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리그너스 대륙전기 104
“저것들까지 챙겨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냐앙.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마스터.”
“리아가 병장기와 마장기의 잔해를 상인들에게 판매하면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했어요.”
“아, 그래? 상인에게 팔 수 있다고?”
한시진의 말에 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임에서는 전쟁에서 노획한 마장기의 잔해를 분해를 해서 마장기의 제작 재료를 획득, 그것을 새롭게 아군의 마장기를 제작하는 데 이용하곤 했었다.
하지만 마장기 제작 기술이 없는 지금의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호는 어쩔 수 없이 파괴된 마장기의 동체는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었다.
마장기는 이 세계의 첨단 기술이 총집합된 병기. 아무리 고철더미라 할지라도 건질 게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쩝. 게임의 틀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단 말이야.’
호는 자책과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세계에 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게임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어쨌든 고철더미라도 해도 상인들이 사간다고 한다면 제법 값이 나올 것 같았다.
“어쨌든 모두들 고생했어. 그리고 시진아, 정말 수고했어.”
“우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요.”
호의 격려에 시진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이번 전쟁을 통해 호가 얻은 것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중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안전이었다. 리셴르나의 일도 그렇고 이번 에스트라다 공방전까지. 두 번이나 수인 왕국의 공세를 막아낸 것이다.
특히나 이번 전쟁은 직접 서로의 군대를 움직여 부딪쳤고, 대승이나 다름없는 승리를 거뒀다. 그만큼 수인들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아군이 입은 피해는 미미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수치였다.
경험치 또한 굉장히 많이 획득할 수 있었다. 이번 전쟁에 참가한 소환자는 호와 한시진뿐.
신윤아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활약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한시진은 많은 수의 마장기를 홀로 격파한 공 때문인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한시진
2. 성별 : 여(24)
3. 종족 : 인간
4. 소속 : 마족
5. 레벨 : 200
6. 직업 : 검의 연주자(B)
7. 세부능력
통솔 : 200 / 200(B)
무력 : 500(+68) / 500(+68)(S)
지력 : 200 / 200(B)
정치 : 100 / 100(C)
매력 : 200 / 200(B)
카리스마 : 300 / 300(A)
8. 특성 : 화랑의 정신, 강행군, 마나의 기운, 화랑의 검술.
9. 스킬
<임전무퇴> S랭크.
전쟁터에 나가서는 결코 물러서지 말고 용감히 싸우라는 화랑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효과 :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대가 물러서지 않으며 피해를 입더라도 병사 수에 따른 부대의 공격력 및 방어력의 패널티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휘하는 부대는 패닉 상태 및 어떠한 해로운 효과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전투 중 병사 수가 10%씩 감소할 때마다 부대의 공격력, 방어력이 10%씩 증가합니다.
<몰아치는 폭풍> A랭크.
윈드 레이지는 맹렬한 바람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날카로운 검으로 모든 적들을 베어버립니다.
-효과 : 5분간 자신의 무력 수치가 20%상승합니다.
‘완전히 폭렙 했네.’
호는 한시진의 정보를 확인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획득한 경험치를 전부 포인트로 투자했는지 모든 능력이 한계치까지 상승되어 있었다.
능력치의 총합만 따진다면 자신보다도 훨씬 높아 보였다. 게다가 시진이 검의 연주자로 전직을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이번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는 그녀였다.
운이 좋다면, 자신보다도 먼저 A등급 클래스를 획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리아 캬베데도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소환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녀의 능력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능력 수치가 소폭 상승하기는 했지만, 한시진에 비한다면 상승폭이 없다시피 했다.
그 사실이 호는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결국 이 세계 영웅의 능력치와 클래스의 등급을 높이려면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마찬가지로 아이템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저 여자는 수인들의 소환자. 맞죠?”
윤아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한시진이 호를 향해 물었다. 뉘앙스를 보아하니 수인들의 소환자였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리아.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하고, 전리품을 정비해 디르시나로 보내도록. 전리품의 처분은 디르시나에서 하겠어.”
“알겠습니다. 냥!”
“그리고 시진이는…… 그래.”
순간 호는 윤아에 대해 설명할 것이라면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 이야기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갈 사안이었다.
그녀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시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호는 그녀를 믿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으니까 함께 응접실로 가자.”
“네? 알았어요.”
갑자기 진지해진 호의 모습에 시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소환자와 패러럴 월드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눌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곧 시진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호의 뒤를 따르는 그녀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응접실에 도착한 호는 자신을 호위하는 엘븐 템플러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영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호위병들은 호의 명령에 조금 꺼리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호가 이 자리에 한시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자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쿵!
