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리그너스 대륙전기 098화
“어…… 어떻게?!”
분명 아니, 당연히 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뒤에도 눈이 있는 모양인지 자신의 공격을 제대로 피해냈다. 마법 통신을 통해 들려오는 아군의 원망 가득한 비명소리를 무시한 채 방금 전 키마라이에게 주포를 쏘았던 카니앗산의 수인 영웅이 마법 통신을 이용해 말했다.
“에이스급의 실력을 가진 녀석이다! 모두들 조심해!”
하지만 그런 경고는 키마라이가 자신들에게 접근하기 전에 했어야 했다.
쿠우웅!
아군에게 공격당해 연기가 피어오르는 카니앗산을 뒤로 한 채 한시진은 자신에게 공격을 가한 마장기를 향해 공격을 이어나갔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검이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마장기의 동체를 쉴 새 없이 두드렸다.
“으앗! 어떻게 좀 해 줘!”
고통스러운 수인 영웅의 비명소리가 마법 통신을 타고 퍼져 나갔다. 대검과 마나 보호막이 부딪칠 때마다 조종부에 큰 충격이 밀려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도중 다리 하나가 와작 부서져 나갔고, 키마라이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다리를 잃은 카니앗산이 계속해서 꿈틀거렸지만 동체의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에서는 상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아군이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카니앗산이 자랑하는 등의 강력한 주포는 재빠른 몸놀림을 보이는 상대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일반 병사들에게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는 마법 화살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군이 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투웅! 퉁!
카니앗산의 등 뒤에 장착된 포가 송곳처럼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상대는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공격을 허공으로 튕겨내 버리고 있었다. 심지어 튕겨져 나가는 방향을 이용해 자신들의 공격을 오히려 아군 마장기의 마나 보호막을 박살내는 데 이용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카니앗산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주포 공격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양손이 묶인 채 싸움을 벌이는 느낌이었다.
“크읏!”
이대로 공격을 당하면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한시진의 공격에 얻어맞던 수인 영웅이 어떻게든 남은 다리를 움직여 키마라이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애를 썼다. 어떻게든 남은 다리와 몸으로 키마라이를 거칠게 밀어내고 도망을 치려고도 해봤지만, 한시진은 독사처럼 상대를 놓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쭈욱 뻗어 도망을 가려는 카니앗산의 다리 관절을 부수더니, 균형을 잃고 밑으로 쓰러지려고 하는 두터운 몸체를 그대로 강하게 발로 차올렸다. 거기에 얼마나 강한 힘이 실려 있던지,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몸체가 움푹 찌그러진 카니앗산의 동체가 키마라이의 머리까지 떠올랐다.
한시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콰지직!
한시진이 키마라이의 대검을 쇠꼬챙이처럼 세운 채 카니앗산의 동체를 향해 찔러 넣었고, 그녀의 공격에 꿰뚫린 마장기의 붉은 눈동자가 급격하게 빛을 잃고는 흐려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조종석이 있는 부분을 찔렀으니 조종석에 있던 수인 영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와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는 절로 감탄성을 터뜨렸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제 삼 분 남짓밖에 흐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한시진은 카니앗산 한 대를 박살낸 것이다. 그것도 완벽하게 말이다.
“프로는 다른 건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단순히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에서 마장기 조종술을 배운 자신하고는 달리, 그녀는 대한제국이라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군인이라고 했다. 게다가 한시진은 자신을 가리켜 화랑기사단장이라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말했다. 화랑, 아니 마장기를 이용한 전투에 엄청난 자신감을 보이던 그녀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되고 있었다.
특히나 지금도 보여주고 있는 카니앗산의 주포 공격을 허공으로 쳐내거나 오히려 상대의 공격을 역이용하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은 볼 때마다 호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May the mana be with you.”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한시진의 활약에 호의 입에서 한 영화의 대사가 무심코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눈을 빛낸 호가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말했다.
“우리도 간다.”
멀리서 아군 마장기의 활약에 움츠러드는 적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수인 군대를 향해 엘븐 템플러들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아크 로얄’ 윤호가 있었다.
“가자!”
호의 명령에 따라 수인 군대를 향해 진군하는 엘븐 템플러들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경험치를 수거할 시간이었다.
* * *
“으아악! 아악!”
난전이었다. 마장기와 병사들이 어우러졌고, 사방에서는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꼬끼오옹!”
“끼아아악!”
하늘에서 치키니가 폭탄을 투하하려고 한 순간 그들을 노리고 있던 정예 실리스들의 화살이 벼락같이 날아들었고, 기합소리와 함께 엘븐 템플러들에게 달려들던 나가씰들은 그 단단한 방어력을 뚫지 못한 채 목이 잘리고 있었다.
“마장기를 막아!”
“우리 편 마장기는 전부 어디로 간 거야!”
