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리그너스 대륙전기 099화
호는 퇴각하지 않은 일단의 무리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재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그런 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열댓 마리의 호표기와 한 여성이었다. 다행히 전투가 벌어지기 일보직전이었으니 타이밍이 좋았다.
‘소환자!’
호는 호포기의 보호를 받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포위한 엘븐 템플러들을 고개를 휘적휘적 돌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신윤아
2. 성별 : 여(20)
3. 종족 : 인간
4. 소속 : 수인 왕국
5. 레벨 : 10
6. 직업 : 마나 조향사(E)
7. 세부수치
통솔 : 10 / 10(F)
무력 : 16 / 30(E)
지력 : 19 / 30(E)
정치 : 8 / 10(F)
매력 : 10 / 10(F)
솜씨 : 13 / 30(E)
호가 정보창을 확인하니 역시나 자신의 생각대로였다. 그것도 고작 레벨 10밖에 되지 않는 소환자. 아마도 2회 차에 소환되었다는 소환자인게 분명해 보였다.
이유인 즉, 1회 차 소환자라고 말하기에는 능력이 낮아도 너무나 낮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소환자를 왜 마장기가 포함된 대군의 지휘관으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뭐, 그 때문에 손쉽게 대승을 거둘 수 있기는 했지만.
“모두들 발할라에서!”
“가자!”
“잠깐!”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운 채 다시금 덤벼들려는 호표기들의 모습에, 호는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성격도 급한 녀석들이었다.
“내 이름은 윤호. 림드 산맥의 패자다.”
말을 마친 호의 시선이 신윤아라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2회 차 소환자. 호는 그녀가 선택의 신전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듣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세계에 끌려왔는지, 또 어떤 녀석들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헛된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호표기가 뭐라 말하기 전에 호는 재빠르게, 그리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에스트라다에서 펼쳐졌던 전쟁은 마족들의 승리로 싱겁게 끝이 났다. 도합 사만에 가까운 병사와 마장기까지 투입이 된 전투였다. 그럼에도 반나절도 되지 않아 수인 왕국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마장기까지 모두 잃은 채, 팔천이 넘는 희생을 치르고 자신들의 영토로 퇴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대장의 복수를!”
“적들의 피를 취해라!”
자신들의 대장이었던 소환자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병사들이 다시 에스트라다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크 로얄 윤호와 키마라이의 오너인 한시진이 있는 군대를 당해낼 리 없었다.
“크윽! 빌어먹을 소환자! 쓸모가 없다니까!”
결국 버독은 지원군과 함께 재배라는 C등급 원인 영웅을 대장으로 임명했고, 다시 에스트라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에스트라다 점령을 위해 버독이 추가로 지원한 원인족의 전력은 B등급 마장기인 릴라릴라 한 대와 카니앗산 세 대, 그리고 5만의 병력이었다.
군단급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호가 위기감을 느낄 정도의 병력이었다. 특히나 이번에는 수인족의 B등급 마장기인 릴라릴라도 끼어 있었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릴라릴라는 커다란 양팔을 이용해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이족 보행 마장기였다.
하지만 한시진의 능력을 굳게 믿은 호는 원인족의 군대가 쳐들오고 있다는 소식에 병력을 이끌고 요격에 나섰고, 호의 기대대로 한시진은 자신의 실력을 한껏 발휘해 카니앗산의 엄호를 받고 있는 릴라릴라를 반파하며 수인족의 기세를 꺾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에서 호는 첫 전투와 마찬가지로 대승을 거뒀고, 그 후 전쟁은 소강상태에 진입했다.
벌써 두 번이나 엄청난 피해를 입은 탓에 수인들은 에스트라다를 점령할 의지를 잃었고, 호는 병력 부족과 전선 확장을 피하기 위해 에스트라다 이상으로 영토를 더는 넓히지 못했다.
“뭐, 어떻게 보면 좋은 거지.”
소강상태였지만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전선 여기저기에서 소소한 교전이 펼쳐졌고, 호는 그럴 때마다 교전에 참여하곤 했다. 경험치 뿐만 아니라 ‘제네시스 - 전장의 마에스트로’로 전직하기 위한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호의 곁에는 항상 한시진이 있었다.
* * *
[안녕하세오 저는 리젤이에오.
저는 묘인족이에오. 림드 산맥에서 오래 살았어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굉장히 마니 봤어오. 윤호 님의 충실한 리젤이에오.
림드 산맥은 원숭이들의 땅이었어오. 나쁜 녀석이에오. 맛있는 것은 나는 안 주고 지들끼리만 먹었어오. 내 친구들도 다 시러했어오.
림드 산맥은 지금은 마족 땅이에오. 그런데 난 조아오.
호 님. 언제나 맛있는 음식 늘 고마워오. 호 님은 저에게 동전도 줘오.
친구들도 호 님 다 조아해오. 리젤처럼 함께하고 싶어해오. 그런데 그 여자는 시러오. 맨날 우는 멍청한…….]
“어머? 오빠, 인기 있네요?”
“질투하는 거야?”
자신에게 온 편지를 읽던 호는 뒤에서 들려오는 한시진의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리젤. 현재 에스트라다에 주둔하고 있는 수인 영웅으로, 주점에서 고용된 D등급 영웅이었다. 특출한 능력은 없어도 영웅은 존재만으로도 어느 정도 도움은 되는데다가 인력 부족이 심각한 영지 상황인 만큼, 호는 그녀를 고용해 이런저런 일을 시키고 있었다.
