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리그너스 대륙전기 111
한시진은 노래를 부르는 윤아를 보면서 윤호의 말을 생각했다.
‘부탁해, 시진아. 저 애만 보내기에는 영 미덥지 않아서.’
비록 A랭크 병종 다수를 붙여주기는 했지만, 지휘관의 패닉이 전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저번 전쟁에서 톡톡히 드러난 탓에 호는 윤아에게 한시진을 붙여준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번 던전 토벌은 한시진이 대장이고 윤아가 부장이었다.
“그…… 선배님?”
“언니라고 해요.”
“아, 감사합니다.”
조금 부드럽게 느껴지는 한시진의 말에 마음을 가라앉힌 윤아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정말로 죽는 거잖아요. 아픔도 느껴지고, 무섭고 두렵고. 저희들이 있던 세계에서는 전쟁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그래서 더 무서워요. 집에도 돌아가고 싶고 부모님도 보고 싶은데…….”
“나도 그래요. 동생과 함께 빨리 원래 살던 곳을 돌아가고 싶어요.”
“동생, 아. 선배 아니 언니는 동생과 함께 오셨다고 했죠?”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동생과 함께 이 세계로 끌려 왔다고 했다. 윤아는 그런 한시진의 상황이 불행하게 느껴지면서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천족으로 끌려간 친구와 지금 함께 있었다면? 뭔가 힘이 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언니로서 충고 하나 할게요. 이 세계가 무섭고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자신의 실력을 키우세요. 아무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우면 두려움이 사라질 거예요.”
“저도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게다가 이 세계는 경험치와 능력 포인트라는 이상한 힘도 있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한시진은 자신의 예전 모습을 떠올렸다. 이 세계에 처음 끌려 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자신과 동생의 안전을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심지어 현실 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요리까지 해야만 했다. 그것도 검은색의 꼬리를 가지고 있는 괴물, 서큐버스의 성에서 말이다.
하지만 윤호가 페릴 예노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한시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호 오빠를 믿어요. 정말 대단한 남자니까요.”
“아, 네.”
엄숙함까지 느껴지는 한시진의 말에 윤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그가 무슨 행동을 했기에 이렇게 멋진 여자가 호를 따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윤아는 곧 자신의 생각을 고쳤다. 한시진도 대단했지만, 윤호 또한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네 번이나 클리어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한 지역의 패자도 되었겠지?’
게다가 디르시나에서 로우덴이라는 멋들어지게 생긴 개님이 이런 말도 했었다.
‘호 님은 단 이 년 만에 빈손으로 한 지역의 패자로 올라선 분입니다. 게다가 뛰어난 지력으로 수인족의 군단을 막아내기까지 했죠. 그것도 리셴르나라는 수인족의 상급대장이 이끄는 군단이었습니다.’
리셴르나라는 수인 영웅에 대해서는 윤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 세계로 끌려오기 전 동기 중 하나가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한시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곳이 레더 슬레이브로군요.”
한시진이 가리킨 방향으로 윤아도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별 모양으로 생긴 동굴의 입구가 그녀의 눈에도 보이고 있었다.
“E등급 던전인 만큼 강한 몬스터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A랭크 병사들인 엘븐 템플러로 군대를 구성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네, 넷!”
“어차피 직접 전투를 치르는 게 아니라 멀찌감치 뒤에서 마법을 사용하면 되니까 경험치를 얻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엘븐 템플러 오십 가량도 호위병으로 붙여줄게요. 겁먹지 말고요.”
윤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스태프를 꽉 부여잡았다. 호가 준 이 스태프는 C등급의 아이템이었다. 호가 던전 토벌에서 얻었다는 아이템이라는데, 현재의 자신에게는 굉장히 과분한 스태프였다.
“무서우면 굳이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니까. 멀찌감치 떨어져도 구경이라도 해요. 어차피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세계의 전투가 어떤 것인지 느끼는 거니까요.”
“알았어요, 언니.”
“분명 힘들 거예요. 하지만 포기해서는 안 돼요.”
한시진의 말에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녀처럼 몬스터들과 다른 적들과 전투를 벌일 수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윤아는 무언가를 죽이고, 몬스터들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른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투라는 것을 계속 경험하다 보면 뭔가 달라질지도 몰랐다.
“…….”
스태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킬리드는 어때?”
“죄송해요. 아직 특산품까지는 개발하지 못했어요.”
킬리드의 영주, 엘 아르윈의 대답에 호는 고개를 주억였다. 어차피 예상했던 결과였다. 호는 킬리드에 달랑 E등급 영웅인 엘 아르윈 하나만을 배치했었다. 당연히 그녀 혼자 특산품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시에 어울리는 특산품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데다가 어떻게 해야 생산할 수 있는지 모조리 알고 있다 하더라도 특산품의 생산을 위해서는 도시 내에 많은 건축물들을 완공해야 했다. 가뜩이나 능력치도 떨어지는 영웅인 엘 아르윈 혼자서는 해내지 못한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D등급 영웅으로 승급하면 조금 나아지려나?’
뭐, 별다른 차이는 없을 것 같았다. 영지 건물 건설 속도가 조금 빨라지기는 하겠지만, E등급이나 D등급이나 능력치는 도긴개긴이었다. 그래도 E등급보다는 D등급이 나았다.
“지금쯤이면 아이템을 얻었을 것도 같은데…….”