하지만 전장에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이는 바로 마족의 B등급 마장기인 키마라이였다. 키마라이가 대검을 땅에 내려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열댓 명의 수인 병사들이 곤죽으로 변했다.
그때, 그 난전 속에 끼지 않은 채 주변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는 백여 마리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전부 수인족의 A랭크 기병인 호표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투를 치르고 있는 수인 군대의 병사들 중 가장 높은 랭크를 보유하고 있는 친위대였지만, 호표기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때문이었다.
“아. 아아.”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성에 호표기의 시선이 중앙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들의 지휘관인 소환자 윤아였다. 그리고 윤아는 전쟁의 참혹함을 이겨내지 못한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땅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퇴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상황이 안 좋아!”
호표기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위풍당당했던 자신들의 마장기들은 적 마장기의 손에 모두 고철로 변해 버렸다. 등급의 차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네 기의 카니앗산이 한 대의 키마라이를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아군은 키마라이를 앞세운 엘븐 템플러들과 정예 실리스들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었다. 난전이 펼쳐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대부분 아군의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바로 지휘관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버독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을 이끄는 지휘관은 신윤아라는 이름의 소환자였다. 그러니 수인들은 당연히 지휘관인 그녀의 명에 따라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크아아앙! 이런, ×발!”
한 호표기가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주위의 다른 호표기들 역시 그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능력 없는 영웅이 군대의 대장, 혹은 지휘관을 맡았을 경우 일어나는 참사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퇴각해야 합니다! 빨리 명령을!”
보다 못한 한 호표기가 땅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윤아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버독의 명령에 따라 윤아의 부관을 맡았던 원인 영웅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 아아. 시, 싫어! 아아아악! 이거 놔! 살려줘! 살려주세요!”
하지만 끔찍한 전쟁의 충격 때문일까?
풀린 눈으로 비명만을 지르는 윤아의 모습에 호표기들은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버독이 이 여인을 대장으로 삼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한 호표기가 말했다.
“이 여자는 버리고 퇴각한다.”
“뭐? 그래도 돼?”
“전쟁을 계속하려면 남은 병사들만이라도 살려야 해!”
“그렇다고 대장은 버릴 수는 없어!”
“이 여자는 우리의 대장이 아니야!”
말을 꺼냈던 호표기의 외침에 다른 호표기들이 입을 다물었다. 대장을 버리고 퇴각하는 것은 수인의 체면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삼만이 넘는 병사들이 모조리 이 장소에서 몰살당할 판국이었다.
뿌우! 뿌우우!
잠시 호표기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퇴각 나팔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 수인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아를 비롯한 십여 마리의 호표기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키마라이와 함께 엘븐 템플러들이 겹겹으로 자신들을 포위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제기랄.”
마족의 마장기인 키마라이와 엘븐 템플러가 함께하는 모습은 호표기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언밸런스한 모습이었다. 엘븐 템플러. 회복 마법을 사용하는 엘프의 엘리트 병사지만, 희한하게도 마족의 소환자로 알려진 윤호가 이끄는 군대의 주력 병종이기도 했다.
어쨌든 자신들과 비슷한 실력을 지닌 엘븐 템플러들이 겹겹이 포위망을 만들며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에, 남아 있는 호표기들은 각자 자신들의 발톱을 꺼내들었다. 그들은 오늘 여기서 자신들의 대장과 함께 죽을 생각이었다.
“대장을 버렸다는 수모를 당할 순 없지.”
“우리는 자랑스러운 호표기다.”
수많은 종족의 연합체나 다름없는 수인 왕국이 리그너스 대륙을 지배하는 일곱 종족 중 하나가 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처음 수인 왕국이라는 연합체가 생겨났을 때 각 종족들 사이에서는 여러 불협화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바로 ‘수인은 전우를 버리지 않는다.’라는 모토 때문이었다. 리셴르나가 자신들이 빼앗긴 조그마한 수인족의 도시인 안테로리를 탈환하기 위해 계속해서 군대를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현재는 이런 수인족의 정신을 지키지 않는 종족들도 더러 생겨나고 있었지만, 대체로 많은 수인들은 대부분 전쟁터에서 동료를 버리지 않았다. 정말로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마 지금 도망간 녀석들도 완전히 퇴각한 것은 아닐 터였다. 만약 자신들과 자신들의 대장인 소환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면,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분명 자신들의 시체라도 데리고 가기 위해 에스트라다로 진격할 터였다.
그때 중앙에서 윤아를 지키고 서 있던 호표기 중 하나가 강하지만 명확한 악센트로 외치듯 말했다.
“모두들 발할라에서 만……!”
“잠깐.”
그때였다. 겹겹이 포위망을 펼친 엘븐 템플러 사이에서 한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바로 윤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