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리그너스 대륙전기 113
‘돈만 주면 다 될 줄 알았는데.’
리셴르나와 볼 붸르니체스의 등장으로 인해 일이 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었다. 볼 붸르니체스의 군대는 언젠가 물러날 테고 그 후라면 멜리아는 다시 환락가 건설에 열중할 터였다.
어느새 호와 멜리아 비쉬는 커티삭의 대로를 지나 페릴 예노스가 거주하는 성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커티삭에는 어쩐 일로 온 거야?”
“필요한 물품이 생겨서요. 구입도 하고 겸사겸사 두 분의 얼굴도 뵐 겸 왔습니다.”
“흐흥. 내가 보고 싶었던 거지?”
“뭐, 그런 면도 없잖아 있죠?”
도발적인 서큐버스의 말을 호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지금의 자신은 예전과는 달랐다. 림드 산맥의 패자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여기에 빨리 A등급 클래스인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로도 전직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100 번의 전투 승리라는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언제 달성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멜리아 비쉬 님, 오셨습니까?”
호가 멜리아 비쉬와 함께 성 안에 들어서자 검은색의 시녀 복을 입은 다크엘프가 다가와 말했다.
“페릴 예노스 님은 안에 계시지?”
“네, 그렇습니다.”
“자, 가자.”
메이드의 대답에 멜리아 비쉬가 재빠르게 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 그런데…….”
뒤에서 메이드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이미 호는 멜리아 비쉬의 손에 잡혀 페릴 예노스의 집무실이 있는 3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페릴 예노스 님! 들어갈게요! 누가 왔는지 보세요!”
집무실에 도착한 멜리아 비쉬는 노크를 하는 둥 마는 둥 그대로 페릴 예노스가 있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왜 자리에 가만히?”
그리고 자신 있게 문을 열고 난 후 얼어붙은 멜리아 비쉬의 모습에 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한걸음 발걸음을 옮겨 집무실 내부를 바라보았다.
집무실에는 페릴 예노스와 함께 넓은 집무실에 좁게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덩치를 지닌 미노타우르스가 앉아 있었다.
“으음?”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미노타우르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호와 멜리아 비쉬를 바라봤다.
‘설마?!’
그 순간 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야 했다. 익숙한 얼굴의 미노타우르스였다. 아니, 저 미노타우르스는 분명 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심연의 미노타우르스라는 별명을 지닌 마족의 S등급 영웅 볼 붸르니체스가 틀림없었다.
“멜리아! 이게 무슨 실례야!”
손님이 있는 와중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멜리아 비쉬를 향해 페릴 예노스가 질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페릴 예노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볼 붸르니체스가 거친 콧김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인간. 너는 누구지?”
뿔이 달린 거대한 미노타우르스, 볼 붸르니체스가 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S등급의 영웅답게 그의 묵직한 중저음에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볼 붸르니체스 각하. 저는 윤호라고 합니다. 여신 라헬로 인해 2년 전에 소환된 소환자입니다.”
“윤호? 아아. 기억나는군. 림드 산맥의 패자. 저번에 리셴르나를 제대로 엿 먹였다지? 이거 만나서 반갑군.”
호의 대답에 볼 붸르니체스가 껄껄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호의 몸의 몇 배나 되는 덩치가 움직이자 집무실이 가득 차는 착각이 들었다.
볼 붸르니체스. 예전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그는 마족을 정복하려는 호 제국의 황제였던 자신의 앞길을 끝까지 막아섰던 마족의 영웅이었다. 비록 S등급에 불과하긴 했지만, 등급을 뛰어넘은 엄청난 용맹에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볼 붸르니체스는 종족의 명운을 걸고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대적을 하던 그때의 영웅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자르 T 스테르를 보내 수인족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에 빠져 있었던 안테로리를 1년간이나 지켜줬던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이거 귀한 손님이 찾아왔군. 그러고 보니 페릴 예노스, 자네가 위대하신 쉐르난비체 폐하의 지시에 따라 소환자들을 맡고 있었지?”
