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리그너스 대륙전기 096화
“키마라이. 준비됐지?”
“네.”
호는 그녀의 대답이 짧지만 믿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마장기가 네 기라고 하니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거야.”
“걱정 마세요, 오빠. 저, 대한제국의 화랑기사단장 ‘검은 악마’ 한시진이에요.”
자신만만한 한시진의 대답에 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악마.’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별명이지만 96%라는 그녀의 숙련도를 생각하면 꽤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쉬이익!”
“히끅?!”
나가씰의 혓바닥을 보는 순간 윤아의 눈동자가 화들짝 커졌다. 그와 함께 절로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괴물들이 오와 열을 이루고 행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괴물들의 사이에 끼어 있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엄마…… 아빠…….’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자 윤아는 눈물이 절로 나왔다. 자신은 고작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까지 빠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울며 떼를 쓰던 아줌마가 무시무시한 호랑이에 잡아먹히던 모습이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우끼. 곧 있으면 에스트라다다.”
“아…… 알겠어요.”
한 원숭이 괴물의 말에 윤아는 흘러나오려는 울음을 참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실감은 나지 않지만, 자신은 현재 전쟁터에 나와 있었다. 커다란 고릴라와 같은 무시무시한 녀석이 에스트라다라는 성을 점령하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괴물들을 맡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아는 자신이 에스트라다라는 성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게, 게임. 그래 게임이야. 게임처럼 플레이하면 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의 오빠 때문에 이런 부류의 가상현실 게임을 몇 번 플레이해 본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몇 시간 정도에 불과했지만.
끼이잉! 쿵!
게다가 무시무시한 강철 괴물들이 내는 소음과 진동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마장기라는 거대 병기였다. 윤아는 로봇처럼 생긴 저 병사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면 에스트라다라는 성을 쉽게 점령할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를 더 행군했을까?
멀리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 하나가 윤아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아.”
눈앞에 보이는 성의 웅장함에 윤아는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잠시 잊은 채 감탄을 터뜨렸다. 마치 유럽의 멋진 고성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부우우웅! 쿠와아아앙!
“꺄아아아앗!”
“주포 사격?! 응사해라!”
땅의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흔들림과 함께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몸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흙먼지에 윤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말하는 전쟁은 결코 게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포격에 윤아는 눈과 귀를 감은 채 비명만을 질러야 했다.
-에스트라다에서 수인 왕국의 군대와 소환자 윤호가 이끄는 군대가 부딪쳤다.
이 소식은 곧 주위 영주들에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 전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영웅들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런 충돌이 가끔씩 일어나는 상황도 아니고 말이다.
호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나라인 블루 스케일조차도 그러려니 하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은 붉은 핏빛의 대지에 주둔하고 있는 엘프, 마족, 수인 왕국의 병력들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런 와중에 코르다의 영주 엘 샤난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며 지원군을 보내주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지만, 호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코르다의 병력은 이번 전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엘 아스린이 지휘하는 엘프 군단이라면 또 모를까, 코르다는 아직도 엘프 왕국의 D랭크 병사인 엘븐 나이트조차 모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인 왕국과 리아 캬베데가 이끄는 병사들의 첫 전투가 시작되고 나흘 뒤, 호와 한시진이 이끄는 디르시나의 군대가 에스트라다에 도착했다.
“저 병사들을 지휘하는 영웅이 소환자라고?”
“그렇습니다. 냥.”
리아 캬베데의 말에 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수인 군대를 이끄는 인물이 자신과 같은 소환자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었다. 소환자의 이름은 윤아. 몰래 정찰을 보냈던 정예 실리스들이 알아온 정보라고 했다.
처음 정예 실리스들은 자신들의 영주인 윤호와 너무나도 흡사한 이름에 화들짝 놀랐다고 했다. 심지어 윤호의 동생이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고 했다.
하지만 리아 캬베데가 말하는 그런 이야기에 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자신에게는 여동생이 없었던 데다가 남동생의 이름은 윤범이었다.
“…….”
어쨌든 윤아라는 이름의 소환자가 평범한 소환자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세계에서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을 플레이 해 본 경험이 있는 소환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호가 있던 세계에서는 여성 게이머도 상당히 많았고, 그 중에는 프로 게이머 수준의 실력을 보유한 게이머들도 있었다.
만약 상대가 그런 인물이라면 이 세계에서 자신이 상대하는 적의 약점이 무엇인지, 또한 어떤 방식으로 공략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수인 왕국이 삼만이 넘는 병사와 마장기가 네 기나 포함된 군대의 지휘관으로 소환자를 내세웠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소환자를 급성장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이 세계에서 소환자의 능력을 빠르게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그건 던전 파괴와 전쟁을 통해 경험치를 획득하는 방법이었다.
‘수인 왕국의 집중적인 케어를 받은 소환자라면……. 이거 힘겨워질지도 모르겠는데?’
이번 경우를 보면 앞으로는 다른 종족의 영웅뿐 아니라 그들의 지원을 받는 소환자들 역시 자신의 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소환자들은 이 대륙의 다른 영웅들과 달리 자신처럼 각 종족을 포용해 군대를 양성할 수 있었다.
또한 대륙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이벤트나 던전 등을 클리어해 좋은 아이템, 마장기와 같은 병기들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느라 인상을 찌푸리는 호에게 리아 캬베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냥, 조금 이상합니다.”
