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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114화 (114/522)

# 114

리그너스 대륙전기 114

“빌어먹을!”

대화를 마치고 자신에게 주어진 방에 들어온 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볼 붸르니체스와의 만남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이 세계의 새로운 영웅이자 자신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는 고위급 군단장과의 만남이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잠시 동안 가지고 있었던 볼 붸르니체스에 대한 호의는 싸악 사라진지 오래였다. 모든 영웅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세계의 영웅들이 소환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후우, 씨발. 개새끼들.”

이 세계에 처음 도착한 소환자는 굉장히 약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버프를 받는 것도 아니었고, 쉽게 삶과 죽음이 오가는 세상에서 살다온 것도 아니다. 소환자들에게는 이 세계의 모든 게 새로웠고, 위험했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힘있는 영웅들에게 소환자들은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벌레 그 정도의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대로 쉽게 찍어 눌러 버릴 수 있는 존재 말이다. 물론 자신은 달랐다.

아크 로얄이라는 B등급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림드 산맥의 패자로 다섯 개나 되는 도시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 역시 처음부터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

게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마왕 쉐르난비체의 공격에 선택의 신전에서 스무 명의 소환자 중 열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살아남았고, 전쟁터도 몇 번이나 전전해야 했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자신은 계속된 위기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전부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경험과 공략본의 도움 덕택이었다.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공략본이 없었다면?

“다른 소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죽었을지도 모르지.”

공략본이 있고, 이 세계에 대한 제반적인 지식을 알고 있으면서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그리고 분명 볼 붸르니체스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 세계의 영웅들은 그런 자신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터였다. 죄책감? 미안함? 그런 것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을 터였다.

뿌드득

절로 이빨이 갈렸다. 이런 이상한 세계에 자신을 끌고 온 여신 라헬에 대한 분노와 소환자들의 생명을 가지고 노는 이 세계의 영웅들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는 것은 미련한 짓에 불과했다.

자신 혼자 아무리 열을 내고 화를 내 봤자 이 세계의 존재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이 세계에서 이제껏 힘을 길렀다 하더라도 호보다 강한 힘을 가진 존재들은 대륙에 차고 넘쳤다.

“힘. 힘을 더 길러야 해.”

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유능한 인재를 손에 넣고, 고 랭크의 병사를 모으고, 마장기를 제작하고, 자신만의 강한 군대를 꾸려 이 세계를 정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계로 소환자들을 강제로 소환한 여신 라헬에게 복수를 한 후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다.

“…….”

호의 눈동자가 마족처럼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똑똑

“멜리아 비쉬 님?”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멜리아 비쉬가 들어오자 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 * *

“너무 일찍 떠나는 거 아니야?”

멜리아 비쉬가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리해서 호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의 그는 림드 산맥의 패자. 그는 위대하신 만마의 제왕 쉐르난비체 폐하의 소중한 영토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저도 더 머무르고 싶지만,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서요. 그런데 페릴 예노스 님은요?”

“볼 붸르니체스 각하의 명령에 따라 정찰을 나가셨어.”

“이거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게 되었군요.”

호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표정은 금세 사라졌다. 어차피 커티삭에서의 목표는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멜리아 비쉬를 통해 윈드 슈츠도 얻었고, 커티삭의 특산품인 미노타우르스의 장궁 또한 스무 상자나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특산품 상자들은 엘븐 템플러들이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었다.

“저 대신 페릴 예노스 님에게 인사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면 근시일 내에 또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호의 대답에 멜리아 비쉬가 다시 한 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볼 붸르니체스와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아마 며칠 간 커티삭에서 머무르면서 그녀와의 친분을 다지며 휴식을 취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근처에 볼 붸르니체스와 그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커티삭에 머무르는 게 불편 아니 싫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멜리아 비쉬는 싫은 건 아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커티삭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그렇게 커티삭을 떠나 엘븐 템플러들과 함께 아멘드마를 거쳐 코르다에 도착한 호는 엘 샤난에게서 받기로 했던 뷰트의 성목을 건네받고는 반나절 가량을 머문 후 곧바로 킬리드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바, 바로 떠나시는 건가요? 더 머무르셔도 되는데.”

너무나도 일찍 코르다를 떠나려는 호의 모습에 엘 샤난이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지만, 커티삭의 일 때문일까? 호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다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행동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수인의 존재는 그런 호의 행동에 어느 정도의 당위성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미안해. 수인과의 일 때문에 더 이상 영지를 비워놓기가 그래서.”

“아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호의 대답에 엘 샤난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호의 영토이기도 한 림드 산맥은 수인 왕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곳이었다.

“언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하세요.”

“고마워, 샤난. 조만간 다시 찾아올게.”

“네!”

다시 찾아온다는 호의 말에 엘 샤난이 활짝 미소를 지었고, 그런 샤난의 배웅을 뒤로 한 채 호는 코르다를 떠나 킬리드로 향했다. 코르다에서 킬리드까지의 거리는 엘븐 템플러의 속도로는 느긋하게 가도 오 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

“호 님! 킬리드의 성이 보입니다!”

그리고 멀리 킬리드의 모습이 보이자 엘븐 템플러가 외치듯 말했다. 그렇게 휘하 영웅의 승급을 위해 떠났던 붉은 핏빛의 대지 순회가 끝이 났다. 그리고 이번 일정은 호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일정이었다.

* * *

“여기 다이아몬드 세 개와…….”

