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리그너스 대륙전기 110
“뭐, 어차피 예상했던 거니까. 그리고 그 둘은 굳이 승급 안 시켜도 충분히 쓸 만하잖아?”
괜한 혼잣말로 위안을 삼으며 호는 그 둘의 승급에 필요한 다른 아이템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혹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나 특산품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개다래나무? 승급시키는 데 이런 건 또 왜 필요 한 거야? 얼씨구, 프리스비? 이거 원반 아닌가? 로우덴 녀석을 승급 시키는 데 원반은 또 왜 필요 한 거지? 아니, 이런 아이템도 특산품으로 나오는 건가?”
공략본을 볼수록 호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깃들고 있었다.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들의 이름이 장난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유치하고도 황당한 네이밍 센스는 KOREA사 게임의 특징 중 하나였고, 일명 아재라 불리는 어르신들은 이런 개그센스에 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것이 아닌 판타지 소설처럼 실제 리그너스 대륙에서 생활하는 호로서는 고운 말이 입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심지어 현재 진실의 현자라는 S등급 직업을 지니고 있는 로우덴이 승급을 하게 되면 100%의 확률로 갖게 되는 직업의 명칭을 확인한 호는 슬며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로우덴(수인족)-림드 산맥에서만 영입 가능한 수인 영웅으로 등용 시부터 S등급입니다. 영입 난이도는 낮지만 S등급이라는 클래스와 아름다운 능력치로 보유한 탓에 수인으로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필히! 브로리와 함께 가장 먼저 챙기셔야 할 영웅 중 하나입니다. 원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암살에 목숨을 위협받고 있으며, 일찌감치 등용을 하지 못할 경우 사망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로우덴의 SS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
-프리스비(골든 크로우의 영토 중 하나인 탄식의 평원에 위치한 던전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수인족의 정수(수인족의 수도인 사파리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9 강화된 미스릴 뼈다귀(뼈다귀는 스켈레톤류가 나오는 던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드워프 공방(필수)을 건설해 미스릴 특산품이 있거나 상인에게서 구입해 미스릴을 덧씌운 뒤 +9강까지 직접 하셔야 합니다)
-최고급 학우선(수인 왕국의 부족 중 하나인 원인족의 타레스가 가지고 있습니다. 타레스를 동료로 만들거나 탈탈 털어서 뺏어주시면 됩니다.)
-+9 강화된 철 수레(만들기가 가장 쉽습니다. 대장간에서 제작 후 강화만 직접 하시면 됩니다.)
-팔진도서(구하기가 까다롭습니다. 장난의 평원에 있는 S등급의 던전 오장원을 클리어 해야 얻을 수는 보상입니다.)
<로우덴이 SS 승급 시 얻을 수 있는 클래스>
-‘세계를 손아래에 둔 책사–제갈공멍’ / 100%의 확률로 전직합니다.(유니크 클래스)
[통솔 SS급, 지력 SSS급, 무력 B급, 정치 S급, 매력 S급]
<로우덴의 SSS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
…….
“제갈공멍? 삼국지야 뭐야? 아니, 제갈공명이 키운 개야?”
공략본을 보던 호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렇게 로우덴과 리아 캬베데의 정보를 보던 호는 그나마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등급이 떨어지는 영웅들의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휘하에 있는 영웅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승급에 필요한 물품이 다수의 영웅들에게 겹치는 것들도 있었고, 인맥을 통해 구해야 하는 것도 몇 개 있었기에 어느 영웅을 승급 시킬 지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승급을 시키는 데 있어 그나마 가장 쉬울 것 같은 두 영웅을 선택한 호는 자신이 정리한 것을 종이에 적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영웅들의 직업 클래스 등급을 한 단계 상승 시키는 승급. 이건 호 혼자서 모든 걸 하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호가 찾아간 인물은 디르시나에서 유일하게 놀고 있는 영웅인 신윤아였다. 원인족의 전쟁이 끝난 이후 그녀는 호를 따라 디르시나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호는 따로 그녀에게 어떤 일을 맡기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일단 2회 차 소환자라는 것을 감안해 이 세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적응을 하라는 의미에서였다.
“승급 작업이요?”
“그래. 너도 해본 적 있을 거 아냐.”
“아, 아뇨. 그런 것도 있어요? 그리고 저 에디터로만 게임 플레이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윤아의 모습에 호가 황당한 듯 물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 해 본 게이머로서 승급 작업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승급작업 몰라? 들어본 적도 없어?”
“어……. 잠깐 사이트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거 영웅들 클래스 등급 업 시키는 거죠?”
“그래. 잘 알고 있네.”
“그, 그렇긴 한데 한 번도 해보지는 않았어요…….”
호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와 비례해 윤아의 표정도 따라서 변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슴 같은 눈망울에 불안함이 서서히 깃들기 시작하는 모습에 호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자신을 제외하고 여기서 유일하게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해 아는 애라 도움을 좀 요청하려고 했는데, 에디터만 사랑하는 반쪽짜리 게이머였다. 결국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승급 작업이 대충 뭔지는 알지?”
“네. 아이템을 모아서 가져다주면 클래스가 상승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 그리고 필요한 아이템이 여섯 종류라는 것도요.”
“음음.”
학생의 대답을 듣는 선생님처럼 호는 어느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호의 모습에 말을 하던 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떤 아이템이 필요한지는 영웅마다 다른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거 어떻게 승급을 시키려고요? 제가 알고 있는 건 하나도 없는데…….”
걱정스러운 윤아의 말에 호는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였다. 그 정도쯤이야. 호에게는 ‘관우는 내 여자’의 만능 공략본이 있었다. 그리고 공략본에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름과 승급 작업에 필요한 아이템 및 승급을 했을 경우 확률적으로 어떤 클래스로 전직하는지 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진짜 공략본이 신의 한수였다.’