“네, 그렇습니다. 볼 붸르니체스 각하. 지금은 림드 산맥의 패자로 감히 제가 쳐다보기도 힘든 존재가 되었지만요.”
페릴 예노스가 흘깃 호를 바라봤다. 잠시간이기는 했지만, 반가움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꼬리가 살짝 원 모양을 그리는 게 호의 눈에 보였다.
“그런데 림드 산맥의 패자가 어쩐 일이지? 나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페릴 예노스 님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네, 그렇습니다.”
대답과 함께 호는 차분하게 자신이 커티삭에 찾아온 이유를 꺼내기 시작했다. 커티삭의 특산품인 미노타우르스의 장궁을 구매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윈드 슈츠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페릴 예노스는 던전을 공략한 후에 획득한 아이템인 윈드 슈츠를 보유하고 있었다.
“별로 필요 없는 물건이라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고작 이걸 얻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그것도 엘프의 영지를 통해서?”
“엘븐 템플러들을 이끌고 온 터라 딱히 엘프의 영지를 통과하는 데 문제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커녕 오히려 코르다에서는 환영을 받기까지 했었다.
그뿐인가? 발전도가 떨어지는 붉은 핏빛의 대지에 있는 엘프의 영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 랭크의 병사들인 엘븐 템플러로 병력이 구성된 탓인지, 엘프가 사는 곳을 지날 때마다 주위의 엘프 주민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흐음. 통과라. 그렇다면 자네는 마음대로 불쑥 엘프들의 영지를 오갈 수 있단 말인가?”
호와 페릴 예노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볼 붸르니체스가 불쑥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강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호기심에서 불길함을 느낀 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각하. 사전에 엘프들의 허락을 맡아야 합니다.”
“마음대로 통과할 수는 없단 말이로군.”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볼 붸르니체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대는 마족이 아닌 엘프로 군대를 구성한 거지? 그대는 우리 마족의 소환자가 아니던가?”
‘……?!’
순간 들었던 불안감이 이것이었던가?
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볼 붸르니체스는 지금 자신에게 추궁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마족의 소환자가 마족의 병사가 아닌 엘프들의 병사를 지휘하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상대는 S등급의 영웅.
게다가 여기는 마족의 영지인 커티삭이었다. 어떻게든 대답을 잘해 부드럽게 이 상황을 넘어갸아 했다.
“맞습니다. 저는 선택의 신전에서 위대하신 마왕 쉐르난비체 폐하의 선택을 받은 몸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족이 아닌 소환자입니다.”
호의 대답에 볼 붸르니체스가 우악스러운 얼굴을 찌푸렸다. 계속 이야기를 해 보라는 의미였다. 볼 붸르니체스와 마주치며 굳어 있던 멜리아 비쉬는 어느새 조심스레 페릴 예노스의 근처로 이동해 있었다.
‘뭐라 말을 해야 되나…….’
하지만 볼 붸르니체스의 커다란 눈동자가 가늘게 변하는 모습에 호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종족에 관계없이 타 종족의 병사 또한 양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제가 소환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병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우리의 병사가 약하다는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묘한 차이라도 적들에게 더욱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이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크흠.”
커다란 미노타우르스의 코가 벌름거렸고, 호는 다시 한 번 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볼 붸르니체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말대로 우리 병사들도 용맹하기는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귀쟁이나 동물 녀석들보다 못한 게 있는 게 사실이긴 하지.”
볼 붸르니체스의 말에는 약간의 살기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마족의 병사들이 아닌 엘프의 병사들을 양성해 군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어떠한 오해를 산 것 같았다. 마족의 소환자지만 곧 엘프 쪽으로 배신을 할 것이라는 그런 오해 말이다.
아니, 오해가 아니라 볼 붸르니체스는 지금 자신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정예 실리스 부대를 보유하고 들었네.”