“음?”
“아니. 이상하다기 보다는…… 멍청했습니다. 냥.”
“멍청하다?”
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 말에 대답을 한 이는 리아 캬베데가 아닌 한시진이었다.
“첫 전투 이후 나흘 간 에스트라다를 향한 수인족의 공격은 총 일곱 번이었어요. 모두 마장기 '카니앗산을 동원한 공격이었죠. 하지만 피해를 입기 싫었던 것인지, 멀리서 몇 번 포격을 하고는 전투에서 물러났다고 합니다. 병사들을 동원한 공성전도 없었다고 해요.”
“극도로 안전을 중요시하는 성격인가? 수인 왕국의 다른 지원군은?”
“지원군이 모집되고 있다는 첩보는 없었어요. 그리고 안전을 중시한다기보다는 전쟁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어 보이는 느낌입니다.”
“아아.”
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쩐지 마장기를 동원한 공격이 수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트라다가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처음엔 리아 캬베데가 자신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발휘해 수인들의 공격을 잘 막아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소환자가 분명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쉬웠다. 만약 조금이라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면, 기껏 반쪽자리 카니앗산 하나밖에 없는 에스트라다를 어떻게든 공략해 자신들의 거점으로 삼았을 터였다.
디르시나에서 지원군이 온다 하더라도 성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컸다. 또 수인 왕국의 C등급 마장기인 카니앗산은 강력한 두 개의 주포를 이용한 공격 때문에 공성과 수성전에 특화된 마장기였다.
그 소환자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 해 본 유저라면 그런 간단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만약 수인 왕국의 군대가 에스트라다를 빠르게 공략해 카니앗산을 배치하고 버티기에 들어갔더라면, 호도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빠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는 에스트라다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었다.
호는 내일 한시진을 출전시켜 적에게 요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거기에 따른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전략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리아 캬베데와 한시진에게 전달했다.
“그럼 내일의 전쟁을 대비해 쉬도록 하자.”
그렇게 전략 회의가 끝나고 호의 입에서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그때 호의 눈에 한시진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이번 전쟁에서 그녀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했다. 혼자서 C등급 마장기 카니앗산 편대를 모두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둬 수인 왕국의 영웅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공포감을 강하게 심어줄 생각이었다. 림드 산맥의 소환자들이 쉽게 점령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 호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수인들의 군대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네 기의 카니앗산이 주포로 에스트라다의 성문과 성벽을 사정없이 쏘아댔다.
“캬아앙! 이 자식들은 사료도 안 먹냐아!”
덕분에 리아 캬베데는 아침 식사를 하다가 만 채 분노에 찬 울음을 터뜨리며 성벽 위에 배치된 카니앗산을 향해 달려가야 했다.
호 또한 식사를 멈추고는 음식을 대충 입에 우겨넣은 채 자신을 호위하는 엘븐 템플러들과 함께 성벽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시진도 키마라이로 향하고 있었다.
쿠웅! 쿵!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빔 줄기가 성문을 두드리며 진동과 함께 커다란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류탄 여러 발이 동시에 터지는 것 같았다.
‘C등급 마장기지만 카니앗산의 주포를 막아낼 정도라니. 돈이 좋긴 좋군. 미리 마법 방어막이 설치된 성벽을 건설해 놓기를 잘했어.’
호는 조심스레 성벽 위에 몸을 숨긴 채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레이저포라고 느껴지는 카니앗산의 주포, 아니 마장기의 무기는 단숨에 성벽을 박살낼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에스트라다의 성벽은 상당히 튼튼했다. 수인들의 공격을 대비해 돈을 발라 성벽을 업그레이드 시킨 덕에 성벽 자체에 마법 방어막이 추가로 설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A, B등급 마장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C등급 마장기의 공격은 어느 정도 버티는 모양이었다.
쿠우웅! 터엉!
그때 리아 캬베데가 쏜 주포가 수인족의 카니앗산을 직격했다. 하지만 상대는 잠시 멈칫하며 주저앉았을 뿐 잠시 후 일어나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마장기들 또한 마법 방어막이 있었기에 강력한 공격이나 마법 방어막 수치가 회복되기 전까지 일제사격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 파괴하기가 힘들었다.
“이거 완전히 보여주기 식의 싸움인데?”
리아 캬베데의 말대로 수인족의 공격은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정말로 어떤 목적이 있어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보고에 따르면 수인족의 지원군이 출발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설마 남쪽을 통해서?”
심각한 표정과 함께 호의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의 시선을 에스트라다 쪽으로 돌린 후 안테로리, 아니 이제는 지크로리로 이름이 바뀐 도시를 지배하는 리셴르나가 병력을 동원해 엘프 군단을 뚫고 킬리드를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킬리드의 방어병력은 고작 해봤자 정예 실리스와 엘븐 템플러 몇 백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 그건 무리야. 있을 수 없어. 엘프와 마족이 그런 꼴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지.”
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리셴르나가 그렇게 무리해서 병력을 움직이게 되면 커티삭에 있는 마족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멜리아 비쉬가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커티삭에는 볼 붸르니체스가 가장 신임하는 영웅이 머무르고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영웅은 리셴르나와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