킬리드의 영주성에서 나오면서 호는 한시진과 윤아를 떠올렸다. 엘븐 템플러 삼천과 함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장기까지 딸려 보냈다. 그것도 E등급 던전의 공략에 말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던전 공략을 마쳤을 텐데, 게임처럼 공략에 성공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아서일까? 당장 소식을 알 수 없다는 게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디르시나를 떠나 백 명의 호위병들과 함께 호가 향하는 곳은 바로 코르다였다. 킬리드는 코르다로 가기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도시였다. 그리고 호가 코르다를 방문하는 이유는 바로 영웅들의 승급 작업 때문이었다.
“윤호 님!”
엘븐 템플러들과 함께 코르다 성에 도착한 호의 앞에 나타난 건 코르다 성의 영주 엘 샤난이었다. 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환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오랜만이야, 샤난.”
“네! 오랜만이에요.”
퀘스트를 완료했기 때문일까? 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는 다소 오버한다 싶을 정도로 크게 반응하고 있었다.
중간에 엘프의 A랭크 병사인 엘븐 템플러 부대가 코르다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는지 엘 아스린이 엘 샤난을 찾아왔다가 윤호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으며 ‘오랜만이로군. 그럼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이라는 말과 함께 떠나가기도 했다.
“어, 어떻게 지내셨어요? 수인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걱정 많이 했는데. 다치신 곳은 없죠?”
“응. 다행히 전쟁은 승리했어. 아, 샤난이 그때 도와준다고 했었지? 미안해. 차마 샤난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어서 거절했어.”
사실 엘프의 군단도 아니고 고작 E, F랭크의 병사들만 보유한 엘 샤난의 병력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거절한 거지만, 굳이 그런 말을 꺼내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다.
“다행이에요. 윤호 님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세계수님에게 매일 기도했어요.”
“고마워, 샤난.”
호가 미소를 짓자, 엘 샤난 또한 방긋 웃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코르다까지 오셨어요?”
“사실 아멘드마를 거쳐서 커티삭으로 가려고.”
“커티삭에요?”
엘 샤난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커티삭은 마족의 영지였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기는 했지만, 윤호는 마족의 소환자였다. 샤난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호 님이 우리 엘프들의 소환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눈까지 글썽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게.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
“아아…….”
“어쨌든 지금의 나는 마족의 소환자야. 그리고 커티삭의 영주인 페릴 예노스와 친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에 엘 샤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호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뭐, 이번에 커티삭을 방문하는 것은 커티삭에서 구입해야 될 물품이 있어서야.”
“커티삭에서 구입할 만한 물품? 아, 미노타우르스의 장궁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딩동.”
커티삭의 특산품인 미노타우르스의 장궁은 엘 아르윈을 승급시키기 위한 특산품 중 하나였다. 아니 그녀뿐 아니라 등급이 낮은 엘프 영웅을 승급시키는 데 있어 공통적으로 필요한 특산품이기도 했다. 결국 많이 구해놓으면 구해놓을수록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터였다.
“그런 일이라면 호 님의 휘하에 있는 분들에게 명령을 내리셔도 되지 않나요? 어째서 호 님이 직접?”
“당연히 샤난을 보기 위해서지.”
“아, 그…… 그랬군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호의 대답에 샤난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샤난의 반응을 보며 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정말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호가 직접 커티삭까지 미노타우르스의 장궁을 구입하러 가는 것은 중간에 코르다에 들려 엘 샤난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커티삭에는 자신이 공략해야 할 영웅이 하나 있었다. 엘 샤난처럼 퀘스트를 완료해 호감도를 높여야 하는 영웅. 브뤼헤아 비쉬 출신의 서큐버스였다.
“샤난. 코르다에는 뷰트의 성목이 생산된다고 들었어. 맞아?”
“아? 네. 맞아요. 하지만 코르다는 아직 발전도가 부족해서 생산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이 센티널이자 어머님이 계신 아멘드마에는 소량이지만 뷰트의 성목이 생산되고 있기는 해요.”
“역시…….”
뷰트의 성목. 엘프의 S랭크 보병인 아벨리우스를 양성하는 데 필요한 특산품 중 하나였다. 그리고 미노타우르스의 장궁과 함께 엘프 영웅인 엘 아르윈의 승급에 필요한 물품이기도 했다.
사실 뷰트의 성목은 엘 아르윈의 승급 뿐 아니라 대다수 엘프 영웅들의 승급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특산품이었다. 단지 승급을 하려는 영웅의 등급에 따라 그 수량이 조금 달라질 뿐이었다.
“그런데 뷰트의 성목은 왜요?”
엘 샤난의 말에 호는 조그마한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근 뷰트의 성목이 필요할 일이 생겼는데,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없어서. 상단을 통해 알아보기는 했는데, 매물이 없더라고.”
“아아, 그럴 거예요. 뷰트의 성목은 전량이 유스타시아 여왕님이 계신 곳으로 수송되거든요.”
“그래? 나는 특산품을 판매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유스타시아 여왕님 휘하의 상단에서 구입을 하니까요.”
샤난의 대답에 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신음성을 터뜨렸다.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부 유스타시아가 있는 곳으로 수송된다니.
아마 엘프들의 S랭크 병사인 아벨리우스의 양성에 사용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혹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에 사용된다거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