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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100화 (100/522)

# 100

리그너스 대륙전기 100화

푸욱!

호가 내지른 검이 묘인족의 가슴을 꿰뚫었다. 심장을 노린 정확한 찌르기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엘븐 템플러들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엘븐 템플러들의 돌격은 거리낄 게 없었다. ‘아크 로얄’ 윤호의 통솔력과 무력에 영향을 받는 그들은 A랭크 병종이지만, S랭크에 흡사할 정도의 강력함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마저도 영웅이 아닌 일반 병사에 불과한데가 B, C랭크로 구성된 수인 왕국의 정찰병들이 엘븐 템플러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끼기깃!”

“적이다! 끽!”

파챵!

엘븐 템플러로 구성된 마족 병사들의 등장에 다람쥐 석궁수들이 뒤로 물러나며 화살을 발사했지만, 마나 실드가 발동된 엘븐 템플러의 방패를 뚫어내기에는 무리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투는 학살에 가까웠다. 수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엘븐 템플러들은 검을 매섭게 휘두르며 가볍게 적들의 목숨을 끊어내고 있었다.

수인 정찰병의 입장에서는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몸을 뒤로 돌리는 순간 정예 실리스들의 화살이 족족 틀어박혔고, 엘븐 템플러들의 이동속도도 느린 편이 아니었다.

“좋아.”

“통솔력과 무력 능력이 높으니까 쉽게 전투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네요.”

삽시간에 수인들이 전멸하는 모습을 보며 주먹을 쥐는 호에게 한시진이 다가와 싱긋 웃었다. 호와 함께 선두에서 돌격을 감행했던 그녀의 검에서는 붉은색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병사들의 특성과 속성 관계 그리고 지휘하는 인물의 특성과 보유 스킬도 굉장히 중요해.”

한시진도 이제는 이 세계에 꽤나 적응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단순하게 수치로만 나타나는 능력들이 이제는 어떤 영향을 어느 정도까지 미치는지 경험을 통해 점점 배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호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언제까지 자신의 곁에 있는 이상은 말이다.

‘한시진과 같은 인물이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유능한 인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먼 훗날 정복전쟁을 일으킬 때가 되면 인재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주점에서 고용되는 영웅들이 생겨나고는 있었지만, 대부분 D, E등급의 일명 쓰레기 영웅들에 불과했다. 그 정도의 등급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감지덕지긴 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크게 쓸모가 없는 낮은 등급의 영웅들은 아이템을 통해 승급을 시키고도 싶었다. 그렇게만 하면 영웅 능력의 획기적인 상승과 함께 스킬을 얻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시도를 한 번 해 봐야겠어.’

소환자라 불리는 플레이어와는 달리 이 세계의 영웅을 승급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아이템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아이템은 영웅마다 필요한 것들이 각기 달랐다. 개중에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번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작정하고 쳐들어오는 수인 왕국의 군대를 막아내고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도 있겠지만, 전쟁으로 인해 쓸모없이 빠져나가는 자금과 인력이 너무나도 많았다. 가뜩이나 발전시켜야 할 게 넘쳐나는 호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아깝기만 했다.

“이런 쓸모없는 소모전 말고, 한 번에 저 녀석들을 물리칠 만한 방법이 생기면 좋으련만…….”

“전면전은 무리예요.”

“후. 그건 그렇지.”

한시진의 말에 호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의 기량만큼은 결코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숫자가 많았다. 병사의 숫자뿐 아니라 마장기의 숫자도 말이다. 만약 한시진 정도의 실력을 지닌 마장기의 오너가 하나 아니 둘 만 더 있었어도 진격을 감행했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S랭크 이상의 병사나 대마장기 전용 부대가 있지 않는 이상 일반 병사들로는 C등급 마장기도 커버하기 힘들었다. 설령 마장기가 있다 하더라도 호나 리아 캬베데 그리고 로우덴 말고는 탑승이 불가능했다.

‘아……. 한 명이 더 있긴 하네.’

그때 땅딸막한 체구의 주정뱅이 드워프 영웅 존스 홉킨스의 얼굴이 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디르시나를 떠난 지도 벌써 3개월이 흘러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골든 크로우의 거래에 따라 몇 개의 마장기 관련 기술을 획득하고 다른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일 터였다.

“혹시 디르시나에서 추가적으로 보고가 들어온 것은 없나?”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호가 본진에 주둔해 있던 리아 캬베데를 향해 물었다. 현재 마족의 군대는 에스테라다에서 여섯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아 캬베데는 기지개를 펴듯 온몸을 쭈욱 뻗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다는 뜻이었다.

“음…….”

리아 캬베데의 반응을 보며 호는 숨을 깊이 들이쉰 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수인족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조금씩 전직 조건을 달성하면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게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소환자들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소환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크냐아앙. 아?!”

그런 호의 뒤편에서 햇볕을 받으며 늘어지던 리아 캬베데가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 여자애가 호 님을 보고 싶어 한다고 리젤이 말했어요. 냥.”

“여자애?”

“냥. 호 님. 리젤에게 맡기신 애요.”

“아아.”

이상한 말투를 쓰는 묘인 영웅 리젤에게 맡긴 인물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2회 차 소환자로 추정되는 신윤아라는 여자아이였다.

“음.”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래도 에스트라다까지는 말을 이용하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수인들이 웅크린 덩치를 일으킬 낌새도 보이지 않으니, 한시진과 리아 캬베데에게 병사들을 맡기고 잠시 갔다 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부탁해.”

