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리그너스 대륙전기 107
쿠웅!
4m가 넘는 크기의 거대한 고릴라가 다리에 무게를 싣고 몸을 곧추세웠다. 그러자 고릴라의 어깨에 있는 조그마한 원숭이 한 마리가 우끼깃 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시…… 시키시는 대로 다른 종족들의 병사는 모두 희생시켰습니다!”
재배는 버독의 명령을 충실히 달성했다. 하지만 너무 충실하게 명령을 달성한 게 문제였다.
다른 종족들의 병사만 잃었으면 좋으련만 그는 B등급 마장기 릴라릴라를 포함해 카니앗산까지, 버독이 보내주었던 마장기 전력까지도 모두 잃은 것이다.
이로 인해 수인 왕국 아니 원인족이 입은 마장기의 피해는 무려 아홉 기. 리스로만 따지면 10억 리스가 훌쩍 넘는 돈이었다.
그렇다고 에스트라다를 빼앗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림드 산맥 전체를 탈환해도 이는 엄청난 손해였다.
게다가 마장기를 잃었어도 림드 산맥을 탈환했다면 원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이라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에스트라다 전투에서 원인들의 군대는 패배했다. 그것도 처참한 패배였다. 마족들의 병사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마장기 전력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불구하고 져 버린 것이다.
하물며 에스트라다를 지키는 마족의 전력은 꼴랑 키마라이 한 대를 포함해 만 명에 가까운 병사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병사들의 피해만 약 4만가량에 아홉 기의 마장기 파괴됐다.”
“제가 잃은 건 다섯, 다섯 기뿐입니다!”
“아, 그래?”
재배의 변명에 버독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우끼. 맞습니다. 카니앗산 네 기는 소환자라는 여자가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크후…….”
자신의 참모인 타레스의 말에 버독은 커다란 손을 얼굴을 감쌌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스트라다 전투에서의 패배가 다른 수인 부족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원인족의 체면은 바닥까지 떨어질 터였다.
“크흐.”
버독의 거친 숨소리가 공터 안에 울려 퍼졌다. 또한 이 소식이 사파리에 있는 족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엄청난 잔소리가 쏟아질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
버독이 원인족의 머리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참모 타레스에게 물었다. 가끔 이상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타레스는 버독이 생각하기에 원인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다.
“뭐라도 한 가지 성과를 보여야 합니다. 에스트라다를 빼앗거나 디르시나까지 점령했다는 성과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 원인들이 다른 종족들에게 면목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런데, 어떻게? 내가 직접 출진해야 되는 건가?”
“으음…….”
버독의 말에 타레스는 자신의 꼬리를 좌우로 강하게 흔들었다.
원인족의 부족장인 버독이 직접 출진해 림드 산맥을 다시 되차지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재배와 패잔병들의 말에 따르면 림드 산맥의 마족에게는 에이스급의 굉장히 뛰어난 마장기의 오너가 있다고 했다.
물론, 버독의 전투 능력은 대단했다. 괜히 그가 원인족의 부족장을 맡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버독이라 할지라도 여덟 대의 마장기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는 건…….’
타레스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결국 마족의 마장기를 움직이는 마장기사는 버독보다도 훨씬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만약 버독이 출전했는데, 패배했다? 그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림드 산맥을 넘어 나크 평원까지 마족이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원인족은 사파리의 대회의에도 참가하지 못하는 평범한 수인 부족으로 전락할 게 분명했다.
“우끼우끼. 버독 님이 직접 출진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원래 최종 보스는 나중에 나서는 법입니다.”
“크흠. 그런가?”
타레스의 말에 버독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새였다. 몸이 근질근질하기라도 한지 버독은 타레스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손을 움켜쥐었다가 푸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족의 전력은 우리 예상보다도 강한 것 같습니다. 얕볼 수는 없습니다. 고로 우리도 정예를 보내야 합니다.”
“흐음?”
의아한 표정을 짓는 버독을 향해 타레스가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말했다.
“그리고 저는 에스트라다 공략을 브로리에게 맡기는 것을 추천합니다. 우끼.”
“브, 브로리!”
둘의 이야기를 듣던 재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내질렀다.
브로리. 한때 버독과 함께 수인족의 부족장을 두고 싸우던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 잔인하고 폭력적인 성격으로 인해 많은 원인족들의 미움을 받아 부족장 직은 버독에게로 돌아갔고, 지금은 패렛 습지대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를 대장으로 맡고 있는 영웅이었다.
“브로리를?”
타레스의 말에 놀란 것은 버독도 마찬가지였다. 브로리. 그 포악한 원숭이는 원인족의 부족장인 자신도 다룰 수 없는 녀석이었다.
“우끼깃. 그렇습니다. 브로리의 잔인함과 과감성이라면 어떻게든 마족들에게 큰 피해를 줄 게 분명합니다.”
“잠깐, 그렇게 되면 브로리가 모든 공을 독차지하잖아?”
타레스의 말에 버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비록 지금은 조그마한 도시의 대장에 불과했지만, 한때는 원인족의 부족장을 두고 싸우던 라이벌이었다. 그때의 앙금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건 간단합니다. 브로리에게 적당한 병사만을 맡기면 됩니다. 에스트라다를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간당간당한 수의 병사만 말이죠. 우끼. 그리고 브로리가 마족들의 병사와 에스트라다를 무너뜨릴 때쯤!”
“때 쯤?”
