펴보았다. 책의 앞면에는 멋들어진 글씨체로 창조신의 탄생과 최초의 자손 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사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세계관은 그리 탄탄한 편이 아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남성의 정복 욕구를 자극하는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많은 미녀들과 레이드, 전쟁, 연애 등 가상현실에서 하고 싶은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자유도 때문이었다.
마장기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는 했었다. 호가 있던 세계에서 메카닉에 환장한 남자들은 제법 많았다.
어쨌든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세계관에 대한 내용들은 게임을 즐기다 보면 알 수 있는 내용들로 대부분이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를 토대로 유저가 추측을 해야 했다. 설정집에 정확하게 나와 있는 내용도 없었기에 몇몇 의견에 대해서는 유저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저들은 게임만을 즐길 뿐 세계관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거나 기록이 누락된 것들이 있어도 그에 대해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딱히 그런 것을 알지 않아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는 달랐다. 단순히 1, 0으로 이루어진 컴퓨터 속의 가상현실이 아니었다.
잠시 책을 내려놓은 호는 발코니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20만이 넘는 다양한 종족의 생명들이 이곳 디르시나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이 대륙에서 자기들끼리의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후우…….”
호의 시선이 다시금 창조신의 탄생과 최초의 자손이라는 책에게로 향했다.
요즘 들어 호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역사가 적혀 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단지 이 세계의 역사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마족과 천족을 비롯한 각 종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관한 것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이 세계에 도착하고, 페릴 예노스에게서 전승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호는 공략본과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경험을 이용해 자신이 전승의 계승자가 되어 이 세계를 통일하고 현실 세계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지금은 많은 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