“걱정 마세요. 오빠.”

다음 날 아침.

호는 한시진에게 작별을 고하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한시진의 능력이라면, 그리고 리아 캬베데의 서포터가 있다면 별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현재 이곳에 모인 병력은 림드 산맥의 최정예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이 병력들이 전멸하게 된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한시진 또한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다시금 그녀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려던 호는 한시진의 눈을 보자 자신이 하려던 말을 입 안에 삼키고는 다른 말을 꺼냈다.

“사랑해.”

“저도요. 사랑해요, 오빠. 정말, 정말 사랑해요. 그러니까 몸조심해야 돼요? 알았죠?”

한시진이 말에 호는 웃음을 지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지. 할 말은 이걸로 충분했다.

호는 자신을 호위하는 오십여 명의 엘븐 템플러들과 함께 에스트라다로 향했다. 목적지는 2회 차 소환자로 추정되는 신윤아라는 여자아이가 있는 에스트라다였다.

* * *

“…….”

엘븐 템플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에스트라다로 향하면서 호는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전쟁 때문인지 에스트라다의 영주민들이 생활하던 터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올스올이라고 이름 붙여진 넓은 평원에서 뛰놀던 말들도 보이지 않았다.

“영지의 생산량이 30% 넘게 급감했던가?”

전쟁이 일어난 도시는 영지의 생산량이 급감한다. 영주민들의 터전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에스트라다는 사정이 나았다. 몇 번의 승리로 전진 배치된 군대로 인해 수인족을 후퇴시켰기에 고사가 될 정도의 압박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에스트라다다!”

그렇게 말을 타고 얼마나 이동했을까?

한 엘븐 템플러가 소리쳤다. 호의 눈에도 삐죽 튀어나온 마장기 카니앗산의 주포가 설치되어 있는 에스트라다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오. 호 님?”

“아아.”

그렇게 에스트라다에 도착한 호를 마중 나온 것은 흰 털을 지닌 조그마한 묘인 영웅 리젤이었다. 키가 리아 캬베데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묘인 영웅이었는데, 리아 캬베데의 말에 따르면 아직 15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라고 했다.

‘어린데 D등급의 영웅이라…….’

호는 머릿속으로 리젤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했다. 나이를 가늠해 보면 성장 가능성이 높은 녀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호 님이 에스트라다에 와서 리젤도 조아오.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호 님을 조아해오.”

“후후. 그거 고맙구나.”

대답과 함께 호는 리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털이 폭신폭신한 게 느낌이 좋았다. 아이템이나 이벤트를 이용해 등급을 높여주면 꽤 괜찮은 녀석으로 성장할지도 몰랐다.

실제로 평범한 클래스를 지니고 있는 별 볼일 없던 녀석이 클래스 승급으로 인해 떡하니 레어 클래스와 스킬을 가지고 태어나는, 말 그대로 환골탈태하는 일이 리그너스 대륙전기에는 존재했다.

하지만 저 특이한 말투에 적응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게다가 클래스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과 특산품을 얻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자애는 이제 울지 아나오. 그런데 호 님을 차자오. 그래서 리젤 편지 보내서오.”

“음. 그렇구나.”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호는 잠시 리젤이 말한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신윤아라는 여자애는 이제는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보았던 자신을 찾는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멀리 영주성이 보였다.

“영주성에 도착하면 리젤, 에스트라다의 현 재정과 영지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부탁해.”

호가 리젤을 향해 말했다. 영지 정보창을 이용해 살펴볼 수도 있지만, 호는 신윤아라는 소환자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랐어오. 호 님.”

호가 직접 무언가를 부탁했기 때문일까?

리젤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윤아가 있는 장소는 영주성의 3층에 위치한 방이었다. 조그마한 창이 있는 방이었는데, 리젤은 행여나 그녀가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해 자살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방을 배치했다고 했다. 혹시나 싶어 날붙이들도 모조리 치웠다고 했다.

“그 여자는 리젤보다 야캐오. 마니 야캐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리젤에 대한 호의 평가는 더욱 올라가고 있었다. 아이템만 있으면 클래스 업을 시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랜덤성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녀가 어떤 클래스를 획득하게 되는지는 공략본을 찾아보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호는 휘하 영웅들에 대한 정보를 천천히 찾아보기로 생각하며 엘븐 템플러의 호위를 받으며 영주성 3층으로 향했다.

“큼.”

신윤아가 있다는 방문 앞에 도착한 호는 누군가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헛기침과 함께 손을 들어 문을 똑똑 두드렸다. 하지만 방 안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호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끼이익.

다행이 문은 열려 있었다. 소환자 신윤아의 모습도 멀쩡했다. 잠시 넋을 잃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창문……?’

신윤아의 시선을 따라 호 또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손바닥 4개 정도 크기에 불과한 창문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단지 파란 하늘과 멀리 보이는 성벽만이 보일 뿐이었다.

“윤호다. 대한…….”

호는 자신도 모르게 대한제국 출신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에서 잠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생각해 보니 한시진에게,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아스트리드 벨과 한시현에게도 패러럴 월드와 자신이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했다.

이 세계에 처음에 도착했을 때는 자신을 제외하고 다들 대한제국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소외와 경계를 피하기 위해 그녀들을 속였지만, 이제는 사실을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호가 그녀들에 대해 생각을 하는 사이,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신윤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리고 신윤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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