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리그너스 대륙전기 094화
“흥미로운 제안이네만 우리 쪽이 너무 불리한 조건인걸? 마정석이 꼭 필요한 물품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그런 그나이 칼츠만의 반응에 호는 묘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이리스 성국과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엘븐 템플러와 훗사르를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훗사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이어지는 호의 말에 그나이 칼츠만은 자신이 골든 크로우의 재상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몸을 벌떡 일으켰다.
훗사르. 그것은 ‘전장의 재앙’이라는 이름으로 악명을 떨치는 수인족의 S랭크 기병대였다. 그들은 상대의 병과나 종족, 심지어 마장기가 앞에 있다 하더라도 겁 없이 돌격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병사들이었다. 한 마디로 앞에 성벽이 있어도 돌격을 하는 미친놈들이었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어마어마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훗사르의 돌격은 아군에게는 엄청난 사기를 드높여주고, 적군에게는 공포를 안겨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돌진 시 파괴력은 마장기의 장갑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수인의 S랭크 기병대. 그것도 친위 기병대로 십만의 병사로 이루어진 군단 규모의 부대에서도 천 기 남짓밖에 볼 수 없는 그 훗사르의 이름이 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하지만 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리스와 시간 그리고 제작 기술을 좀 더 넘겨주신다면, 그리고 원하신다면 ‘윙드 훗사르’를 지원해 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호의 말에는 강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이는 마장기 제작 기술을 손에 넣기 위한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수인족의 S랭크 기병인 훗사르의 양성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특산품인 한혈마는 에스트라다에서 생산할 수 있었고, 훗사르의 양성에 필요한 효율적인 테크 트리 또한 머릿속에, 그리고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 * *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전쟁은 마장기로 시작해서 병사로 끝이 난다. 이 대륙의 강력한 병기인 마장기는 전장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해주지만, 마장기만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장기의 제작에는 어마어마한 비용과 특산품, 그리고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마장기를 다룰 수 있는 B등급 이상의 영웅, 일명 마장기의 오너가 필요했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런 마장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용맹한 병사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훗사르는 용맹한 병사들의 조건에 아주 잘 들어맞는 악명 높은 수인의 기병대였다.
가상현실 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에 따르면 훗사르의 악명은 먼 옛날 수인과 드워프가 맞붙었던 체름 전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그 체름 전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훗사르는 무려 삼백의 병사로 만 오천이나 되는 드워프 군대를 박살냈다고 했다.
‘인병, 엘보, 마마, 수기, 드공, 천비, 정궁, 용만.’
호는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는 유저에게 있어 바이블과도 같은 한 문장을 떠올렸다. 이는 각 종족의 가장 뛰어난 병과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수기라는 말처럼 수인들의 기병은 다른 종족의 기병과는 차원을 달리 할 정도로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훗사르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할까?
인병. 슬프게도 인병의 병은 병신을 뜻하는 단어였다. 똑같은 랭크의 병사를 양성해도 인간들이 양성하는 병사들은 다른 종족의 병사들에 비해 특별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히려 같은 랭크임에도 불구하고 공방 수치가 현저히 떨어지는 병과가 있는가 하면, 동일한 랭크이면서도 양성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한 병사들도 있었다.
그나마 똑같은 자원으로 조금 더 많은 병력을 양성할 수 있는데다가 마장기의 제작비용 역시 다른 종족과 비교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호는 그런 인간족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호 제국의 황제였던 시절, 그 또한 겪었던 문제였으니 말이다.
“거짓이 아닙니다. 수인족의 S랭크급 기병대인 훗사르와 S+랭크급인 윙드 훗사르. 지원만 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훗사르를 양성해 골든 크로우에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돼! 훗사르가 어디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인 줄 아나?!”
너무나도 뻔뻔하게 훗사르를 양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호의 모습에, 그나이 칼츠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런 칼츠만의 행동에 호는 대답 대신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호의 시선을 따라 그나이 칼츠만의 고개도 돌아가고 있었다.
[병종-엘븐 템플러(A랭크 보병)
공격력-27 방어력-26 이동속도–4
중상을 치료할 정도로 강력한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엘프 고유의 엘리트 보병입니다.]
잠시 나타나는 엘븐 템플러의 정보창을 닫은 호가 그나이 칼츠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엘븐 템플러라는 증거가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참고로 말씀드리면, 디르시나의 모든 전력을 동원하면 매달 스무 부대의 엘븐 템플러를 양성할 수 있습니다.”
“으으음….”
그나이 칼츠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븐 템플러. 엘프 왕국이 자랑하는 그 철벽의 방패를 매달 이천 명이나 양성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얘기였다.
“그리고 엘븐 템플러는 골든 크로우의 A랭크 주력 보병인…….”
“팔라딘보다 실력이 뛰어난데다가 회복 마법까지 사용할 줄 알지. 알아, 알아. 나도 안다고. 젠장할.”
그나이 칼츠만의 대답에 호는 히죽 웃었다. 림드 산맥의 패자인 자신과 팔 왕국의 수좌인 골든 크로우는 비교 대상 자체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꿇리지 않고 내밀 수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엘븐 템플러였다. 림드 산맥의 주력 보병인 엘븐 템플러는 골든 크로우의 주력 보병인 팔라딘보다 전장에서 더욱 뛰어난 위력을 보일 수 있었다. 물론, 모병 숫자에서 만큼은 비교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빌어먹을 놈…….”