현재 리젤은 예전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신윤아의 곁에 있었다. 원래라면 자신이 직접 그녀를 맡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테지만,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지라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아, 그때 그녀와 함께 붙잡은 호표기들은 전부 그들이 말하는 발할라로 보낸 지 오래였다.
“질투는 무슨…….”
“후후. 이건 연애편지가 아니라고.”
뭔가 잡다한 내용이 섞이기는 했지만, 이 편지는 신윤아를 맡고 있는 리젤이 자신의 일을 호에게 보고하는 내용이었다. 아, 물론 말투는 상당히 이상했지만.
하지만 호의 말에 한시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호는 그녀가 보지 못하게 미소를 짓고는 살짝 한시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런 한시진의 행동이 장난이라는 것을 호는 최근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클릭 한 번에 한 달의 시간이 흐르는 게임처럼 이 세계에서의 시간 또한 쏜살같이 흘러갔다. 에스트라다에서 첫 전투가 있고 난 후 벌써 3개월이 흘렀지만, 마족과 수인족의 대치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계속해서 소소한 교전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서로의 균형을 무너질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디르시나에서 양성되는 병력과 수인 왕국의 영지에서 추가로 보낸 병력들이 계속해서 합류하면서 서로의 덩치는 커졌지만,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마장기 전력이 대대적으로 보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 키마라이다!”
“퇴각! 퇴각해라!”
호에게는 B등급 마장기 키마라이를 보유하고 있는 에이스급 오너인 한시진이 있었지만, 마장기 전력은 달랑 그녀 혼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계속된 전투로 인해 키마라이의 상태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여기저기가 부서지고 뜯겨져 있었지만, 호의 진영은 마장기를 수리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수인 왕국은 그나마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C등급 이기는 하지만 카니앗산 한 대가 보충되며 총 네 기의 카니앗산을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을 치르는 동안 키마라이 한 대에게 무려 여섯 기나 되는 마장기가 파괴되었기 때문일까? 한시진의 실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은 직접적으로 마장기를 앞세워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전황은 고착된 채로 소모적인 공방만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교전으로 인해 호는 소소한 경험치의 이득만 취할 수 있었다.
‘1,100의 전투력 수치를 가진 놈 같으니라고.’
호는 수인족의 병사를 이끌고 있는 재배라는 원숭이를 떠올렸다. C등급의 수인 영웅이었는데,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평균적인 능력 수치를 지닌 녀석이었다.
아, 외모는 조금 특별했다. 놈은 쭈글쭈글한 머리를 가진 흉측하게 생긴 녀석이었는데, 자신의 부하가 되고 싶다고 오더라도 호는 절대로 받아주고 싶지 않은 그런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펼쳐진 전투에서 호가 그를 목격한 것은 단 세 번에 불과했다. 조심성이 강한 성격인지, 아니면 겁이 많은 것인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선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 * *
호는 병사들을 이끌고 조심스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안테로리 때처럼 종종 자신들의 진영으로 넘어오는 수인 왕국의 정찰병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교전은 호의 경험치 획득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병사들과 함께 얼마나 이동했을까?
호는 살짝 손을 들어 올리고는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호의 뒤를 따르던 엘븐 템플러들이 움직임을 멈추고는 숨을 죽였다.
부스럭부스럭-
호와 엘븐 템플러들이 위치한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진 않은 곳에 있는 수풀이 움직이고 있었다. 정예 실리스들의 보고에 따르면 수인족의 정찰대로 추정되는 녀석들이었다.
“서른 명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서른이라.”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서 귀엣말을 건네는 한시진의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족의 정찰대가 퀘스트를 달성할 수 있는 숫자인 백 명이 아닌 것은 아쉬웠지만, 생각해 보면 정찰대가 백 명이나 되는 수로 움직일 리 없었다. 사실 서른도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
뭐,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네시스 - 전장의 마에스트로’의 전직 조건이 충족되기도 했으니 아쉬울 것은 없었다. 이렇게 전투를 벌이며 경험치를 획득하다 보면 언젠가는 전직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호는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제는 이 세계에서도 제법 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일까? 긴장감은 느껴져도 무섭다거나 두려움은 없었다.
한시진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눈을 살짝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전투가 으레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공격!”
자신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조금씩 접근해 들어오는 수인족의 귀가 보이는 순간, 호는 외침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가려주고 있던 수풀을 지나쳐 앞으로 몸을 날렸다.
“캬앙?!”
갑작스러운 적의 등장에 묘인족 하나가 깜짝 놀라며 화들짝 뒤로 나자빠졌다. 하지만 곧 상황을 깨닫고는 자신의 무기를 호를 향해 냅다 던졌다.
하지만 이미 묘인족의 수를 꿰뚫은 호 역시 몸을 살짝 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시진처럼 화살을 쳐내는 묘기를 부리고 싶었지만, 무력 수치가 부족한 건지 아니면 실력이 떨어지는 건지 그럴 수가 없었다.
틱!
그 순간 묘인족이 던진 단검이 호의 어깨 장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며 무거운 소리를 냈다.
‘칫!’
지근거리이긴 했지만, 호는 자신의 무력 포인트가 제법 되었기에 당연히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몸을 트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어깨에 단검이 박힐 뻔했다. 하루라도 빨리 직업 등급을 올려 능력치의 상한선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한시진과 함께하는 훈련의 강도를 조금 더 높이거나.
어찌되었든 묘인족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안타까운 공격이었다. 그리고 실패한 공격의 대가로 내줘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