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리그너스 대륙전기 097화
쿠우웅! 쿵!
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양측의 의미 없는 포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성벽의 내구도는?”
“현재 40%입니다.”
“음.”
엘븐 템플러의 보고에 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회피 기동을 취하며 다시 마법 방어막을 향해 주포를 발사하려는 카니앗산들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이렇게 카니앗산으로 성벽을 공격하다가 마법 방어막이 사라지는 순간 전군을 움직일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말이다.
“어쨌든 이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소환자가 틀림없어.”
호는 그렇게 확신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 해 본 유저라면 지금의 전투 방식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성벽의 마법 방어막을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포를 이용한 공격이 아닌 마장기의 거대한 동체로 내리 누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법 방어막은 마장기의 공격에만 통용될 뿐 일반 병사들은 막아내지 못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저항이 거의 없어야 하겠지만, 지금 에스트라다의 상황은 저항이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수인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 호 자신이었다면 수적 우위를 이용해 병사들을 움직여 공성전을 벌였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카니앗산을 양 방향으로 접근시켜 그대로 동체를 이용해 마법 방어막을 박살냈을 터였다. 그렇게 박살이 난 방어막 사이로 카니앗산의 주포를 겨눠 성 안으로 발사하면 게임 끝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찔끔찔끔 발사해서 어느 세월에 이걸 다 박살내려고…….”
다시 성문의 마법 방어막을 퉁퉁 두드리는 상대의 마장기를 보며 호가 한심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 5일 간의 전투 결과가 고작 60%의 성벽 내구도를 깎아내린 것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건 자신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덕분에 지원군이 에스트라다에 도착할 때까지 성의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호의 시선이 성 내부로 향했다. 성 내부 중앙에는 커다란 대검을 장비한 붉은색의 마장기가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니앗산은 2분간 전력으로 주포를 발사한 후에는 10분동안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지. 앞으로 15초 후. 성문을 연다. 시진아, 준비됐지?”
[물론이에요.]
호의 말의 끝나기가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키마라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키마라이의 뒤에 도열하고 있던 칠천 명가량의 엘븐 템플러도 오와 열을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호는 마장기 전의 승패에 따라 직접 자신이 병력을 이끌고 상대의 진영을 몰아칠 생각이었다.
‘4 대 1이긴 하지만, 카니앗산은 거미와 같은 생김새로 인해 근접전에는 상당히 취약한 편이야. 분명 시진이의 실력이라면…….’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려봤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만 했다.
잠시 후, 수인족의 카니앗산이 포격을 끝내고 재충전에 들어가기 시작하자마자 이제까지 굳게 닫혀 있던 에스트라다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 * *
쿠웅! 쿵!
“…….”
키마라이가 이동하며 만들어내는 진동이 조종석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시진에게는 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마장기 키마라이. 그녀의 세계에서는 화랑과 흡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이 병기는 한시진의 기준에는 조금 못 미치는 마장기였다. 하지만 호는 이 마장기가 마족의 주력병기이며, B등급이라 꽤 성능이 괜찮은 녀석이라고 말했다.
“괜찮은 성능이라…….”
조종석을 통해 호를 바라본 한시진은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대한제국이라는 그녀의 나라를 기준으로 봤을 때, 키마라이는 약 두 세대 정도 떨어지는 성능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비행기술조차도 없었다. 친위기사단은 물론이고, 일반 군인들도 이런 구세대의 화랑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마장기 전력이 떨어지는 저 아래 동남아 쪽 가난한 나라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키마라이의 능력이 불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지금은 이 정도도 감지덕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화랑, 아니 마장기가 전쟁터에서 어떤 위력을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조심해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이 먼저야.”
“네, 걱정 말아요. 오빠.”
조종석으로 전해오는 호의 목소리에 대답을 한 한시진은 정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조종간에 손을 댔다.
“그럼 가볼까?”
거대한 성문이 조금씩 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멀리 보이는 거미 형태의 마장기들. 카니앗산이라 불리는 저것이 오늘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었다.
삑, 삐빅!
요란한 소음과 함께 카니앗산이 레이더에 잡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한시진은 조종간을 잡고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마장기는 화랑과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조종 방식은 이미 몇 번의 기동을 통해 익힌 터라 그녀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진다는 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닌 죽음으로 직결되는 길이었다. 하지만 한시진의 키마라이는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대한제국의 화랑기사단장으로, 적들에게는 ‘검은 악마’라 불렸던 자신의 실력을 굳게 믿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긴장감과 중압감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짜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또한 이 전투를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한시진은 점점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적?!”
“키마라이다!”
“어서 사방으로 퍼져! 키마라이는 B등급 마장기야!”
에스트라다의 성문이 열리며 키마라이가 등장하자, 수인족의 카니앗산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보다 등급이 뛰어난 키마라이를 근접전으로 상대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카니앗산들이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서로의 거리를 벌렸다. 맹수를 그물에 가두는 것처럼 화망을 만들어 키마라이의 접근을 억제하려는 행동이었다.
그때 호는 그런 카니앗산들의 움직임을 성벽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호 님. 냐앙. 지원 포격이라도 할까요?”
“아니, 됐어.”
대답과 함께 호는 성 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차피 여기서 포격을 해봤자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어 전투에 영향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어떤 녀석이 카니앗산에 탑승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정석에 가까운 전술을 보이고 있었다.
