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리그너스 대륙전기 101
“대…… 대한민국 사람이세요? 정말요?”
신윤아의 눈에 담긴 조그마한 불신을 눈치챈 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청주 출생이다. 나이는…… 29지.”
내년이면 자신도 앞자리 수가 변한다는 생각에 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 하지만 자신의 대답에도 신윤아의 눈에 담긴 불신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굳이 그녀의 오해를 풀어줄 필요는 없긴 하지만 원만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 그리고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김현준의 활약으로 우리나라가 독일 꺾고 우승했지?”
의자를 하나 집어 자리에 앉은 호는 청산유수처럼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굵직굵직한 사건을 떠올렸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일들이었다.
“아! 아아! 마…… 맞아요! 맞아! 기억나요! 김현준!”
“……전설이었지. 또 물어볼 거 있나?”
“호, 혹시 KOREA사에 대해서도 아세요?”
조심스레 묻는 신윤아의 모습에 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KOREA사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이 여자는 이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까? 라는 생각이 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호는 곧 생각을 저었다. 그녀가 아무리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가상현실의 주인공이자 단 하나뿐인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어. 한때는 대항해시대VIII의 광팬이었다고. 물론, 지금의 KOREA사는 저주할 만큼 싫어하지만.”
“왜, 왜요?”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판박이와도 같은 이 빌어먹을 세계 때문이지. KOREA사에 대해 알고 있다면 너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챘을 텐데?”
“…….”
호의 대답에 신윤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곧 훌쩍거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흑. 다…… 다행이다. 나 혼자가 아니었어. 흐흑. 으아앙! 아앙!”
매너가 있는 남자라면 이럴 때 으레 어깨를 쓸어내리며 위로의 말을 해줘야겠지만 호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딱히 신윤아를 위로해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뿐더러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신윤아. 그녀는 자신의 세계에서 온 소환자가 분명했다. 그리고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울음을 터뜨리던 신윤아는 호가 건네주는 휴지로 코를 팽하니 풀고는 입을 열었다.
“아, 처음에는 가상현실인 줄 알았어요.”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아, 말 놔도 되지?”
“……이미 놓고 계시잖아요.”
신윤아의 대답에 호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어쨌든 저도 많이는 아니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어느 정도 플레이했거든요.”
“흠. 엔딩도 보고?”
“아, 아뇨. 그 정도까지는 못했어요. 구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새내기가 학교에서 노느라고. 게다가 제가 직접 구입한 게 아니라 오빠가 구입한 게임이기도 했고요.”
신윤아의 말을 들으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던 이 세계가 곧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선택의 제단에서 여 마왕 쉐르난비체로 인해 많은 소환자가 죽는 모습을 보고는 정신을 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수인들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고 했다.
“치, 친구도 있었는데 헤어졌어요.”
“오? 그래?”
“네. 천족으로 간 것 같은데…….”
신윤아의 입에서 나온 천족이라는 말에 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신 라헬을 추종하는 그들은 자신의 최종적인 적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여신 라헬이 게임과 똑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다면 말이다. 게다가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빌어먹을 세계에 끌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신윤아는 그러던 와중 거대한 고릴라의 명령에 따라 수인을 이끄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전쟁터에 끌려오게 됐다고 했다.
“마족에 위험한 소환자가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저한테 그처럼 자신을 능력을 발휘해 보라고 했어요.”
‘위험한 소환자라. 아마 날 뜻하는 거겠네.’
신윤아의 말에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수인들에게 그 위험한 소환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랬군. 그나저나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 했다면 이 세계에 대해 잘 알 텐데, 왜 그렇게 바보같이 싸운 거지?”
“사실 플레이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어려운 걸 싫어해서 에디터만 써서 게임을 하느라 제대로 된 전쟁은 안 해봤어요. 전부 마장기만 써서…….”
“……에디터?”
신윤아의 말을 듣던 도중 호가 다리를 꿈틀거렸다.
“혹시 컴퓨터로 연동해서 사용했던 거야?”
“아, 네.”
신윤아의 대답에 호는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호 또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공략본을 연동시켰던 터라 이 세계에서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녀는 자신이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에디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혹시 그 에디터, 여기서 사용해 봤어?”
호는 신윤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로 이유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에디터. 이 세계에서 자신이 가장 원했으면서도 나오기를 원하지 않았던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에디터가 정말로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호는 자신이 이 세계에 오기 전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연동시켰던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이 세계에서도 잘 사용하고 있었다.
“아, 아뇨.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호의 말에 신윤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갑자기 호가 왜 그런 것을 묻는 지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비슷하기는 했지만, 현실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가 에디터로 인해 변화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도 못한 것 같았다.
“연동시켰던 프로그램 가상현실에서 불러올 줄은 알지?”
“아, 네.”
“이 세계에서도 그와 똑같이 한 번 해봐.”
“네? 에디터 말씀이시죠? 알았어요.”
갑자기 달라진 호의 분위기에 윤아는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사용해 봤는지, 에디터를 사용하기 위해 가상현실에서 손을 휘젓는 그녀의 행동은 거침이 없어 보였다. 그런 윤아의 모습을 보며 호는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뒤쪽으로 슬쩍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호의 신호를 확인한 엘븐 템플러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자리를 떠나 윤아의 뒤쪽에 섰다.
행여나 윤아가 에디터를 이용해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호는 거리낌 없이 그녀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녀가 보는 화면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에디터를 이용해 무엇을 하는 지는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도 알아 챌 수 있었다.