욕설과 함께 그나이 칼츠만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에서 보병과 기병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나 골든 크로우, 아니 팔 왕국은 다른 종족의 왕국들에 비해 허약한 보병과 기병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이리스 성국만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아.’
하지만 아이리스 성국의 뒤에는 천족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자 그나이 칼츠만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천족의 비행 전력은 전쟁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귀찮게 작용하기도 했다. 특히나 천족의 비행병이 아군의 보급부대만 노려 공격을 감행할 경우 전장의 상황이 엉망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엘븐 템플러라면.’
팔라딘과는 다르게 그들은 천족의 비행병을 상대로도 무난하게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회복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엘븐 템플러는 웬만한 부상이 아닌 이상 전장을 이탈할 필요도 없었다.
훗사르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A랭크도 아닌 무려 S랭크의 기병대였다. 천족의 비행병? 손 쇠뇌를 장착하고 있는 그들은 공중 공격도 감행할 수 있었고, 땅에서의 난전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호표기를 뛰어넘는 엄청난 돌파력은 전장의 재앙이라는 별명에 들어맞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이게 소환자의 힘인 건가?’
그나이 칼츠만의 눈동자가 호에게로 향했다.
다른 종족의 병사들을 양성하는 일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환자는 그게 가능한 모양이었다.
단단한 방패라는 엘프 왕국의 보병과 폭군과도 같은 수인 왕국의 기병대가 하나의 군대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나이 칼츠만은 쓰게 웃었다.
그가 엘프, 마족, 수인을 아우르는 병력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게 소환자의 능력인지, 아니면 윤호라는 자신 앞에 있는 남자의 특별한 능력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호의 조건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나이 칼츠만은 호의 조건을 받아들였을 경우 자신들이, 아니 골든 크로우가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좋았어!’
그때 그나이 칼츠만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며 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만약 골든 크로우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특산품의 판매를 통한 당장의 수입은 포기해야겠지만, 마장기의 제작에 필요한 연구 기술을 획득할 수 있는데다가, 그 연구력을 다른 쪽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잠시 후, 그나이 칼츠만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윙드 훗사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최대 이 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늦어. 대신 엘븐 템플러의 지원을 받았으면 하는데? 우리들의 명령을 확실히 듣는 거겠지?”
“림드 산맥의 이름으로 아무 문제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윙드 훗사르는 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일 년 반까지 시간을 줄여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엘븐 템플러는 당장이라도 지원이 가능합니다.”
호의 대답에 그나이 칼츠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는 받아들이도록 하지. 이는 골든 크로우의 재상인 나 그나이 칼츠만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거래일세.”
“그러면 어디…… 세부적인 조건을 좀 더 이야기해 볼까요? 아, 먼저 계약서부터 준비하겠습니다.”
계약서를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는 호의 모습을 그나이 칼츠만은 유심히 바라보았다. 머리는 차가웠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몇 년 전과 마찬가지로 최근 스무 명의 소환자가 인간 왕국에 새롭게 합류했다. 그리고 그중 골든 크로우는 여섯 명의 소환자를 보호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이거 새로운 소환자들에게는 좀 신경을 써야겠군.”
그들 중에 림드 산맥의 패자인 호와 비슷한 기량을 지닌 인물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나지막하게 들려온 그나이 칼츠만의 목소리에 계약서를 준비하던 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때 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새로운 소환자라 하시면?”
“최근 선택의 제단에 새로운 소환자들이 소환되었네. 모르고 있었나? 아, 마족이 선택한 소환자들은 쉐르난비체가 대부분 죽여 버렸으니 모를 수도 있겠군. 게다가 림드 산맥의 지리적 위치도 딱히 좋지 않으니.”
“……그렇군요.”
담담하게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호의 눈동자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 번째 소환이라니?! 여신 라헬!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호믐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나이 칼츠만이 말하는 소환자는 자신들이 아닌 또 다른 소환자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 * *
골든 크로우와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와의 계약이 체결되었다. 양측 다 만족할 만한 계약이었다. 그나이 칼츠만은 골든 크로우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게끔 계약을 작성하려고 했지만, 호에게는 로우덴이라는 S등급 견인 영웅이 있었다.
먼저 골든 크로우는 호에게 마장기의 제작 기술을 알려줘야 했다. 이는 각 종족의 마장기 제작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90여 개의 기술로 한정되었다. 또한 골든 크로우는 마정석을 제외한 C등급 마장기 열기 분량의 제작에 필요한 특산품도 제공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호는 골든 크로우에게 일정 수량의 마정석을 제공하고, 동시에 매달 한 부대의 엘븐 템플러를 보내줘야만 했다. 그리고 1년 반 후에는 훗사르를 두 부대씩 보내야 했다. 그렇게 보내는 용병의 계약 기간은 총 4년.
다만, 그 전에 골든 크로우의 마장기 제작 기술 전수가 끝나더라도 호는 계속해서 병사들을 골든 크로우에 보내야 했다.
추가적으로 S랭크 기병대인 훗사르가 아닌 S+랭크의 윙드 훗사르를 보내게 된다면, 골든 크로우에서서 인간의 C등급 마장기인 자넷 한 대를 받는 것으로 계약을 체결하였다.