저런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는 좀 더 빠르게 접근해 상대를 무너뜨려야만 했다. 혹은 회피 기동을 통해 상대의 공격을 피해내며 접근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는 일단 한시진이 접근하기 전에 카니앗산의 화망이 완성될 것 같았다. 결국 한시진의 회피 기동에 따라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
“……시작이다.”
호의 예상대로 네 기의 카니앗산은 키마라이가 접근하기도 전에 화망을 구축했다.
호는 카니앗산의 주포에 붉은색과 노란색의 빛이 모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충전이 끝나지 않았을 테지만 동력원을 이용해 무리해서라도 발사를 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어쨌든 한시진이 카니앗산의 연속 사격을 어떻게 막아낼지 궁금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맥없이 당하지는 않겠지만, 불안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때 카니앗산의 포격이 시작되자, 호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A랭크의 병사들도 단숨에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위력을 지닌 카니앗산의 포격을 한시진은 자신의 대검을 이용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 쳐내고 있었다.
“저런 게 가능한 일이야?!”
카니앗산의 주포가 느린가?
그건 전혀 아니었다. 카니앗산의 주포를 가리켜 플레이어들은 레이저 빔 병기라고 불렀다. 발사가 시작되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를 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인간의 눈으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키마라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카니앗산의 주포 공격을 대검으로 쳐내고 있었다.
“냐아앙?!”
리아 캬베데 또한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자신의 눈을 비비고 있었다.
“이, 이런 미친!”
“사…… 사격!”
“발사해!”
황당한 것은 카니앗산을 조종하고 있는 수인 영웅들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자신들의 무기를 검으로 쳐내고 있었다. 그 횟수가 한 번, 두 번 늘어날 때마다 마장기를 움직이는 수인 영웅들의 비명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화살도 아니고 무려 마장기의 마력포였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투확! 투앙!
카니앗산의 등 뒤에 장착된 커다란 포신이 쉴 새 없이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시진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공격을 쳐내거나 간단한 움직임으로 카니앗산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귀찮긴 해도…….”
한시진은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자신의 무기를 이용해 빔 병기를 쳐내는 것은 결코 쉬운 기술이 아니다. 하지만 각 나라의 에이스급으로 불리는 화랑기사들은 대부분 익히고 있는 기술이었다. 그것은 한시진도 마찬가지였다.
카아앙!
마장기의 대검을 타고 손으로 전해지는 충격을 느끼며 한시진은 쉬지 않고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막을 수 있는 것은 쳐내고,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한다. 검에 조금의 손상은 가겠지만, 마장기 동체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
“그러면 이 세계의 마장기가 얼마나 단단한지 한 번 확인해 볼까!”
그렇게 자신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우측의 카니앗산에게 접근한 한시진은 재빠르게 조종간을 움직였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키마라이가 카니앗산의 기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읏?!”
키마라이의 순간적인 움직임에 카니앗산을 조종하는 수인 영웅이 화들짝 놀라며 재빠르게 자신의 마장기를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키마라이의 접근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결국 상대 마장기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수인 영웅이 재빠르게 조종석의 한 버튼을 눌렀다.
투투투투투투!
카니앗산의 동체 여기저기에 장착된 무기에서 마법 화살이 기관총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두터운 장갑으로 무장한 키마라이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잠깐 멈칫한 틈을 타 한시진은 카니앗산에 더욱 가까이 붙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대응이 좋지는 않은데?”
눈앞의 카니앗산은 한시진이 상대하는 이 세계 최초의 마장기였다. 수인이라 불리는 동물처럼 생긴 존재들이 어떻게 마장기를 다루고 전투를 벌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가벼운 기동에도 자신을 떨쳐내지 못하는 지금의 모습만 봤을 때는 이들의 마장기 조종술은 한시진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지이잉!
한시진이 정신을 집중하자 키마라이의 거대한 대검이 푸른빛에 감싸이기 시작했다. 마나라 불리는 이 세계의 강력한 힘이었다.
그 순간 그녀가 강하게 검을 내리쳤다. 목표는 카니앗산의 다리. 관절 부위를 끊어 놔 상대의 움직임을 묶을 생각이었다.
카아아앙!
손을 통해 강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한시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장갑이 얇은 탓에 카니앗산의 다리를 끊어내는 것은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시진은 쉬지 않고 남은 카니앗산의 다리를 공격했다.
목숨을 건 전투에서 방심이나 적당히 라는 말은 사치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녀는 많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바보같이 죽어나자빠지는 동료나 적들도 그녀는 많이 봤었다. 최대한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야 했다. 한시진이 봤을 때 상대 마장기의 약점은 상대의 장점이기도 한 여덟 개의 다리였다.
“……?!”
그렇게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을까?
자신이 노린 카니앗산이 지닌 여덟 개의 다리 중 세 개째를 박살낸 찰나, 한시진은 뒤에서 느껴지는 싸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재빠르게 마장기를 옆으로 틀었다.
그 순간 뒤에서 발사된 또 다른 카니앗산의 주포가 그녀가 공격하던 카니앗산을 꿰뚫었다. 근접거리에서 쏘아진 탓일까? 상당한 위력을 지닌 카니앗산의 주포는 그대로 마장기의 마법 방어막을 부수며 본체에까지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