“우끼. 버독 님께서 출전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전투로 인해 많은 수의 병사를 잃은 브로리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야 될 테고, 림드 산맥을 차지한 모든 공은 버독 님께 돌아갈 겁니다.”
“오, 오오!”
“그리고 다른 수인들은 모두 버독 님의 이름을 외칠 겁니다. 우끼깃.”
타레스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 놀람에 버독은 비틀거리며 쿵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입을 딱 벌리고는 타레스를 쳐다보았다. 역시 이 녀석은 천재였다.
“조…… 좋아!”
버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타레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브로리에게 에스트라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겠다. 마장기는 카니앗산 정도만 지원해 주면 되겠지?”
“마족의 오너가 꽤 실력이 있다고 하니, 릴라릴라도 한 대 가량 지원해 줘도 될 것 같습니다.”
“크으음. 그래야 될까?”
“어쩔 수 없습니다.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한 법이죠. 우끼.”
브로리에게 B등급 마장기인 릴라릴라까지 지원해 줘야 사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참모이자 계획을 꺼낸 장본인인 타레스의 말이었기에 버독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렇게 에스트라다를 다시 공격하기 위한 원인족의 계획이 세워질 무렵, 디르시나에는 드워프 상단 하나가 요란하게 방문하고 있었다.
* * *
“헤이! 브로!”
“어서 오게나! 친구!”
존스 홉킨스와 밴더빌트. 땅딸막한 드워프 둘이 온몸이 짜부라질 정도로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호는 조용히 그냥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가 존스 홉킨스에게 타임 리스 상단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디르시나에 모습을 드러낸 타임리스 상단이었다.
그리고 존스 홉킨스와 뜨거운 인사를 나눈 밴더빌트가 호에게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하하! 너무 빨리 와서 놀랐는가? 시간은 리스라네, 친구.”
“……조금 놀랍네요.”
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디선가 굉장히 많이 들어본 대사였다. 분명 드워프가 아닌 고블린이 내뱉은 대사 같았는데…….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입니다.”
“하하하! 알고 있네, 친구. 우리와 같은 상단들은 전 대륙의 큼직큼직한 소식을 매번 접하고 있다고. 그리고 자네가 예의범절 따위는 전혀 모르는 동물 새끼들에게 명치 한 방 강하게 날려준 것도 알고 있지.”
말과 함께 휙휙 짧은 주먹을 휘두르는 밴더빌트의 모습에 호는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존스 홉킨스가 미리 말해주기는 했지만, 밴더빌트의 저런 행동들이 금방 적응될 것 같지는 않았다. 듣던 대로 특이한 성격의 드워프 같았다.
“자, 그러면 어디 우리 애기들을 한 번 보러 가볼까?”
“아. 이쪽으로.”
밴더빌트의 말에 호는 웃으며 그를 디르시나의 공터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르테미스 상단의 레드 벨벳과는 다르게 연륜이 느껴지는 드워프라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행동이 공손해지고 있었다.
“오, 오오!”
넓은 공터에는 마장기의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수인과의 전쟁에서 획득한 병장기들은 전부 아르테미스 상단이 가지고 갔다.
그리고 레드 벨벳은 아쉬워하면서도 결국 마장기의 잔해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호에게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만큼 마장기의 잔해에 큰 욕심을 보였다.
‘만약 타임 리스 상단이 마장기의 잔해를 전부 구입해가지 않는다면 꼭 연락을 주세요. 알겠죠? 제가 비싼 가격에 사드릴게요.’
어쨌든 마장기의 잔해가 짐덩어리가 될 일은 없었다. 타임 리스 상단의 재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타임 리스가 모든 잔해를 구입해가지 않는다면 아르테미스 상단에게 넘겨주면 될 일이었다.
“호…… 호오? 이것 봐라? 오오? 이건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데? 단숨에 장갑을 잘라냈군!”
아홉 기나 되는 마장기의 잔해들이 눈앞에 펼쳐지자 밴더빌트는 물 만난 고기 마냥 홀로 공터를 헤집기 시작했다. 타임 리스 상단의 다른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밴더빌트처럼 눈이 회까닥 돌아간 모습이었다.
곧 여기저기서 끄응, 쿵, 우지끈 하는 소리가 호의 귀에 들려왔다. 이 자리에 호가 있다는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으음.”
기분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비싼 값에 잔해를 사줄 좋은 손님이라는 생각으로 호는 조용히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마장기보다도 훨씬 큰 몸체를 지닌 릴라릴라의 잔해가 실린 수레의 앞에 도착한 밴더빌트가 입을 쩍 벌린 채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거 대단한데?! 단번에 왼팔에 잘라내고 바로 왼쪽 다리까지 잘라 버렸군. 그렇게 해서 릴라릴라의 균형을 무너뜨리고는 단숨에 조종석을 박살 냈어.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실력자야! 최소한 릴라릴라의 오너 보다 두 수 아니 세 수의 위에 실력을 지니고 있군!”
밴더빌트의 놀란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지자 호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만큼 한시진의 실력이 이 세계의 영웅들도 감탄시킬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이 정도의 실력자를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대체 누구지? 소환자인가?”
호를 바라보는 밴더빌트의 눈은 기대에 찬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호에게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답을 들으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진이라는 이름의 소환자죠. 뛰어난 실력을 지닌 제 동료입니다.”
어차피 이 세계 상인들의 정보력이라면 수인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키마라이의 오너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금방일 터. 굳이 숨겨야 할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