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리그너스 대륙전기 106
“제법…….”
종종걸음으로 마장기의 잔해가 실린 수레로 다가간 레드 벨벳은 빠르게 마장기의 잔해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생각 외로 잔해의 상태가 굉장히 좋았다.
‘림드 산맥 패자의 곁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마장기사가 있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잘려진 단면도 매끄러웠고, 잡다하게 부셔진 곳도 없었다. 수인 왕국의 정확하게 조종석과 마정석이 들어가는 부분만 박살나 있었다. 카니앗산과 그리고 릴라릴라도 마찬가지였다.
“꿀꺽.”
마장기의 잔해를 보며 레드 벨벳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잔해들을 구입해 마탑에서 수리를 거치면 운이 좋을 경우 재사용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비록 수인 왕국의 마장기가 아닌 의뢰를 받은 종족의 마장기로 재탄생하겠지만 말이다.
“전부 다 해서 3억 리스!”
레드 벨벳이 자못 결의에 찬 표정으로 외치듯 말했다. 그리고 공터 주위에 있던 생명체들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얼어붙었다. 3억 리스. 디르시나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
할 말을 잃은 것은 호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액수에 순간 목덜미에 소름까지 돋고 있었다. 그 만큼 레드 벨벳의 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장기의 잔해를 자신이 구입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미친! 3억 리스라니!’
지금 에스트라다에 있는 리아 캬베데의 얼굴이 호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만약 그녀가 앞에 있었다면 그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줬으리라. 1, 2억도 아니고 무려 3억 리스였다.
그 정도의 돈이면 말 그대로 돈질로 영토를 크게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 아니, 잘 만 한다면 마장기도 한 대 구입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마족의 소환자. 시세보다 비싸게 마장기를 구입하겠다고 하면 마장기를 팔아줄 고위급 마족들은 분명히 있었다.
‘원가보다 두 배, 그러니까 2억 5천을 부르면 기즈린 등급의 마장기를 판매할 마족들이 분명 있을 거야!’
그와 함께 호의 머릿속으로 마족의 C등급 마장기인 기즈린 급 마장기의 생김새가 떠올랐다. 탱크처럼 생긴 기즈린급 마장기는 운전 실력과 사격 실력이 동시에 필요한 마장기였지만, 다른 마장기에 비해 조종이 굉장히 쉬운 마장기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한시진의 마장기 수리 또한 부탁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두 대의 마장기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 대는 자신이 그리고 나머지 한 대는 한시진이 마장기의 오너로 활동하면 되었다.
“3억 리스라…… 으음.”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의 가격이에요. 더 이상은 안돼요.”
로우덴이 팔짱을 끼며 고심을 하다가 호를 바라봤다. 최종 결정권자는 어디까지나 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호의 고개가 끄덕여지면 쓸데도 없는 마장기의 잔해를 건네주고 3억 리스라는 거금을 획득할 수 있었다.
“좋…….”
“잠깐!”
그리고 호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우렁찬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호의 휘하에 있는 유일한 드워프 영웅인 존스 홉킨스였다. 그리고 존스 홉킨스는 공터에 있는 엘프들과 인간들을 밀치며 호의 곁으로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흐억…… 흐억. 흐억! 영주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용감하고 멋진 승리를 거둔 영주님에게 맥주의 축복을. 허억. 간만에 뛰었더니 엄청나게 힘들군.”
짜리몽땅한 다리로 열심히 뛰어온 탓일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존스 홉킨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손만큼이나 커다란 맥주잔을 호를 향해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잠시 몇 번 숨을 크게 내쉬더니 솥뚜껑만한 손으로 마장기의 잔해가 담긴 수레를 쾅쾅 두드리며 말했다.
“영주님. 이 마장기의 잔해를 판매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르테미스 상단에서 3억 리스를 제안하더군요.”
“오오?!”
호의 말에 존스 홉킨스는 자신의 눈을 퍼뜩 떴다. 레드 벨벳을 향해 크게 뜨인 눈에는 황당함이 가득 담겨 있었고, 입은 엷은 웃음을 띤 채 뒤틀려 있었다. 그 웃음은 비웃음이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입니다. 하지만 영주님! 제 얘기를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자, 잠깐. 이 마장기는 우리 아르테미스 상단이…….”
“어허, 어허. 이보게나, 인간. 맥주는 마셔봐야 맛을 안다고 했다네. 우리 영주님은 아직 마장기를 판매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
방금 전까지 말하려고 했었다. 아니, 존스 홉킨스의 등장만 아니었다면 이미 계약서를 썼을 터였다.
뭔가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호는 왠지 모르게 존스 홉킨스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그의 등장이 마치 게임 속의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존스 홉킨스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3억 리스에 아르테미스 상단에게 마장기의 잔해를 판매하면 되었다. 어차피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었다.
“들어보도록 하지요.”
호의 말에 레드 벨벳의 표정은 똥 씹은 것처럼 그리고 존스 홉킨스는 활짝 웃는 표정을 지었다. 수염에 살짝 묻은 맥주 거품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드워프니까 이해해야겠지.
“영주님 혹시 ‘타임리스’라고 아십니까?”
“타임리스……?”
존스 홉킨스의 말에 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설마 옛날 자신의 세계에서 남자들이 종종 부르던 노래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말이다. 정말 그 노래는 남자들만을 위한 노래였다.
“타임리스. ‘시간은 리스다’라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 드워프들의 상단입니다. 멍.”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을 붙인 것은 로우넨이었다.