“어둠 속에서의 은밀한 움직임은 그 어떤 종족도 다크 엘프를 따라올 수 없습니다. 랭크는 낮지만 정찰병으로 아주 유용한 병사들이었다.”
“그렇지.”
호의 대답에 거대한 미노타우르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정예 실리스들 마저도 없었더라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오해를 살 뻔했다. 아무리 자신이 림드 산맥의 패자라고는 하지만, 몇 개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마족의 실력자 볼 붸르니체스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움직인다면 코르다에 주둔하고 있는 엘프 군단을 어렵지 않게 박살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행동을 조심해야겠어.’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였다면 이런 오해는 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었다. 유저로써는 아무 이상도 없었던 일들이 생각지도 못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소환자들도 자네처럼 다른 종족의 병사들을 양성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근 수인족의 소환자 한 명을 포로로 붙잡아 아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아군으로 만들었다면?”
“설득을 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저와 같은 세계에서 소환된 소환자인 터라 설득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대화는 호와 볼 붸르니체스 둘만 하고 있었다. 페릴 예노스와 멜리아 비쉬는 조용히 둘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그 소환자로 하여금 병사들을 양성하라는 명령을 내려 봤고, 그녀 역시 다른 종족의 병사들을 양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이는 림드 산맥의 영주가 호 본인이기 때문이었다. 수인들의 소환자였던 윤아가 다른 종족의 병사들을 양성할 수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가상현실게임 내에서는 유저가 자신이 소속된 종족의 병사가 아닌 타 종족의 병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타 종족의 영웅을 휘하에 두어야만 했다. 하지만 게임이 아닌 이 세계에서 타 종족의 영웅을 휘하에 두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 오너 시스템이 있었지.’
하지만 이 세계에서 오너 시스템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소환자가 오너 시스템에 대해 자각을 해야 했고, 상대 영웅을 손에 넣는 방법 역시 까다로웠다.
볼 붸르니체스는 계속해서 호에게 소환자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물어봤다. 그는 소환자를 직접 보는 게 호가 처음이라고 했는데, 그럴법한 게 마족의 1회 차 소환자인 호 일행은 전부 림드 산맥 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림드 산맥은 마족의 영토이기는 하지만, 또한 독립된 영토이기도 했다. 아멘드마와 코르다라는 엘프의 영지로 인해 직접적으로 마족의 영지와 연결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런데 2회 차 소환자들은?”
“아아. 두 놈이 있다고 들었지.”
‘놈……?’
아마 남자 두 명인 것 같았다. 그리고 윤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족의 소환자들은 선택의 신전에서 보여줬던 쉐르난비체의 광기로 인해 그 자리에서 많은 수가 죽어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중 살아남은 숫자는 고작 둘 밖에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 놈은 이미 죽었어. 북동쪽에서 벌어진 정령과의 전쟁터에 보냈는데 몸이 녹아버렸다고 하더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호는 이 이상한 세계에서 죽어버린 소환자에 대해 잠시간 명복을 빌었다. 이 세계에 소환되자마자 전쟁터라니.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버틸 수 없었을 터였다.
“나머지 한 놈도 반 쯤 미쳐버렸다고 하더군. 소환자라고 하지만 인간들의 정신력은 꽤나 연약한 모양이야. 바로 옆에서 소환자가 요정의 가루에 녹아버렸다고 해도 그렇게나 쉽게 미쳐 버릴 줄이야.”
“그래서 그 소환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나야 모르지.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죽었을지도?”
말과 마친 볼 붸르니체스가 씨익 웃었다. 호는 그 모습이 소환자의 죽음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모습으로 보였다.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뭐, 그런 녀석들과 자네는 상황이 다르지. 자네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림드 산맥의 패자니까 말일세.”
“칭찬 감사합니다. 각하.”
볼 붸르니체스의 말에 호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바닥을 바라보는 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신 라헬로 인해 이 세계에 끌려온 소환자.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 소환자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충분히 희생시킬 수 있는 존재 말이다.
그리고 림드 산맥의 패자인 자신 또한 이들에게는 소환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