“…….”
윤아의 움직임을 집중해서 보던 호는 1초가 10년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에디터가 사용이 되는 것인가? 만약 사용이 된다면 어떤 식으로? 에디터의 사용을 라헬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정말로 에디터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신윤아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열리지가 않아요.”
“어? 안 돼?”
“네. 에디터가 나타나야 할 창이 까맣게 떠요. 그런데 안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에디터는 가상현실에 연동된 거고, 여기는 현실이니까…….”
말꼬리를 흘리는 신윤아의 모습을 보며 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낮은 신음성을 내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표정과 행동을 보아하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속으로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이라는 마음이 교차되기 시작했다.
‘하기야 에디터가 사용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니 긴장감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윤아의 모습을 보아하니 에디터에 대한 생각은 이제부터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가상현실에서 사용하던 에디터는 이 세계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있었다.
“혹시 공략본도 들고 있어?”
“아? 네. 있어요.”
공략본과 에디터를 모두 보유하고 있다는 윤아의 대답에 호는 음음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상현실 게임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바람직한 게이머였다.
윤아가 가지고 있다는 공략본은 호도 들어본 기억이 있는 공략본으로 게이머 사이트에서 널리 퍼져 있어 쉽게 구할 수 있는 공략본이었다.
“한 번 확인해 볼래?”
“네? 네. 알았어요.”
대답과 함께 다시 한 번 윤아의 손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들려온 대답은 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저기 안 되는데요? 아까와 똑같이 까만 화면만 나타나요.”
윤아의 대답에 호는 누군가에게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몸을 움찔했다. 그러고는 윤아를 바라봤다. 호의 시선을 받은 윤아가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것 마냥 고개를 푹 숙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과 발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은 분명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아라는 이름의 플레이어는 에디터와 공략본 둘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공략본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째서 눈앞의 소녀는 그렇지 못한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누가 명쾌하게 답을 내려줬으면 좋겠지만, 그럴 만한 사람도 없었다.
“죄, 죄송해요. 그런데 정말로 화면이 까맣게만 떠요. 에디터도 공략본도 아무것도 확인이 안돼요.”
울음기가 담긴 윤아의 목소리에 호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답을 알지 못하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계속 떠올려 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이었다. 어떤 추측과 가정을 내리기에는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게다가 그녀에게 물어봐야 할 것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아. 괜찮아. 너를 탓하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 본거니까. 에디터라던가, 공략본이 있으면 뭔가 도움이 될까 싶었거든.”
“저는 그런 게 이 세계에서 되는지 생각도 못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까만 화면만 떠요.”
편안한 음성을 담은 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윤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호는 윤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아니 그래야 했다. 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면, 호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녀를 제거해야만 했다.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위협적인 존재가 될 건 분명한 일이었다. 지금도 윤아의 말을 전부 믿는 것은 아니었다.
‘리젤이라고 했던가?’
D등급의 수인 영웅으로 현재 자신을 비롯해 한시진과 리아 캬베데가 없는 에스트라다를 담당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말투는 특이하지만, 제법 영리해 보이는 영웅인 만큼 윤아를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전에 물어볼 게 많았다.
자신과 똑같은 세계에서 온 소환자를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떤 남자가 한 명 있었긴 했지만, 자신이 죽여 버렸었다.
“으음. 혹시 언제 이 세계에 온 지 말해줄 수 있을까?”
“언제라면? 아. 한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아……. 아니. 그것 말고.”
“네?”
답답한 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호는 그 말을 목구멍 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개념이 없지는 않았다. 어떻게 말을 해야 그녀가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하던 호는 눈을 감았다 뜨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2년 전에 이 세계에 왔거든.”
“네에에?!”
“혹시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던 게이머들이 단체로 실종되었다거나? 혼수상태가 되었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어?”
깜짝 놀라는 신윤아의 반응을 무시 한 채 호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 이 세계에서 살던 2년 동안 상상으로 가정해봤던 생각들이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현실 세계에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지에 대한 생각 말이다.
“아, 아뇨! 없었어요. 아무런 문제도요.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정말로?”
“네. 핸드폰으로 매번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기는 하는데, 그런 기사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심지어 2년 전이면 리그너스 대륙전기가 나오지도 않았잖아요?”
“……어?”
“어라? 그런데 어떻게 이 세계가 리그너스 대륙전기와 흡사한 세계라는 걸 아시는 거예요?”
오히려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신윤아의 물음에 호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그너스 대륙전기가 발매된 것은 호가 이 세계에서 끌려오기 3개월 전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내가 이 세계에 끌려온 날은 20XX년 4월 23일 금요일. 리그너스 대륙전기가 한참 인기를 끌고 있을 때라고!”
황당함에 호가 버럭 소리쳤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퇴근을 하면 이틀을 자유다라는 생각과 함께 여자 친구였던 혜연과의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었던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호의 대답을 듣던 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말도 안 돼! 저, 저도 4월 23일이에요! 시간은 잘 기억 안 나는데 아침이라는 것은 확실해요. 학교에 가기 위해 유진이와 함께 버스를 탔었거든요.”
신윤아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아마 이 세계에 끌려왔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호 역시 그녀를 위로해 줄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까보다도 더욱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자신과는 2년의 텀을 두고 이 세계에 끌려온 2회 차 소환자인 그녀는 시간의 차이는 있어도 자신과 똑같은 날짜에 이 세계에 끌려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