만약 공략본이 없다면 영웅들의 승급 작업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정말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몇몇 영웅들을 제외하면 각 영웅마다 승급에 어떤 아이템과 특산품이 필요한지 기억하고 있을 유저는 없을 테니 말이었다.
“아아. 나 같은 폐인은 제법 기억하고 있는 게 많단 말이지.”
“폐인요?”
“응.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네 번이나 클리어 했으면 폐인이지. 한 마디로 게임에 영혼을 바쳤다고나 할까?”
“…….”
호를 바라보는 윤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호가 했던 말이 농담이었다고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말이었나?’
사실 진 엔딩을 본 것은 한 번 밖에 없었지만, 소소한 C, D급 영웅들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자신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목숨을 바친 폐인이라고 설명해 두는 것이 그녀를 이해시키기 편할 것 같았다.
“저, 정말 대단하네요. 제 주위에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푹 빠진 애들이 있긴 한데, 오빠만큼의 폐인은 없었어요!”
싸우자는 건가? 뭔가 기분이 굉장히 나쁘기는 했지만 박수까지 치며 활짝 웃는 윤아의 모습을 보니 차마 화를 내기도 민망했다.
“큼. 어쨌든 너 여기 있는 영웅들이 누구누구 있는지 다 모르지?”
“네. 선배님들은 다 알고 있기는 한데.”
“선배님?”
“그 저보다 먼저 이 세계에 오신 분들이요.”
“아아…….”
선배. 1회 차 소환자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선배라?’
굉장히 독특하게 느껴지는 호칭이었다. 어쨌든 호는 천천히 윤아에게 림드 산맥에 있는 자신의 영웅들에 대한 설명을 하나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현재 에스트라다에 머무르고 있는 리아 캬베데나 리젤은 그녀도 알고 있는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엘 아르윈이나 엘 라디아, 진 카라얀, 케반스와 같이 디르시나와 에스트라다에 머무르지 않는 영웅들과는 안면을 튼 적이 없었다.
“네, 네.”
그리고 윤아는 그런 호의 설명에 수첩처럼 보이는 종이에 동료 영웅들의 특징과 인적사항에 대해 열심히 적어 나가고 있었다. 왜 그런 것을 적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호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내가 말한 영웅들 중에서 승급을 시키려고 하는 영웅은 두 명이야. 현실적으로 승급이 가능한 애들이기도 하지.”
“누구요?”
“엘 아르윈과 리젤.”
“E등급 영웅하고 D등급 영웅이네요?”
“그렇지.”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 아르윈. E등급에 불과한 그녀는 현재 호의 휘하에 있는 영웅 중 가장 등급이 낮았다. 그만큼 승급을 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둘 다 여자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리고 수인은 여자가 아니야. 동물이지.”
“제 주위에는 수인 하면 네코짱! 거리면서 하악하는 애들도 제법 있었어요. 그 누구지? 되게 예쁘게 생긴 고양이 있었는데, 리셴르나였나? 걔랑 결혼한다고 게임을 하는 애도 있었는걸요?”
“…….”
대체 저 애의 주위에는 어떤 녀석들이 있던 거지? 호의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날 그런 놈들하고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라. 어쨌든 영웅들을 승급시키기 위해서는 특산품이나 아이템이 필요하겠지?”
“네.”
“그럼 지금부터 적어.”
긴장한 모습으로 자신의 입을 주목하는 윤아의 모습을 보며 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웅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 혹은 특산품을 구하는 것은 일명 노가다라는 작업이 필요했다.
‘꼬봉 하나 구했고.’
그리고 윤아는 자신을 대신해 그런 노가다를 해줄 인물이었다. 승급 작업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만큼 승급 작업을 이해시키기 위해 귀찮게 그리고 심도 깊게 설명을 해 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림드 산맥이 아니면 갈 곳도 없는 만큼 자신이 시키는 일에는 무조건적으로 따라야만 했다.
그렇게 승급 작업이 시작되었다.
* * *
“그림카를 타고 달리자! 넌 내 옆자리에 앉으렴. 그저 내 이끌림 속에 모두 던져 버려!”
낭랑한 노랫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노래의 주인공은 윤아였다. 현재 그녀는 삼천의 엘븐 템플러들을 이끌고 림드 산맥의 던전 중 하나인 레더 슬레이브로 향하고 있었다.
‘먼저 레더 슬레이브에서 생명나무의 가죽 갑옷을 구해줘. 엘 아르윈의 승급 아이템인데 그걸 3강까지 해야 돼. 일단 구해오면 강화에 필요한 마정석과 해양석석은 내가 구해 놓을게.’
호의 말에 따라 레더 슬레이브에서 나오는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윤아는 이런 호의 지시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던전을 공략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림드 산맥의 레더 슬레이브는 E등급의 던전에 불과했다.
고작 그런 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A랭크 병사인 엘븐 템플러가 무려 삼천이나 함께하고 있었지만, 윤아는 이 세계의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던전이 가까워질수록 윤아가 부르는 노래 가사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목소리에 두려움이 담겨 있네요. 무섭나요?”
“아, 네. 조금요.”
아름다운 미녀가 옆에서 말을 걸자 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녀를 바라봤다. 1년차 소환자이자 이 세계의 거대한 병기인 마장기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여인인 한시진이었다.
“…….”
천과 가죽이 반쯤 섞인 붉은색의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용감한 기사와도 같은 느낌을 윤아에게 주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수인들의 마장기를 모조리 박살 낸 키마라이의 오너이기도 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 경력 때문일까. 한시진에게는 전투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