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리그너스 대륙전기 105
시진을 알게 된 것은 호에게 있어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그녀의 능력은 그 누구보다도 출중했다. 더욱이 그녀의 마장기 숙련도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호는 그녀의 마장기 조종술이 종족을 대표하는 에이스급 영웅들이나 라헬의 오호신장과도 비벼볼 만 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마 이 세계에서의 전투 경험을 더 쌓고, 아이템과 높은 등급의 마장기를 보유한다면 그들과 비교해도 우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그녀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만큼 시진은 호에게 있어 꼭 필요한 인재였다. 하지만 그런 시진 만큼이나 호의 진영에서 착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자리를 비운 동안 달라졌던 디르시나의 발전 보고서예요. 그 밑으로 해머스와 베코바 그리고 킬리드의 발전 상황도 정리 해놨어요.”
늘씬한 몸매와 함께 한시진과 비교해서 월등한 아니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바스트를 보유한 미인이 말과 함께 정리된 문서를 호에게 건넸다.
그녀는 호가 수인 왕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에스트라다에서 몇 개월 가까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림드 산맥의 모든 영지를 관리하는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바로 D등급 클래스인 스콰이어에서 며칠 전 C등급 클래스인 프로핏으로 전직한 소환자. 바로 아스트리드 벨이었다.
“아, 고마워.”
“제 할 일이니까요. 그리고…….”
아스트리드 벨이 자신이 건네준 서류를 훑어보는 호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조그맣게 말을 이었다.
“엄청나게 치열한 전쟁이었다고 들었어요. 정말로 수고 많았어요.”
“음.”
하지만 보고서에 정리된 내용과 함께 정보창을 이용해 영지의 발전 상황에 대한 수치를 확인하는데 정신이 팔린 호는 아스트리드 벨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 인해 벨이 자신을 향해 인상을 쓰는 것도 보지 못했고 말이다.
<영지 정보(Status)>
디르시나(대도시[A등급])-‘림드 산맥’
인구-162322
보유 리스-1234211
보유 식량-1934234
병사–엘븐 템플러 5500(A), 정예 실리스 800(C).
내정 건물-대형 식량 저장고 60, 대형 주점 1, 대시장 86, 화폐 공장 3, 대형 어장 60, 해양석 어장 20…….
군사 건물–견고한 대형 망루 30, 병영 8, 대장간 14, 마법 연구소 1, 마나 보호막이 걸린 튼튼한 성벽 1.
리스 수입-177270 / 월
식량 수입-242321 / 월
특산품–해양석
‘엄청나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연구 기술 획득에 집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는 않네. 고생 좀 했겠는데?’
크게 변화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4개월 전과 비교하면 몇몇 부분이 달라져 있기는 했다.
특히나 리스의 생산량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으로 상승해 있었다. 전부 화폐 공장 덕분이었다.
“화폐 공장을 세 개나 건설했네?”
“로우넨과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는 화폐 공장을 건설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어요. 위치는 대 시장 근처로 잡았고요.”
보고서에는 축소된 디르시나의 지도와 함께 화폐 공장이 건설된 위치가 점으로 찍혀 있었다.
벨의 대답에 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었어도 그 위치에 건설을 했을 터였다.
“화폐 공장과 관련된 기술 개발은 언제 한 거야?”
“로우덴이 고생을 좀 했어요.”
벨의 대답을 들으며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우덴의 머리라면 순식간에 관련된 기술을 획득했을 터였다.
‘화폐 공장이라……. 추억의 건물이네.’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이제야 쓸 만 하다는 평가를 주는 영지 건물의 척도가 바로 화폐공장이었다.
영지의 리스 수입량을 큰 폭으로 높여 주기 때문이었다. 화폐 공장을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이 자세히 기억은 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중요한 점은 디르시나가 화폐 공장을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을 달성했고 이미 세 개나 건설했다는 점이었다.
“…….”