그리고 문이 닫히자 넓은 응접실에는 호와 한시진 그리고 윤아까지. 세 명만이 남게 되었다.
“먼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자리에 앉아 가볍게 목을 축인 호는 시진과 눈을 마주치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호가 한 일은 바로 한시진에 대한 사과였다. 부득이한 상황이었지만, 거짓말은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대충은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들려온 한시진의 대답에 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법 자신의 정체에 대해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호는 그녀가 어디서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주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호였고, 윤아는 그런 호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듯 대화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런 두 남녀의 이야기를 듣는 시진의 반응은 굉장히 침착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세계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호와 신윤아의 세계에 궁금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신기한 세계네요. 오빠는 거기서 무슨 일을 했어요?”
“평범한 회사원이었어.”
“회사원요? 군대에서 있던 게 아니라요?”
옛날의 생각을 떠올리며 호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고, 한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가 이 세계에서 한 일들은 평범한 회사원이 행했다고는 믿기 힘든 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심 호가 엘리트 교육을 받은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응. 갓 중견 기업에 입사한 막내였어. 군대 다녀오고…….”
“군인이요? 역시! 제 예상이 맞았어요. 전투도 그렇고,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서도 너무나도 침착한 모습을 보이시기에 당연히 저와 똑같은 계통에 몸담은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응?”
“사실 오빠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광개토’나 ‘세종’ 같은 이름 있는 특전대대에 몸담고 있는 군인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아아……. 그래. 그 부대 이름 참 멋지다.”
한시진의 말에 호는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뭔가 굉장히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전사는커녕 호는 그냥 병장 만기 전역에 불과했다. 그것도 2년 내내 한 일이라곤 눈을 치우고 땅을 파고 정자를 옮기고 산을 깎아내린 것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군인이기는 한데, 또 아니라고 해야 되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한시진의 모습에 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확실히 그녀와 호의 세계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계였다. 호의 세계에서 군대는 징병제였으나, 한시진의 세계에서는 모병제였고, 사람들에 대한 군대의 인식도 크게 차이가 났다.
“군인들의 대우가 형편 없네요…….”
“뭐, 그렇지? 그래도 다들 자부심은 가지고 있어. 아니, 있을 걸?”
어찌되었든 이야기는 식사를 준비해도 괜찮겠냐는 메이드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그 만큼 시진은 호의 세계에 궁금한 게 많았고, 그럴 때마다 호는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주어야 했다. 다행이도 호가 우려하던 상황과는 다른 분위기의 대화였다. 그리고 윤아는 본래의 세계에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고 했다. 이름은 쥬신대.
“어어?! 평범한 게 아니잖아. 공부를 엄청 잘했나 본데? 쥬신대라면……?”
호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윤아를 바라봤다. 쥬신대라면 서울에서도 꽤나 이름 있는 학교였다. 세계 수준의 대학에 이름을 내밀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밤잠도 자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대한 전투 사관학교와 비슷한 곳이로군요. 음음. 그곳도 우리나라의 엘리트들만 입교할 수 있는 곳이었지요. 특히 대한 전투 사관학교의 체력 시험은…….”
한시진도 한마디 덧붙였다. 뭔가 느낌은 굉장히 달랐지만. 어쨌든 윤아는 갓 쥬신대에 입학한 신입생이라고 했다.
“너도 참 안타깝다.”
학창시절 내내 공부만 하다가 이제 대학에 입학해 대학생활을 즐기려던 참에 이런 이상한 세계에 빠져들다니. 참 인생이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자신도 비슷한 신세였지만.
자신이 있던 세계에서 온 말이 통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일까? 식사가 끝나서도 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한시진도 함께였다. 그녀의 궁금증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동생이요? 오빠, 동생이 있었어요?”
“응. 윤범이라고.”
“호호호. 형제가 이름이 비슷하네요?”
“어릴 때 친구들이 얼마나 놀렸는지 몰라.”
심지어 시진은 호의 가족 이력에 대해서도 물어보기까지 했다.
셋의 대화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내일을 위해 쉬어야겠다고 호가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 새벽까지도 이어졌을 터였다.
술이 있었다면 자리가 좀 더 재미있었을 것 같기는 한데, 아쉽게도 호의 입맛에 맞는 술은 디르시나에 있었다. 수인족의 술은 너무 독했고, 엘프의 술은 탄산음료와 비슷했다.
“후우. 다행이네.”
호는 자신의 방에 있는 발코니 쪽으로 몸을 옮겼다. 늦은 밤이었지만, 에스트라다는 환한 불빛이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 디르시나로 옮겨야 할 전리품들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