‘처음 들어 보는데…….’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상단은 어느 정도 이름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존스 홉킨스와 로우덴이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조그마한 상단은 아닌 것 같은데, 드워프의 타임 리스 상단은 처음 들어보는 상단이었다.
공략본을 열어보니 역시나 타임리스 상단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이 세계가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맞습니다. 어쨌든 이 리그너스 대륙에서 우리 드워프들 만큼이나 마장기를 사랑하는 종족은 없을 겁니다. 또한 마장기 제작 기술 역시 가장 뛰어나죠.”
맞는 말이었다. 객관적으로 모든 종족 중 마장기의 성능이 가장 뛰어난 종족이 바로 드워프였다. 마장기의 외형 역시 다른 종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멋지기도 했다. 멋진 마장기를 탑승하고 싶으면 드워프를 하라는 유저들의 말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장기 제작 기술이 뛰어난 드워프라 할지라도 단 하나 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바로 다른 종족의 마장기를 제작하는 일이지요. 멍멍. 잔해를 분해해 새로운 마장기를 만드는 것 역시 자신들의 종족만이 다룰 수 있는 마장기를 제작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멍.”
로우덴이 말했다. S등급 영웅이라 그런지 그는 이 세계의 잡다한 지식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타임리스 상단의 상단주는 밴더빌트라는 이름의 드워프입니다. 모든 드워프들이 마장기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이 녀석은 좀 더 특이한 녀석이죠. 정말로 마장기 수집에 미친 녀석입니다.”
“…….”
“그라면 이 수인 마장기의 잔해를 3억 리스보다도 더욱 비싼 가격으로 사들일 게 분명합니다. 아니, 다른 조건을 내밀지도 모릅니다.”
“다른 조건?”
아르테미스 상단이 제안했던 3억 리스보다 비싼 가격으로 매입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지만, 호는 다른 조건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왠지 모를 행운의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지위가 높거나 리스가 많은 드워프들은 자신들이 직접 사용하지는 못해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마장기를 수집용으로 가지고 싶어 합니다. 특히나 등급이 높은 마장기나 다른 종족의 마장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몇 달 전 리셴르나가 이끄는 수인들과 드워프가 거하게 붙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존스 홉킨스의 말에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먼 곳까지 첩보원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 리가 없었다.
“그 전쟁에서 리셴르나의 꾀에 드워프들이 된통 당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드워프들이 제법 있는 상황이죠. 그리고 그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은 바로 수인족의 마장기를 자신의 것인 마냥 진열하는 것입니다.”
말과 함께 존스 홉킨스는 한시진의 공격에 반으로 갈라진 수인족의 B등급 마장기 릴라릴라를 쳐다보았다.
“수인족의 B등급 마장기인 릴라릴라는 전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마장기가 아닙니다. 만약 밴더필드가 릴라릴라를 정말 가지고 싶어 한다면 비싼 돈을 아니, 물물 교환도 하려 들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건 마장기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고개가 돌아간 존스 홉킨스는 디르시나의 영주성에 무릎을 꿇고 있는 키마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고로 밴더필드는 키마라이를 두 대 보유하고 있습니다.”
존스 홉킨스의 말이 끝나자 호는 눈을 감았고, 레드 벨벳는 고개를 푸욱 숙였다. 답은 이미 나온 것 같았다.
* * *
리그너스 대륙의 계절은 대한민국과 비슷한 기후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더욱 많기는 했지만 호가 머물렀던 붉은 핏빛의 대지나 림드 산맥 그리고 경계를 맞대고 있는 수인들이 사는 지역은 사계절을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이는 원인족의 부족장 버독이 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원인족의 지역인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를 다스리는 대장이었다. 그리고 이 두 영토는 추운 겨울을 제외하면 수인들이 살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수인 왕국을 이루는 한 종족 중 하나인 원인들은 이 두 영토를 포함해 총 세 개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다 합쳐 18개의 도시가 있는 굉장히 넓은 땅덩어리였지만, 다른 강한 세력의 종족들과 비교하면 원인족의 영토는 그 크기도, 그리고 세력도 굉장히 적은 편에 속했다.
게다가 수인 왕국에서 원인족의 영향력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다른 수인들이 원인족을 가리켜 지는 해라고 표현하는 게 빈말은 아니었다. 사파리에서 열리는 수인족의 대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 종족 중 원인족보다 세력이 적은 곳은 단 하나, 견인족뿐이었다.
[림드 산맥이 마족들의 손에 넘어갔다!]
[림드 산맥이? 원숭이들은 대체 뭐한 거야?!]
게다가 몇 달 전 충격적인 소식이 수인들의 땅에 들이닥쳤다.
바로 엘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영토인 림드 산맥이 마족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 림드 산맥은 대대로 원인들이 생활하던 터전이었다. 하지만 원인들은 아직까지도 빼앗긴 자신들의 땅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 회의에서 림드 산맥 탈환 명령을 받은 리셴르나는 마족과 엘프 군단의 철저한 방어에 가로막혀 지크 로리만을 탈환했을 뿐, 더 이상의 북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인족들은…….
“크흐. 그래서 모조리 잃었다고?”
버독의 물음에 재배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병사를 맡겼던 버독은 그에게 다른 종족들이 내준 병사를 의도적으로 희생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른 종족들의 세력에 피해를 주는 한편, 림드 산맥 탈환을 오로지 원인족의 병사들로만 공을 세워 다른 종족들로 하여금 그 어떤 지분도 요구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