연구 기술 역시 기병 계통으로 많은 부분이 완료되어 있었다. 훗사르를 양성하기 위해 자신이 내린 명령을 그대로 수행한 결과였다.
로우넨과 존스 홉킨스를 비롯해 다른 영웅들도 꽤나 분발한 모양인지 조금만 있으면 수인족의 B랭크의 기마병인 켄타우로스 전사의 양성 기술까지 연구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연구 기술 개발 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랭크가 높은 병종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비교해 더욱 어렵고 많은 자원과 특산품이 투자되는 기술들을 연구해야 했다.
달라진 점은 디르시나만이 아니었다. 벨의 보고서에는 각 도시들의 자원 이동 상황 및 발전 상황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해머스에서는 마정석의 생산량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고, 엘 라디아가 홀로 있는 베코바도 조금씩 마을의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좋아!”
그렇게 한참 보고서를 살펴보던 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벨을 바라보았다.
전투와 전쟁에는 영 젬병이었지만 벨은 내정에 관련된 일에서는 상당한 재능을 보이며 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디르시나를 책임지며 만족스러울 정도로 림드 산맥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굉장히 만족스러운데? 정말 이런데 재능이 있는지는 몰랐어.”
“벨기에 제국의 공주라는 자존심이 있어요. 직접 칼을 드는 건 무리지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 밥만 축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가?”
“그래요.”
호는 아스트리드 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말했던 그녀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어쨌든 그때와 비교해 벨은 이 세계에서 홀로 성장했고, 발전했다.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말이다.
“……왜 그렇게 불순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거죠? 설마?!”
“아?!”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너무 빤히 바라본 모양이었다. 벨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자신의 가슴 부근을 살짝 가리자 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오, 오해! 안 봤어! 절대! 절대로! 진짜 볼 생각도 안 했다고.”
얼마나 다급했는지 말까지 꼬이고 있었다.
무난하게 발전하고 있는 영지들만큼이나 골든 크로우 역시 호와의 계약을 잘 이행하고 있었다.
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머스에서 생산되는 마정석 전량을 골든 크로우에게 넘겨주고 있었고, 4개월 동안 매 달 엘븐 템플러 부대가 블루 스케일로 이동하기도 했다.
숫자로 따지면 4000명.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엘븐 템플러가 A랭크 병종으로 회복 마법까지 사용이 가능한 다재다능한 보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전력이었다. 그리고 블루 스케일의 세이라 클리퍼드는 그런 엘븐 템플러들을 모종의 장소에 비밀스럽게 숨겨 놓았다.
어쨌든 그 대가로 인해 호가 획득한 기술은 총 8개. 전부 마장기와 관련된 기술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장은 이 기술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술 관련 분야가 전부 따로따로였기 때문이었는데, 아마 골든 크로우 측에서 일부러 이렇게 기술을 전수해 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런 골든 크로우의 행동에 기분이 불쾌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골든 크로우가 체계적으로 마장기 제작 기술을 전수해 준다 하더라도 자신이 자체적으로 마장기를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호는 아르테미스 상단의 레드 벨벳을 만나고 있었다. 수인 왕국, 정확히 말하면 원인족과의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판매하기 위해서였다.
“수레 180대 분량의 병장기라…… 어마어마하네요.”
“수인 왕국들의 병장기들입니다. 멍멍. 게다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정예병들이 사용하던 무기죠. 꽤나 쓸 만한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니 녹여서 다시 무기를 제련해도 될 겁니다.”
“상태가 안 좋은 것들도 있지 않은가요?”
“그럴 줄 알고 이미 차곡차곡 분류해 놨습니다. 멍. 수레에 실려 있는 무기의 등급에 따라 저희가 원하는 가격도 따로따로 책정해 놨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대놓고 인상을 구기는 레드 벨벳의 모습을 보며 호는 슬그머니 로우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말과 함께 자신의 턱을 스윽 쓰다듬는 그의 모습은 호가 보기에도 굉장히 뻔뻔해보였다.