호의 집무실에 찾아온 아스트리드 벨이 다이아몬드와 함께 조심스럽게 하나의 음식을 내밀었다. 혹시나 모양이 망가지지 않을까 꽤나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고소한 냄새와 함께 깜찍한 비주얼이 호의 눈을 사로잡았다. 바로 맛있어 보이는 딸기 파이였다.

“시현이가 요리했어요. 다행히 딸기 파이를 만들 줄 알더라고요. 한 번 먹어봤는데 맛도 굉장히 좋아요. 한 번 드셔 보시는 게…….”

“그래? 나중에 따로 해달라고 해야겠네. 이 딸기 파이는 쓸 곳이 따로 있어서 말이야. 어쨌든 다행이야.”

시현이 커티삭에서 요리사로 전직했던 경험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한시진이나 아스트리드 벨처럼 눈에 확 띌 정도로 활약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약방의 감초처럼 여기저기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한시진 만큼이나 활약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았다. S등급 영웅인 로우넨을 끌어 들였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그녀는 자신의 할 일을 200% 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제 한 번 칭찬을 해줘야겠어.’

지금쯤 자신의 애완동물이나 다름없는 사드나인과 함께 놀고 있을 시현을 떠올리며 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로써 엘 아르윈을 D등급 영웅으로 승급시킬 수 있는 아이템이 모두 갖춰졌다.

“아르테미스 상단이 생각보다 아이템을 빠르게 구해줬네. 얼마나 들었어?”

“다이아몬드 세 개와 딸기 한 상자를 구입하는 비용으로 35000리스를 사용했어요.”

“……어?”

별 생각 없이 특산품의 가격에 대해 물어보던 호는 아스트리드 벨의 대답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벨은 코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저 코웃음은 아르테미스 상단의 레드 벨벳에게 향하는 것 같았다.

“다이아몬드 세 개에 만 리스. 그리고 딸기 한 상자에 오천 리스요.”

“와…….”

절로 입이 쩍 벌어졌다. 폭리도 이런 폭리가 없었다. 호가 기억하기로는 다이아몬드는 개당 3, 400리스. 딸기는 한 상자 당 100리스에 불과했다.

“디르시나까지 운반하고 이것저것 부대비용이 붙어서 그렇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제대로 덤터기를 씌운 것 같더라고요.”

“쩝. 뭐, 어쩔 수 없지.”

기분은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호는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비싸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려니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미 디르시나는 상당히 많은 리스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 탓도 있었다. 어차피 상단을 통해 구입을 하는 게 아니고서는 엘 아르윈의 승급에 필요한 특산품인 다이아몬드와 딸기는 구할 방도도 없었다.

이미 호의 책상 위에는 뷰트의 성목을 비롯해 윈드 슈츠, 미노타우르스의 장궁까지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특산품들로 가득해 있었다. 그리고 호는 벨에게서 받은 다이아몬드와 딸기 파이 또한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나저나 갑자기 딸기 파이와 다이아몬드는 왜 구하라고 한 거예요? 간식으로 드실 것도 아니면서.”

호의 책상 위에 놓인 각양각색의 특산품을 보며 연한 에메랄드빛을 띄는 아스트리드 벨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호가 괜한 이유 없이 이런 특산품과 음식을 구해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호는 특산품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엘프의 영토를 거쳐 제법 멀리 떨어진 커티삭까지 직접 다녀오기까지 했었다.

“혹시 승급이라는 거 알고 있어?”

“승급요?”

호의 말에 아스트리드 벨은 고개를 저었다.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기는 했지만, 이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각이었다.

“응.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경험치를 얻어 클래스의 등급을 높일 수 있지. 그리고 클래스에 한계만큼 경험치를 사용해 능력 포인트를 높일 수 있고. 그건 알고 있지?”

“네. 내 능력이 능력치라는 수치에 얽매여 있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요.”

호의 말에 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느덧 이 세계에 발을 디딘 게 2년이 넘은 그녀는 처음의 멋모르던 여자가 아니었다.

“응. 하지만 이 세계의 영웅들은 달라.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경험치를 얻지 못해.”

“역시! 그랬군요.”

벨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호의 말은 그녀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점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의문이 지금에서야 풀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로우덴 같은 경우에는 영원히 S등급에 머무른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말을 마친 호는 아스트리드 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소환자들과 달리 이 세계의 존재들은 승급이라는 것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높일 수 있어. 승급을 통해 D등급 영웅이 C등급이 될 수 있고, 또한 B등급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

“그건 마치…… 게임 같은데요?”

아스트리드 벨의 말에 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이 세계는 게임 같으면서도 게임 같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호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승급을 위해서는 영웅 각자에게 맞는 특별한 아이템이 필요해.”

“……그 아이템이 지금 이 책상에 놓인 것들인가요?”

“맞아. 엘 아르윈을 승급시키는 데 필요한 아이템이지.”

“아?!”

아스트리드 벨이 놀란 표정으로 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궁금증은 전부 해결된 게 아니었다. 벨은 어떻게 호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고 또한 영웅에 맞는 특별한 아이템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벨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 밖에 똑똑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머지는 나중에 따로 설명해줄게.”

“……알았어요.”

지금 당장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했지만, 호가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해준다는 말에 아스트리드 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르셨어요?”

디르시나에 있는 호의 집무실을 찾은 인물은 킬리드의 영주이자 엘프 영웅인 엘 아르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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