‘아르테미스 상단이 무기류를 취급하는 상단이라 다행이군.’
호가 거래를 하고 있는 상단 오직 아르테미스 상단뿐이었는데, 아르테미스 상단은 리그너스 대륙에서 직물, 섬유, 무기를 취급하는 상단이었다.
딱히 아르테미스 상단이 값을 더 쳐준다거나 마음에 들어서 그들하고만 거래를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상단–아르테미스 상단(관심)[7852 / 10000]-직물과 섬유, 무기]
거래를 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상단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수치, 평판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단과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한마디로 평판이 높으면 높을수록 상단은 유저에게 많은 이익과 선물을 안겨다 주었다.
“후우. 그러면 물건을 보러 가도록 하죠.”
몇 번의 이야기 끝에 레드 벨벳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호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노련한 상인 아니, 저 멍멍이는 분명 레드 벨벳의 천적이 분명했다. 마치 잘했죠? 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로우넨을 향해 품속에 있는 공을 슬쩍 보여준 호는 둘의 뒤를 따라 디르시나의 공터로 향했다.
영주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터에는 인간과 엘프를 비롯해 수인까지 다양한 종족들이 한데 뒤섞여 시장통을 만들고 있었다.
인간들은 아르테미스 상단의 인부들이었고, 엘프와 수인은 전리품들을 지키는 호의 병사와 디르시나의 영지민들이었다.
“음음…….”
공터에 도착한 레드 벨벳은 노련한 무기 감정가처럼 얼굴을 굳히고는 수레들을 둘러보았다.
가끔은 인상을 찌푸릴 때도, 그리고 때로는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그녀는 대체적으로 로우넨이 책정한 수레에 실린 무기들의 가격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만족해야만 했다. 수레에 있는 무기들을 구입하려면 말이다.
“정말, 정말로 양심적인 가격이네요.”
레드 벨벳이 말했다. 채찍이 후려치듯 날카로움이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멍. 호 님께서는 아르테미스 상단과 좋은 관계를 원하신답니다. 멍멍.‘
“아아. 그것 참 다행이네요. 정말 좋은 관계가 되겠어요. 각 병장기당 매겨진 가격이 정.확.하.게 대륙 시세에서 100리스씩만 저렴하네요. 병장기에 안목이 높은 대장장이가 영지에 있나 보죠?”
“그렇습니다. 멍멍.”
레드 벨벳과 로우넨의 사이에서 한 발짝 뒤에 물러나 있던 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착각이겠지만, 어디선가 으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인정머리 없는 놈…….’
레드 벨벳의 시선을 피해 헥헥 거리며 혀를 내미는 로우넨의 얼굴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향해 슬쩍 윙크를 보내는 로우넨의 모습에 호는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
레드 벨벳이 무기들을 구입하죠, 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커다란 수레가 공터 안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거대한 고철더미가 담겨 있는 수레였다.
수인족의 B등급 마장기 릴라릴라와 C등급 마장기인 카니앗산의 잔해였다.
“저건?!”
수레에 실린 물건들이 마장기의 잔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레드 벨벳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로우넨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멍멍. 그건…….”
말을 이어나가려던 로우넨의 시선이 호에게 향했다. 자신이 설명과 함께 거래를 진행해도 괜찮겠느냐는 물음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을 알아챈 호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S등급 영웅이라 그런지 머리가 똑똑한 녀석이 옆에 있으니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획득한 가장 큰 전리품입니다. 멍멍.”
“음.”
호는 로우넨의 말에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 캬베데가 잔해를 챙기지 않았다면 에스트라다의 평원에 버려졌을 물건이지만, 그런 사실은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어찌되었든 레드 벨벳이 눈독을 들이는 것을 보면 이 세계에서는 마장기의 잔해도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가상현실 게임에서와는 달리 꽤나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